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37호] <한국문학 읽기> 정념의 역사적 정치적 분석과 ‘정동-코뮨’의 구축ㅣ이성혁(문학평론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1 11:45
조회
1579
<한국문학 읽기> 정념의 역사적 정치적 분석과 ‘정동-코뮨’의 구축

이성혁 (문학평론가)





* 이 글은 웹진 『문화 다』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munhwada.com/home/m_view.php?short_para=letters_ko%7C10


권명아의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은 현 한국 사회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비판을 보여주고 있는 역작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파시즘적인 징후가 어디에서 연원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분석하면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문화 현상들을 비판한다. 이 책의 독특성은 한국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하고 문화적으로 현상하기 시작한 슬픔이나 외로움과 같은 정념이나 사랑의 담론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은 문화 산물을 ‘사회과학’이나 철학을 적용함으로써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산물에 드러나고 있는 정념이 어떠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징후는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는 단순히 사회의 병리학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정치화하는 ‘정동-이행’ 이론을 수행하는 일환이다. 저자는 “슬픔이나 외로움, 불안, 환멸, 사랑 등 정념을 ‘나’와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의 부대낌을 경험하는 영혼의 동요”라고 규정하고는 그 정념을 다루는 것은 “모든 정치적인 것이 종말한 시대의 파국의 정서나 징후를 살피는 것과는 방법을 달리한다”고 말하고 있다. 병리학과는 방법을 달리하는 정동 이론은 저자에 의해 파토-로지(patho-logy, 정념-론)라고 명명되는데, 그에 따르면 “‘파토스pathos에서 파토-로지로’란 ‘병리학에서 정념-학으로’라는 문제틀의 이동”이다. 이 책은 “아직 한 번도 정치적 차원에서의 이론/말을 얻어 본 적이 없었”던 ‘정념’을 “정치적 주체화의 차원에서 살펴보려는” ‘정념-학’의 성과물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책은 일정한 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저술되었다고 하겠는데, 그 목표란 신자유주의 아래 환멸의 정념에 의해 폐기되고 있는 정치적인 것을 복원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정치에 대한 환멸이란 정념은 사상과 문화의 가치를 폐기하고 ‘생존’이라는 신화를 유포하는 파시즘을 증식하게 되는데, 이성적인 설득으로는 파시즘과 친화적인 정념을 저지할 수 없다. 그 저지는 정념의 이행(정동)을 통해 가능하며, 정념의 이행은 ‘부대낌’ 속에서 가능하다. 정념을 이행하게 할 수 있는 부대낌을 생산하기 위해선 ‘정동-코뮨(aff-com)’을 구축하는 정치적인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일 것인데,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는 현 한국 사회에서의 집단적 정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적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저자는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실, 이 책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문화 산물을 분석해서 그로부터 파시즘적인 병리를 찾아내고 진단하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정념의 이행을 위한 실험적인 이론은 이 책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으며 다만 요청되고 있는 것 같다. 4장 말미의 “새로운 관계를 발명해야 한다.”나 6장 말미의 “사회적 약자의 삶의 새로운 조건들을 사유할 수 있는 사상과 그 실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와 같은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주는 매력은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 대한 저자의 날카롭고도 깊은 비판에 있으며, 그러한 비판과 진단 작업만으로도 이 책은 큰 가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비판은 자연화 되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역사화 하고 그 정치적인 의미를 폭로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현 한국 사회에 자연화 되고 있는 정념들에 감추어진 파시즘적인 의미와 그 정치적 효과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비판 대상이 되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 대해 파시즘적인 혐의를 덮어씌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진보주의자’의 지지와 찬사를 받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농본주의적 인민주의’에 기초한 그 소설이 유포하고자 한 ‘애도’의 정념은 한국 사회에 번지고 있는 파시즘을 저지한다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후원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타자에 대한 윤리보다는 피붙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유포하며 ‘맨 몸의 노동’과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신화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대한 논의에서 저자는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비평가의 논리들을 비판하고 있는데, 특히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한 ‘엄마’에서 전통과 ‘운명 공동체’의 기초-‘모성의 성스러움’-를 찾는 ‘진보주의자’의 비평에 대해 위험천만하고 폭력적이라고 비판한다. 그 공동체는 피붙이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자 ‘위대한 모성’에 의해 비판-문자-이 무기력해지는 공동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와 파시즘적인 공동체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는 대상이 『엄마를 부탁해』일 것이고, 그 비판을 읽어보면 후련한 감이 있다. 필자 역시 『엄마를 부탁해』 열풍은 한국 사회의 퇴행을 드러낸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소설에 대해 일차원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사차원적인 비판과 분석을 보여주고 있어서 비평가로서의 철저함을 보여준다. 저자는 『엄마를 부탁해』처럼 ‘감동’의 바람을 일으켰던 <워낭소리>를 같은 차원에 놓인 작품으로 보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초점은 ‘생존의 신성함’에 놓여 있다. <워낭소리>에서 늙은 암소의 노동을 대신 해주는 늙은 아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장면은 암소-자연-노동의 일체화를 의미한다.『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오직 “먹고 사는 일이 제일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노동했던 엄마의 모습은 모성-노동-자연(생존)이 일체화된 상징이 된다.


