[0216_발제] 제10고원(p.491-503)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9-02-15 13:42
조회
1648
제 10고원.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p. 491-, 정신분석
정신분석은 종종 그것도 처음부터 인간의 동물-되기라는 문제를 만났다. 우선 아이들에게서. 아이들은 그러한 되기를 끊임없이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또 페티시즘과 특히 마조히즘에서. (...) 그들은 동물에서 충동들의 대리자 또는 부모의 대리자를 보았다. 그들은 동물-되기의 실재성을 보지 못했으며, 어떻게 해서 동물-되기가 변용태 그 자체이자 몸소 나타난 충동이며, 따라서 아무 것도 표상(=대리)하지 않는지를 보지 못했다. 배치물들 그 자체가 아닌 충동들은 없다.

정신분석은 반자연적 관여들에 대한 감도 없고, 모든 출구가 막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가 올라갈 수 있는 배치물들에 대한 감도 없다. 하나의 판이지 환상이 아니니 말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능적인” 힘들을 길들이게 되는 반면, 말은 “획득된” 힘들을 인간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동물-되기를 파괴하려면 그것에서 하나의 절편만을 빼내고, 하나의 계기를 추상하고, 내적인 빠름과 느림을 도외시하고, 변용태들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항들간의 상상적 유사성이나 관계들간의 상징적 유비들만이 남게 된다. (...) 하지만 이러한 파괴를 부추기는 데는 정신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정신분석은 되기 안에 포함된 위험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동물, 길들여진 오이디푸스적 동물을 “흉내”내는 데로 돌아갈 위험을. (...) 동물-되기는 끊임없이 이러한 위험들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p. 493-, 어느 <이것임>의 회상
하나의 몸체는 이 몸체를 한정하는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규정된 실체와 주체로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며, 또 이 몸체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이나 몸체가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고른판 위에서 하나의 몸체는 오직 경도와 위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말하자면, 특정한 운정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 아래에서 몸체에 속하는 물질적 요소들의 집합(경도)과 특정한 권력, 또는 역량의 정도 아래에서 몸체가 행사할 수 있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집합(위도)에 의해. 오직 변용태들과 국지적 운동들, 그리고 미분적인 속도들만 있을 뿐.

<몸체>의 이런 두 차원을 뽑아내고 <자연>의 판을 순수한 위도와 경도로 규정한 것은 바로 스피노자였다. 경도와 위도는 지도 제작의 두 요소인 것이다.

어느 계절, 어느 겨울, 어느 여름, 어느 시각, 어느 날짜 등은 사물이나 주체가 갖는 개체성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완전한, 무엇 하나 결핍된 것 없는 개체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이것임>들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콩트들은 단순한 장소 설정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타당하며 사물들과 주체들의 변신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개체화인 <이것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여러 유형의 문명 중에서, 동양은 주체성이나 실체성에 근거한 개체화보다는 <이것임>에 의한 개체화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로렌스나 포크너가 그리는 하루의 어느 시간대, 열의 정도, 흰색의 강도는 완벽한 개체성이다. 열의 정도가 다른 정도와 합성되어 위도를 이루어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 열의 정도가 흰 색의 강도와 합성될 수도 있다.

Inq.
어떤 물체가 경도에 따라 이곳은 차갑고 저곳은 뜨거운 것처럼 말이다. -> 경도와 열의 정도
흰색의 강도 -> 위도, 밝기(명암)?
명암과 열? -> 빛?

순간의 개체성이 항상성과 지속성을 가진 개체성과 대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루살이가 만세력보다 더 적은 시간을 가진 것은 아니다.

지질학이나 천문학의 극단적인 느림과 현기증 나는 빠름 사이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기상학을 뽑아내는데, 거기에서는 별똥별들이 우리의 속도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뇌에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되듯이 하늘에 하나의 구름이 형성된다. 내가 숨을 쉬듯이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삶과 화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두 지평선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휴가가 지나가듯이 여름이 지나간다.” (...)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이러한 확실성이 형태를 잃어버리고 탈주체화되고 일종의 편재성을 획득한 쌍둥이 주인공에게만 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각주 42) L’ame deployee = the depolyed soul (전개(편재)된 영혼)

시간들이 추상적으로는 균등하다 해도, 하나의 생의 개체화는 이러한 생을 살아가거나 견뎌나가는 주체의 개체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둘에서] <판>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것들>들로 된 고른판 또는 조성의 판이 있는데, 이 판은 속도들과 변용태들만을 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판인 형식의 판, 실체의 판 또는 주체의 판이 있다. 그리고 [이 둘에서] 시간과 시간성 또한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아이온, 그것은 사건의 불확정적 시간으로서, 이것은 속도만을 알며 <이미 여기 도달한 것>과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나누는 유동하는 선이며, 동시적인 <너무 늦음>과 <너무 이름>이며, 막 지나갈 것이자 막 지나간 것인 어떤 것이다.

반대로 측정의 시간인 크로노스, 그것은 사물들과 사람들을 고정시키고 형식을 전개하고 주체를 한정한다.

