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우리, 더 잘 망하게 해주세요!ㅣ김신식 애서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0:56
조회
858
우리, 더 잘 망하게 해주세요!

김신식 애서가


* 이 글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3년 1월 1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11134757


1.
굳이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으레 써오던 "어유 정말 이러다 다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표현이 인기 있는 정치적 슬로건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세상을 견디는 최상의 대안은 차라리 망하는 것 자체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최근에 '망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눈에 띄는 단어를 꼽아보자면 '파국' 혹은 '묵시록'인 것 같다. 한때 90년대 문화비평의 정서에서 제법 느낄 수 있던 '망할 때까지 가보자'가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기운으로 해석되며 사회를 향한 개인의 정서적 우울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파국 혹은 묵시록을 통해 제안되는 망함은 <우애의 미디올로지>(임태훈 지음, 갈무리 펴냄)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자기 중독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망함의 풍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약을 하거나, 늦은 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면서 두 팔을 벌린 채 이 세상을 향해 "씨발, X까라 그래!"라고 외치는 걸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적어도 도시 하나는 가볍게 사라져야 하고, 좀 과장되게 말해서 지구도 파리 목숨이 되어야 '망했다'고 취급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파국의 정서를 통해 "우리 세상, 더 잘살아볼 필요가 있어" 같은 착한 태도를 꼭 견지할 필요는 없다. 외려 재난의 스펙터클과 이를 통해 형성되는 파국의 풍경을 체험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는 상상하지 못함을 인정해버리는 게 아닌지, 그래서 그것을 감추려고 세상의 종말에만 탐닉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나마 쓸모 있을 것이다.

2.
망함을 상상한다는 큰 차원에서, 문강형준의 <파국의 지형학>(자음과모음 펴냄), 복도훈의 <묵시록의 네 기사>(자음과모음 펴냄), 그리고 임태훈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나란히 놓고 읽어볼만하다.

세 책 모두 비장미가 진하게 풍기지만, 그중에서도 '비장미 지수'가 가장 높다고 느낀 <파국의 지형학>은 그 엄중한 분위기가 시종일관 계속된다는 약간의 부담감은 있지만, 제목처럼 파국에 대한 저자 자신의 밑그림이 단단한 책이다. 파국에 대한 이론적·정서적 지도를 이 책이 다 짊어질 순 없지만, 6장 '허무를 허물기 : 파국의 정념에 대하여' 같은 장은 파국의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니힐리즘에 주목하여 그것을 또 세 형태로 나누는 신선한 작업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매력 있다.

<묵시록의 네 기사>는 파국의 상태를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그리고 저자가 이 상태를 고민하고자 어떤 이론적 사색을 거쳐 왔는지를 패를 에두르지 않고 분명하게 꺼내 보인다는 노력에 장점이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늘 개입해왔던 '문학'이라는 테마를 집중력 있게 끝까지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할 말 많은 파국의 풍경을 산만하지 않게 보여준다는 매력도 선보이는 책이다. 다만 파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레 삽입되는 주요한 정치철학자들의 논의를 너무 매끄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라는 아쉬움은 있다.

한편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세 책 가운데 파국의 상태를 가장 명랑하고 재치 있게 보려는 저자의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저자 자신이 '지금, 여기'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선의가 호감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세 책은 모두 공통적으로 문학과 영화를 기반으로 한 매체성과 파국의 특질에 제법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세 저자가 꽂힌 테마는 한국 문단에서 예전엔 그 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하지만 최근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판타스틱 문학'(영화도 포함된)을 둘러싼 함의들이다. <우애의 미디올로지>에서는 판타스틱 문학의 잠재력을 매체의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려는 시선이 감지된다. 이와 더불어 책을 비롯한 올드 미디어로 인식되던 매체들의 새로운 회복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 챙기는 이 시대의 '문학다움'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라는 사명감 넘치는 발언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글쓰기의 측면에서 <우애의 미디올로지>가 챙기는 '매체론'과 '문학론'이라는 양 축에서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가운데, 저자가 제시하는 새 개념과 시선들은 정밀한 분석으로 이뤄진 근거 아래 다져지기보다는 다분히 정서적 구호라는 인상이 짙었다. 이와 더불어 그 구호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면, 저자 자신의 글쓰기에 투여하는 에너지가 사회 현상 분석과 그에 따른 열의 넘치는 정치적 구호를 잘 이어주지 못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저자가 치열하게 되짚어보려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이 생생하게 드러날수록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호의 강도와 방향이 외려 이 땅을 사는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에 관하여, 나는 이 점을 '상상력의 풍요로움'이라는 선의의 해석으로 가져가기엔 문제가 있다고 봤다.

