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크랙 캐피털리즘』 서평: 균열, 혹은 반란을 향한 (가)시적 멜로디 | 공강일(현대문학전공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2:04
조회
1537
『크랙 캐피털리즘』 서평: 균열, 혹은 반란을 향한 (가)시적 멜로디

공강일(현대문학전공자)


* 이 글은 2013년 3월 2일 토요일 오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된

21세기 대안총서 시리즈 완간기념 집단서평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어디에서 반란을 시작할 것인가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사치에가 핀란드에 도착하여 카모메 식당을 열고, 이곳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미도리, 마사코를 만나 그들과 함께 식당을 운영해 간다는 소박한 이야기다. 영화는 이들이 왜 일본을 떠났는가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왜 하필 핀란드를 선택했는가 역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지만 딱 한 번 그 이유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식당을 처음 방문한 마사코가 커피를 마시며 던진 질문이 그것이다. 마사코는 식당을 휙 둘러본 후, 사치에와 미도리에게 “당신들은 여기서 어떻게 식당을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라고 묻는다. 미도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사치에는 멋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반농담으로 질문을 회피한다.

정말 중요한 장면은 지금부터다. 마사코는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럽군요.”라고 지나가듯 말을 던진다. 그러자 사치에는 마사코의 말을 얼른 받아 정정한다. “아뇨,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죠.” 그 말을 들은 마사코는 순간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이 장면, 사치에와 마사코가 주고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가장 난해한 부분인 동시에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과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동의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말의 방향은 같지 않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삶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는 삶을 말한다. 그러한 목적과 목표에 자신의 삶을 맞춰 나갈 때 비로소 원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 따라서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싫은 것을 무릅쓰는 삶이며, 그 목적에 맞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삶이다.

이와 반대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그러한 목적이나 목표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일 것이다. 삶의 목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절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사치에가 말하는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이란 목적이나 목표가 중심이 아닌 삶이다. 삶 그대로에 열중하는 하는 삶이며, 목적이라는 것에 함몰되지 않는 자신의 삶 자체를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할 때 피조물인 우리는 삶 그 자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형식 속에서 납짝해지는 삶이 아니라 삶이 곧 형식이 되는 그러한 삶, 삶이 올곧이 자신의 삶인 삶이 가능해진다. 그로부터 등질적이고 균질한 삶에서 벗어나 유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크랙 캐피털리즘>의 저자인 할리웨이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유적 인간의 삶이며, '행위'의 삶일 것이며, 또 반란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반란이 왜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일본이 아닌 핀란드에서야 가능한 것처럼 그려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카모메 식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 역시 월든(Walden)의 호숫가에서야 자본주의적 제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었다(<월든>). 김씨는 밤섬에 표류해서야 자본주의와 단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며(<김씨 표류기>), 최해갑 역시 남쪽의 섬에 정착한 후에야 국가체제와 공권력에 맞서 본격적으로 저항하게 된다(<남쪽으로 튀어>).

왜 여기가 아니고 저기인가. 지금그리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변혁이, 반란이, 혁명은 가능할 수 있는가.<크랙 캐피털리즘>은 바로 여기에서의 투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삶이 가능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그러한 저항과 반란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존 할러웨이(John Holloway)는 말한다. 이 책의 중요성은 그런 것들에 대한 방법론과 실천론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핵심 문제는 지금여기에서의 선명한 논리를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일상적 삶의 일부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성, 품위, 존엄 등으로 생각하는 것의 반-논리이다. 심지어 가장 무해해 보이는 사례들에도 언제나 그 근저에는 불복종이나 비복종이 놓여 있다(58면).

2. ‘지금여기에서’의 반란의 공통점

자본에 대한 반란은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며, ‘지금여기에서’의 반란이 행해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총 26명의 혁명가를 나열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은 일하러 가지 않겠다며 책을 들고 공원으로 가는 소녀도,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간호사도,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병사가 그들 중 한 명이다. 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이것들이 어떻게 '반란'일 수 있을까, 할러웨이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확히는 이러한 서로 다른 흐름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을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반란의 방식은 두 가지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하나 이 반란들은 자본에 대해 거부하고 불복종한다, 둘 이것은 다시 ‘추상노동’이 아닌 ‘유용노동’ 또는 ‘행위(doing)’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된다, 는 것이 그것이다.