(불레즈-음악)
박자와 무박자
박동하는 시간, 박동하지 않는 시간

: 요컨데 찰나와 지속 사이에, 나아가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화의 두 양태, 시간성의 두 양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에는 사물과 사람 유형을 한 형상화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것임> 유형을 한 시공간적 좌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매우 단순한 타협은 피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것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당신은 자신이 <이것임>이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이것임>이 될 때, “이것은 기묘한 혼합물이었으며, 현재 순간, 그때의 날씨, 거기 있는 사람들과 타협하기 위한 수단을 발견한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당신들은 경도와 위도이며,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며,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오후 다섯 시, 바람에 실려온 메뚜기 떼. 밤에 나타나는 흡혈귀. 보름달에 나타나는 늑대 인간. <이것임>이 단순히 주체들을 위치시키는 장식이나 배경에 있다고 믿든지 사물들과 사람들을 땅과 맺어주는 부속물들에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것임>이라는 것은 개체화된 배치물 전체인 것이다. 다른 [초월성의] 판에 속하는 것일 뿐인 형식들이나 주체들과는 무관하게 경도와 위도, 속도들과 변용태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바로 <이것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배치물들 속에서 주체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되는 것은 바로 늑대 자신 또는 말 또는 아이이다. 거리는 말과 합성되고, 죽어가는 쥐는 공기와 합성되고, 짐승과 보름달은 둘이 서로 합성된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배치물들의 <이것임>들과 각각의 배치물 안에서 생성의 잠재력들을 표시해주는 상호-배치물들의 <이것임>들(경도들과 위도들이 교차하는 환경)을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분리 불가능하다.

“마른 개가 거리를 달린다. 이 마른 개가 거리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외친다. 이런 식으로 느껴야만 한다. 관계들, 시공간적 규정들은 사물의 술어가 아니라 다양체들의 차원들이다. (...) 고른판은 서로 교차하는 선들에 따라 조성되는 <이것임>들만을 담고 있다. 형식과 주체는 이 세계와는 무관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군중 속을, 택시들 사이를 산책한다. 하지만 이 산책이 바로 하나의 <이것임>이다.

<이것임>, 안개, 그리고 강한 빛. <이것임>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리좀인 것이다.

p. 499-, <이것임>의 기호계
고른판은 <이것임>들만을 내용으로 갖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그것에 표현의 역할을 해주는 특별한 기호계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판과 표현의 판. 이 기호계는 특히 고유 명사, 부정법 동사, 그리고 부정관사나 부정대명사에 의해 조성된다. 실제로 형식적 의미생성과 인칭적 주체화에서 해방된 기호계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관사+고유 명사+부정법 동사>는 기초적인 표현의 사슬을 구성하며, 가장 덜 형식화된 내용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1. 부정법 동사는 시간(=시제) 면에서 결코 비결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이온>에 고유한 박동하지 않는 유동적 시간을 표현한다. 따라서 권리상 우리는 생성의 양태이자 생성의 시간으로서의 부정법을, 존재의 박동 또는 존재의 값을 형성하면서 <크로노스>를 지시하는 다른 모든 양태들 및 시간들과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다etre 동사는 부정법을 갖지 않는 유일한 동사이다. 또는 오히려 그 동사의 부정법은 규정된 양태와 시간의 총체를 지칭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취해진, 비결정된 텅 빈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 고유명사는 주체의 표지가 아니다. 고유 명사가 하나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하나의 명사(=이름)가 고유 명사의 가치를 띠게 되는 것은 형식이나 종과 관련해서가 아니다. 고유 명사는 우선 사건, 생성 또는 <이것임>의 질서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지칭한다. (...) 고유 명사는 시간의 주체가 아니라 부정법의 인자(agent)이다. 고유명사는 경도와 위도를 명시한다. <진드기>, <늑대>, <말> 등이 진정한 고유명을 갖는 것은 이들의 성격을 특징짓는 유과 속의 명명 때문이 아니라 이들을 조성하는 속도들과 이들을 채우는 변용태들 때문이다. 즉 그것은 꼬마 한스의 말-되기, 늑대 인간의 늑대-되기, 스토아주의자의 진드기-되기 등 스스로 그리고 여러 배치물 안에 존재하는 사건때문인 것이다.

3. 부정관사와 부정대명사 또한 부정법 동사와 마찬가지로 결코 비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는 차라리 결정되지 않은 형식 그 자체나 결정할 수 있는 주체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그것들은 결정을 결여하고 있다. 반대로 <이것임>들, 즉 개체화되더라도 하나의 형식을 지나가거나 하나의 주체를 만들지 않는 사건들을 도입할 때, 부정관사와 부정대명사는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부정어는 결정의 극대치와 결합한다. (...)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 요소들은 개념의 형식 및 인칭의 주체성과는 별도로 자신들이 한 부분을 이루는 배치물 속에서 자신들의 개체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부정어 뒤에는 어떤 숨겨진 정사가, 소유격과 인칭이 있기를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원하는 정신분석의 노력에 대해 어안이 벙벙해질 다름이다. (...) 하지만 언어학 자체도 하나의 인칭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한 이와 동일한 편견을 벗어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삼인칭의 부정어 <그, 그것>, <그들, 그것들>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미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어뇨를 언표 행위의 주체에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서의 집단적 배치물에 연관시킨다고 믿는다. 따라서 <누군가(On)>나 <그, 그것>은 결코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임> 유형의 배치물을 위해 모든 주체를 실격시킨다는 블랑쇼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 배치물은 인칭에 의해 형성되지도 않고 실행될 수도 없는 사건을 초래하고 추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함으로써만 다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일이 그들엑 일어났다.”) (...) <그, 그것>이 분절하는 표현의 사슬들에 대응하는 내용들은 일들 및 사건들의 극대치와 관련해서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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