그러한 엄마가 사라졌다는 것은 바로 우리 시대가 가장 소중한 본질(‘모성-노동-자연’)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상실에 대한 죄는 바로 자식들에게 있다는 것, 『엄마를 부탁해』는 그러한 죄의식을 유포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 자식들이란 이성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외쳤던 진보주의자들의 세대인 바로 386 세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신경숙도 포함되는 386 세대의 자기반성-‘진보주의’적인 비평가의 자기반성도 되는-이 바로 이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그 자기 반성이 모성과 자연의 신화로의 회귀로 흐름으로써 진보의 종말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또한 저자는 그 문제가 <박쥐>에서 가족으로부터 탈주했음에도 결국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징벌하고 자기를 폐기하고 마는 주인공들의 모습과 연결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자기 폐기는 기성의 제도로부터 탈주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정치화하는 실천의 이론을 갖지 못한 자식들의 불안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IMF와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생존의 불안을 겪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상황과 그 불안이 직결된다고 본다. 생존의 불안으로 인해 사람들은 생존만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나간 ‘엄마’의 생명력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안은 환멸의 정념을 숙주로 하여 적대감을 증식시키면서 “죽어도 좋을” 타자를 생산하는 파시즘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보여준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망을 낳는다. 그 욕망과 적대자인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가 파시즘과 공명하게 되는 것은 그 소설이 이러한 정념의 움직임(정동)에 연동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생존의 불안이,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장면화 되고 있듯이, 한국전쟁에서 겪어야 했던 생존의 불안과 연결된다고 역사화 한다. 맨몸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불안은 한국을 지배해왔던 파시즘 체제를 가능케 했던 집단적 정념인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나 <해운대>열풍이 보여준 애도에의 집단적 ‘열광’은,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를 만들 수 있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정국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다른 감응 형식에 의해 변질되는가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애도가 여는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응답이라는 윤리를 통해 가능한데, 『엄마를 부탁해』는 피붙이의 형식으로서 죽음에 대한 감응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생존의 불안 앞에서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동하는 방향으로 애도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 한국 사회가 여전히 열전과 냉전의 도가니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전쟁 상황의 객관적인 폭력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그래서 저자는 “엄마의 실종에 목이 메어 슬픔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석하는 일이 ‘인간 본연’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차원에서 폭력적”이라고 일갈한다. 왜냐하면 생존이 인간 본연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열전과 냉전 체제의 폭력 시스템”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슬픔의 피붙이적인 공동체를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공동체는 타자를 배제하는 공동체다. 흥미로운 것은 진은영과 심보선이 주창한 ‘불편한 공동체’ 역시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저자의 진단이다. 진은영은 ‘6. 9 작가 선언’ 과정에서 ‘불편한 공동체’의 형성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인맥과 학연과 명성의 실제성들을 무화시키는 한국 사회의 비참과 폐허 앞에서 우리 모두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서 동등하게 서로를 마주”보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공동체에 문학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이 공동체는 “‘문학’이라는 실제의 형제애적인 공동체의 이름을 심문에 회부하지 않”고 있으며, “문학의 아우라를 다시 지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편한 공동체의 우정은 “문학이 처한 생존의 위태로움이라는 위기의식과 밀착되어 있”는데, 이들의 글에서 “벌거벗은 삶의 지시 대상은 ‘실제성’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작가’로 변화”되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리하여 이 ‘불편한 공동체’는 ““벌거벗은 삶”으로서의 작가, 혹은 문학이라는 공동체의 생존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이는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진은영은 “단 한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문학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장소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진은영은 타자와의 만남의 어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영역을 문학이라고 명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딴지’를 걸자면, 필자로서는 슬픔을 통한 공동체, 애도의 윤리를 통한 공동체의 구축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는지, 또한 정치적 주체화의 자리를 거기에 두어야 하는지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쁨을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우울할까?