① 자본주의 거부하기

자본에 대해 거부하는 일은 단순하다. 학생이 시험 보기를 거부할 수 있고 노동자 역시 언제든 일을 그만 둘 수 있으며, 병사는 살인하기를 멈출 수 있다. 혁명은 이러한 거부에서, 단순하고 일상적인 거부에서 시작된다. 책을 챙겨 공원으로 가는 소녀를 따라 우리 모두가 공원을 향한다면 자본은 금세 주저앉고 말 것이다. 거부와 순응의 얇은 막에 의해 자본은 유지될 뿐이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본의 공모자다. 이에 맞서서 거부하고 불복종하며 더 이상 시중들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즉각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니오!”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하나, 둘’이라는 구령에 맞춰 ‘셋’에 동시에 우리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지금 자신만 내려놓을까봐 겁이나 모두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너 때문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고 핑계를 대는, 짜라투스트라가 비판해마지 않는 ‘낙타’다.

그런데 우리가 동시에, 비록 동시가 아니더라도 동시에, 자본에 대항하거나 거부하려는 몸짓을 보인다면 자본은 또는 (자본에 기생하는) 국가는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낼 것이다. 고문, 성희롱, 협박을 가할지도 모르며, 심지어는 살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결국 투쟁은, 혁명은, 반란은 진압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그 진압이 일어난 자리를 자본은 더욱 세련되고 정치한 이론을 도입하여 덧대고 다시는 뜯어지지 못하도록 꿰매 버릴 것이다. 68혁명이 그러했고, 한국의 4·19가 그러했다. 여기서부터는 저자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저 모든 분노, 저 모든 창조성은 단지 자본주의의 새로운 스타일을 위한 기초를 놓았을 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란으로 출발하여, 약간의 고상한 보조금과 약간의 전문적 자문 및 훈련의 도움을 받은 후에 비정부기구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의 핵심요소로 끝나고 마는, 저 모든 자치적 그룹들을 보라. 노동시간에 대한 엄격한 시간관리에 대항하는 저 모든 바란들이, 노동시간의 유연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의 삶 전체에로의 노동시간의 확장을 통해 흡수된 것을 보라. 너무 순진하지 말라, [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도피구도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125면).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동학은 모든 혁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자신의 균열을 감추고 있다. 저자는 자본의 그러한 포즈를 꿰뚫어본다. 자본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여기에서'의 혁명은 그렇게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언제든 가능하며, 실패하지도 패배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하나, 반란은 미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68혁명은 하나의 축제였고, 기쁨과 창조성을 풀어놓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이것이 실패라고, 4.19혁명, 촛불시위, 점령하라(occupy)를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둘, 자본주의는 무한히 유연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혁명은 가능하다. 자본은 어떠한 반란도 흡수하여 동질화시키고 자기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처럼 자신을 과장하고 확대한다. 하지만 생활 속의 반란은 단지 우리가 소리내어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형태로 성공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거부와 순응 사이에 존재하는 얇은 막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그 막을 유지하려고 애쓴다.이것이 자본이 무한히 유연할 수 없다는 증거이며, 우리의 반란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다.

셋, 무엇보다 우리의 반란은, 자본주의가 획책하는 비인간화에 대항한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에 더욱더 그렇지 않다. 비록 자본주의가 대부분의 것을 흡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보다 더 앞으로 이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은 그러한 자본보다 더 빠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존엄은 자본에 맞서는 발 빠른 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존엄의 춤을 배워야 한다. 이 춤이 ‘지금여기에서’ 흘러 저기에 닿을 수 있는 우리의 거의 유일한 무기다.

그렇다면 이제 왜 우리의 존엄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발 빠른 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할 차례다.

②‘추상노동’과 ‘유용노동’(또는 ‘행위doing’)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간호사가 어떻게 반란하는 자일 수 있을까. 이 간호사는 자신의 근무시간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환자들을 돌본다. 분배된 균일한 시간을 거부하는 일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병사의 그것과 같으며, 오늘 일을 쉬고 공원으로 책을 읽는 소녀의 그것과 같다. 이들의 행동은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는 ‘추상노동’이 아닌 ‘유용노동’(‘행위’)이다.

‘추상노동’이란 ‘유용노동’이 추상된 일정한 노동량으로 단지 양적으로 전이됨으로써 생겨난다. 할러웨이는 ‘추상노동’과 ‘유동노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 것을 즐긴다. 나는 그것을 먹기를 즐긴다. 나는 내 친구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을 즐긴다. 나는 내가 만든 케이크를 자랑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케이크를 구우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나는 케이크를 굽고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판다. 점차 케이크는 내가 살기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이 된다. 내가 그것을 팔기에 충분히 낮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식으로 케이크를 생산해야 한다. 즐김은 더 이상 그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케이크 만들기가 어쨌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상, 더 잘 팔릴 다른 뭔가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위는 그 내용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 특징으로부터의 완전한 추상이었다. 내가 생산하는 대상은 이제 나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서 나는 이제 그것이 팔리는 한에서는 그것이 케이크인지 쥐약인지 상관하지 않는다(146~147면).

