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발제문입니다

작성자
Yeongdae Park
작성일
2019-01-22 17:58
조회
727
□ 다지원 <니체> 세미나 ∥ 2019년 1월 22일 ∥ 발제자: 박영대
텍스트: 니체, 『차라투스트라』, 1부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

여기를 원래 써야 하는데, 아래부터 쓰느라 시간이 없네요.
세미나 때 같이 얘기해봐요.


<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방법에 대하여 >

당혹스러움. 이 책이 주는 당혹과 불가능한 이해는 공통의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머무를 장소가 없다는 것(atopos=아토피)이다.
하지만 내용을 아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공통의 장소가 ‘발명’된다. 발명되는 순간, 장 자체를 여기로 옮겨서 세팅하는 순간, 내용은 빠르게 풀려간다. 암호의 해독과정이랄까. 해독과정에서 처음에 어떻게 접근할지 ‘키’를 찾기 힘든 것처럼.
공통의 장소를 발명할 수 있는 자, 오직 그만이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책(아니, 하다못해 한 절이라도)과 공통 장소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아토피나 두드러기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혹은 공통의 장소가 없다고 책을 내던지기 않고 읽어갈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아토피에서 공통의 장소성을 결코 발명할 수 없다면 그 장소를 버리고 이사를 가야 한다.)
새삼 떠오르는 부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위한 것도 아닌 책.”
이 책은 ‘모두를 위한 책’이다. 즉 누구에게든 ‘위버멘쉬’는 좋은 것이다. 우리가 지닌 ‘인간적’인 면모,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고 우리에게 이미 스며들어 있는 그 ‘인간다움’은 만병의 원인이다. 이를 떨쳐내는 것은 모두에게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기 자신이 되게끔 도와준다. 그런 면에서 “모두를 위한 책”이다. 프롤로그의 감동적인 구절. “스스로 원하여(자기 자신을 따르고자) 내가 가는 곳으로 나를 따르려는, 살아 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하지만 ‘위버멘쉬’가 되는 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어떤 ‘인간성’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확고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그렇듯 ‘모두’, ‘누구나’, ‘일반적’이나 ‘보편’이야말로 정말 문제다! 우리는 그런 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기만의 독특한 인간성을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방법을 만들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궁리토록 강제하는 그 계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이에 대한 해답이 『차라투스트라』다. 『차라투스트라』 안에 내용상 있기도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 자체, 이 책의 형식, 이 책을 읽어가는 독해법이다. 니체는 의도적으로 공통 장소가 없는, 결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그래서 당혹스러운 책을 썼다. 그러고자 무진장 애를 썼다. 자기 나름의 고투 끝에 이처럼 누구와도 장소성이나 기반을 공유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는 무지 어려운 작업이리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동서고금, 지역과 시대를 건너 읽히는 고전을 쓰기도 무진장 어렵지만, 단 한 명의 인간과도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 그 어떤 호모 사피엔스도 첫 눈에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건(그 누구도 위하지 않는 책) 고전을 쓰는 것만큼, 혹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저자 자신이 모든 인간성, “자기 뒤에 있는 수천 개의 전제들을” 계속 돌파해야만 가능하다. 완벽한 비-인간이야말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위버멘쉬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위버멘쉬와 ‘자기만의 자기 자신’은 동의어이다.
그래서 결론은 각각의 절마다 공통의 장소를 스스로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 관점(퍼스펙티브)을 취하자마자(혹은 입자마자, 관점 자체가 되자마자), 완벽한 블랙이었던 이야기는 ‘키’를 통해 해독된다. 즉 풍부한 잠재성을 갖고 폭발한다. 하나의 줄은 새로운 생각 두세 가지를 산출해내고, 두세 줄은 열 가지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도록 강제한다. (이 잠재성과 새로움은 결코 의식적이고 의도적이지 않다. 그것은 화학반응처럼 만나면 폭발하는 것이며, 그럴 때 강한 폭발력을 지닌다. 때문에 새로움에 대해서 우리는 수동적이고 강제받을 뿐이다. 그래야 진정 새로울 수 있다.) 우리에겐 이 관점의 발명, 공통 장소의 강제적인 산출이 필요하다. (내가 이 방법론을 쓰고 있는 경험이야말로 바로 이 새로움의 폭발이다. 들뢰즈의 “유출”. 전적으로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 절 덕분이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발명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기도 하다. 단지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발견’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적인’, 그리고 ‘보편’이라는 장막을 갖고 있는 한에서 우리와 만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걷어내는 순간, 나와 책은 충돌/사고/사건을 일으켜버린다.
다행히, 무의식적으로 암중모색하는 것보다는, 의식적으로 유념하면서 발견/발명하면 좀 더 잘 된다는 거다. 이해가 안 될 땐 의심해야 한다. 이 주제어(○○에 대하여)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상이 무엇인지. 그 인상 때문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해당 이야기의 특정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거기가 함정이고 니체가 의도한 함정이다. 이 장 자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래서 첫 번째 인상을 넘어서 단어와 맥락을 쫓아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장소는 발명된다. 그 순간 이미 하나의 위버멘쉬가 탄생한 것이고,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최소한 한 면에서 만큼은. 그리고 그 위버멘쉬는 기존의 내가 아니다. 새로운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나에게서, 하지만 나와 닮고 이어진. 그 아이는 또 다른 아이를 만들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많은 위버멘쉬, 더 많은 자기 자신을 만들게 된다. 이 자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립했다는 기쁨, 그것이 니체와 철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이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사람은 즐거운 일은 계속하게 마련이고, 지고한 기쁨은 결코 중단시킬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발명하는 일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들뢰즈, 대담:1792~1990>
책을 읽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네. 우선 책이란 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자라고 생각하고서, 그 속에 담긴 소기들 (signifies) 을 찾아보든가, 혹은 썩고 타락한 사람들이라면 능기 (signifiant) 를 찾아 나서는 것이지. 그리고 그 다음에 읽는 책은 전번 상자에 담기는 상자, 혹은 그것을 담는 상자로 생각하는 것이지. 그리고는 토를 달고, 해석을 하고, 설명을 요구하고, 결국 책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같은 식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하나의 反 능기적 기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지.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들면 되는 거지.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지. 무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지.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지.

전원 연결과 같은 식이지. 나는 아무런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도 자신들 '습관' 덕분에,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 방식 덕분에, 기관 없는 육체란 말을 금방 이해한 사람들을 알고 있네. 이같은 독서방식은 앞서 얘기한 방식과 반대되는 것으로, 책을 즉각적으로 외부에 결부시키는 것이지.

책이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기계장치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 장치와 같네. 글쓰기란 하나의 유출과 같고. 그 유출은 여러 형태의 유출들 중 하나일 뿐, 별다른 특권을 갖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다른 유출들, 즉 똥의 유출, 정액의 유출, 말의 유출, 행위의 유출, 관능의 유출, 금전의 유출, 정치의 유출 등과 함께 흐르던가 혹은 역류하던가 하는 뒤섞임의 관계를 갖게 되는 거지. 블룸처럼 한 손으로는 수음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모래 위에 글을 쓸 때, 두 유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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