3.
비슷한 맥락에서 좀 더 책 속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면, <우애의 미디올로지>가 자본주의의 자기 중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하는 이른바 "신체의 기술"과 그것을 둘러싼 사유의 상상력은 '이분법 구도의 극복', '진실과 거짓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라는 저자의 정치적 의지를 다분히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그러다보니 저자가 각 장에서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파선" 보기, 신체의 기술 같은 개념이 반복될수록 이 개념이 단단하게 책의 논조를 휘감고 있기보다는 저자의 좋은 의도를 자주 갉아먹는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피로감은 아이러니하게도 파국 혹은 묵시록 같은 이른바 상상력을 요하는 개념들이 실은 이 세상의 리얼리티에 충실해야만 더욱 선명히 사람들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리얼리티는 그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 디테일과 자연스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망함에서 오는 백지 상태, '이 세상이 규정하고 있는 온갖 가치들에서 벗어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말 그 자체마저도 뛰어넘는 상상을 도모하자'라는 주장을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이 세상을 도저히 마주볼 수 없을 정도의 사건들이 개입된 지긋지긋한 리얼리티'라는 단계를 거치게 해줘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애의 미디올로지>에서는 그런 섬세함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사건 A가 터졌을 때 철수는 가라고 이야기했지, 영희는 그 가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했어, 그런데 문제는 둘 다야.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제3의 지점을 찾아야 해' 같은 유의 주장이며, 이런 '제3의 지점 찾기'를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상상력으로 동일하게 가져가려는 투박한 태도들뿐이다.

이 책의 2부 3장 '미적지근한 시민들의 촛불을 위하여'와 3부5장 '웹 3.0의 '명제 공간'과 '문학'의 좌표'는 특히 아쉬운 대목이었다(이 장은 저자가 서문에서 주목해서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가령 저자가 지적한 촛불의 두 거시적 담론이 놓치고 있는 지점에는 '미적지근함의 디테일'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미시적·문화적인 관점들이 놓여 있는데, 그러한 관점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자는 소위 '지식인 담론의 전형'과 그 반대라는 대립 구도로 설정해 놓았다. (참고로 저자는 조정환의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펴냄)과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펴냄)를 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이런 '촛불 담론' 비판의 전형적인 틀을 그대로 가져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나아가 저자가 르포르타주를 통해 더 복원되어야 한다고 보는, 촛불의 큰 담론에 희생되어 왔다고 보는, 저자가 지목한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기억 회복(저자는 논의를 위해 촛불집회 당시 매우 붐볐던 편의점 GS25 덕수점 아르바이트생의 마음을 상상해 보자는 예를 든다)은 사실 예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측면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4.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파국을 상상하기', 그리고 '망함을 사유하며 상상력을 펼쳐본다는 것'을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가 마음껏 전유해버린 '창의성'에 관한 시시한 논의들과는 별개의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서 뜻 깊은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을 자본주의의 자기 중독증의 치료제로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치료해야 할 대상에 대한 좀 더 섬세한 진찰과 접촉이 전제되고 소개되어야만 자본주의에 잠식된 생각 덩어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대상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저자 자신의 치료법을 따를 수 있는 내 신체 안에 깃든 더 세밀한 문제점들을 끄집어내진 못한 듯 보인다. 책을 덮으며 마음속으로 '이 치료법 예전에도 나왔던 건데…', '선생님의 치료법은 뭔가 솔깃하면서도… 찝찝하네요'라는 생각만 계속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파국과 묵시록 담론, 로우테크의 미시사, 사운드스케이프 문화사, 웹 시대의 문학 담론까지 뒤범벅된 와중에 망하더라도 더 잘 망하고 싶다는 바람이 책의 서두를 읽을 때만큼 유지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포함한 파국의 풍경을 논하는 몇몇 사유가 '지금, 여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놓쳐선 안 된다는 점에서, 나는 감히 이 기회를 빌려 파국 혹은 묵시록의 이야기가 더 넓고 깊게 전파/전염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진다. 일찍이 테리 이글턴은 '유토피아 문학'을 다룬 한 글에서 유토피아 소설에서 구축하는 이상적인 왕국은 그저 현재의 지점에 관한 집착을 더욱 부추기는 정치적 저널리즘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이 주장은 <반대자의 초상>(김지선 옮김, 이매진 펴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글턴이 말한 것은 상상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주는 어떤 한계를 고민해본 것이리라. 다만 나는 그 어떤 비꼼 없이 파국 혹은 묵시록을 논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소중한 정치적 저널리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숨기지 않겠다. 그런 점에서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당신이 꼭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개입할 수 있는 파국 특집 '주말 판 에디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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