케이크를 굽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이것을 함께 나눠 먹을 때까지, 그리고 이것을 팔아서 수익을 얻을 때까지도 이 노동에는 목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적과 수단에 구분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유용노동’(‘행위’)라 불릴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케이크를 굽는 것이 삶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으로 변해 버릴 때, 그러니까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려할 때, 케이크를 굽고 즐겼던 그 수단과 목적의 행복한 조화는 파괴 되고 만다. 케이크를 굽는 행위와 그 행위의 내용과는 무관한 화폐가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추상노동’이며, 자본주의하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앞에서 언급한 <카모메 식당>은 그러한 노동을 확실히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치에, 마사코, 미도리의 삶은 ‘행위’이며 동시에 ‘반란’이라고 말했다.) ‘추상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기획과 수행의 통일성을, 목적과 행위의 통일성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고유한 인간성을 빼앗는다.”(147면)

간호사, 소녀, 병사는 이러한 ‘추상노동’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행위’이며 ‘반란’이자 ‘혁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의 규모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제도를 구축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할러웨이는 혁명의 제도화를 거부한다.

3. ‘지금여기에서’의 혁명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의 범주를 늘 벗어나 존재한다. 한국의 프로게이머는 프로그래머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길을 뚫는다. 이를 테면, 프로게이머는 ‘드론 비비기’를 통해 프로그래머가 막아 놓은 길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막힌 부분을 투과해버린다. ‘영의 이중 슬릿 실험’(Young's double-slit experiment)에서처럼 파동의 성질을 보이던 전자는, 관찰자라는 매개 변수가 끼어들면 입자의 성질을 보인다. 이러한 자연 혹은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과하여 과잉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존엄’은, 우리의 ‘행위’는 ‘추상노동’ 위로 흘러넘친다. 그러한 흘러넘침은 정식화 될 수 없다. 혁명은 이 세계의 강렬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규정할 수 없는 형태로 분출한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정식화할 수 있겠는가! 할리웨이 식의 비유대로라면, 혁명을 제도화는 일은 사랑의 시간을 결혼의 시간으로 전이시키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은 균열시키고 거부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이 책에는 할러웨이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나눈 서간문이 부록의 형식으로 실려 있다. 하트는 “우리의 자율적인 생산적 실천들, 즉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대안적 사회형태로 조직되고 또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할러웨이는 매우 완고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부분을 거론하는 것으로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이 제도화될 수 있나요? 나는 사랑의 혁명적 힘에 대한 당신의 참신한 생각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때 당신은 물어야만 합니다. 사랑이 제도활 수 있는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혼인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지 ‘반복되는 사회적 실천, 즉 습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경험에 따르면, 사랑은 습관과 부단히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반복되는 사회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잘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단히 그것-속에서-그것에-대항하며-그것을-넘어서 움직일 때에만 그렇습니다(391면).


*서평의 제목에 관해

비겁하지만 변명을 해야겠다. 처음부터 이 서평의 제목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제목을 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저자의 책임이다. “반란 사용설명서”나 “반란 안내서” 따위의 제목을 부칠 생각이었다. 이것도 썩 매력적이지 않지만, 위의 제목보다야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반란이나 균열을 제도화하거나 정식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한 노력들 속에 이러한 미세한 균열들의 갈라짐이 포획되어 버리며, 그 갈라짐은 다른 균열들과 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저자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행위’를 설명하는 장에 “틈새혁명의 멜로디들”이라는 제목을 부치고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멜로디는 규정되지 않는 멜로디이며, 반(反)문법으로서의 멜로디이며, 생성의 멜로디다. 그러므로 그런 이유로 나는 설명서, 안내서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러웨이를 따라 ‘멜로디’라는 말을 썼다. 그 사이의 ‘(가)시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멜로디를 한 번 더 설명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멜로디는 가시적(可視的)일 수 있으나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정식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시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엄연히 존재하고 현실화 되는 혁명을 보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가’에 ‘()’를 쳤다. 이렇게 하면 ‘시적’이 詩的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야무진 생각을 했다. 시의 형태야 말로 가장 반문법적인 형태일 것이니 멜로디를 수식하는 말로 가장 적절할 것이다. 결국 이 서평의 제목은 “반란을 향한 멜로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제목을 어정쩡하게 붙인 것은 저자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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