분명, 현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혼이 착취당하고 있으며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우울증을 극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애도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임이 지속적이면서 개방적인 공동체로 구축되기 위해서는 애도의 윤리를 넘어 만남을 통한 존재론적인 기쁨이 공동체 내에 흘러야 하지 않겠는가. 응답 책임에서 더 나아가서 타자와의 만남에서 경험하는 우정의 기쁨이 없다면, 우울의 극복은 어렵게 되고 공동체는 지속될 수 없지 않을까?


다시 권명아의 책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저자에게서 형제들의 공동체 외부에 있는 자는 누구일까? ‘싱글 라이프’라는 정치적 선언의 주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연민과 구호의 대상이 된(타자가 된) 혼자 사는 여자들이 그들 중 일부이다. 저자는 1980년대 말 싱글 라이프를 선언했던 작가로 신경숙, 공지영, 배수아를 들고 있다. 신경숙과 공지영은 국민작가가 되었다. 이들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익숙한 전통인 사실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인민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배수아는 재현 불가능한 어떤 영역이 되어버린 싱글 라이프의 삶을 표현한다. 번역 투의 문장이라 불리는 그녀의 문체는 번역 불가능한 어떤 존재의 ‘언어’에 상응한다. 저자는 그 문체가 가족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고 우연한 만남만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의 형식에 다름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재현 불가능한 주체 위치와 관련을 지니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싱글 라이프를 사는 주체 위치를 탐구하듯이, 지금 여성 자신의 삶의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나눔으로써 제도화된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페미니즘의 실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싱글 라이프를 사는 여자들 이외에, 형제들의 공동체 외부의 또 다른 타자로서 ‘코시안’ 또는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타자들 또는 인종적 타자들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저자는 한국에서 이러한 타자들이 근래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1995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윤후명의 「하얀 배」와 2005년에 출간된 김재영의 『코끼리』에 실린 단편 「코끼리」를 비교하면서 추적한다.


화자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소녀 류다를 만나는 과정을 그린 소설 「하얀 배」는, “국경을 넘어 낯선 타자와 조우하던 그 순간의 무구한 낙관의 세계, 그리고 그에 담긴 낭만적 동경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낭만적 열정과 동경은 한류 열기 속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반향에 대한 낙관적 동경이 만들어내는 심상지리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반면 10년 후에 출간된 「코끼리」에서는, 조선족과 네팔인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 한국에서 시민권 없이 생존만이 허락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는 게토 안의 외(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10년 사이로 출간된 이 두 소설이 보이는 변화 및 연속성에 대해, 저자는 “가장 큰 변화는 월경에 대한 판타지와 타자에 대한 낭만적 동경,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의 신화가 모두 키치로 전락했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낯선 타자를 외롭고, ‘정처 없는’ 존재로 그려내는 방식은 신화가 키치가 된 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낯선 타자를 자연화하고 신화화하는”“재현의 관습”에 대해 논구한다. 1941년 주요한의 「손에 손을」이란 시에서 나타나는 동남 아시아인을 “원시적 열정으로 가득한 카니발적인 천진난만함의 세계로 그려내는”“관습화된 재현 체계”가 2004년에 발표된 강영숙의 「갈색 눈물방울」이라는 단편소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동남 아시아인들에 대한 관습화된 재현을 벗어나서 재현을 하게 될 때 독자나 관객은 불편하게 될 것인데, 영화 <의형제>에서 동남 아시아 이주민들의 고독한 내면을 클로즈 업 한 장면을 본 시사회 참석자들의 불편한 반응은 이를 말해준다. 이러한 반응은 “고독한 개인은 근대인 모두에게 할당된 역할이 아니라, 이른바 문명화된 지역의 특정 주체의 몫으로 할당되어 왔”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인종적으로나 성적으로 차이가 있는 집단들을 재현하는 프레임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관습적 문법들이야말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어떻게 역사성이 스며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문제는 ‘경계를 넘어서 어떻게 타자와 만날 것인가.’라기보다, ‘내 안에 있는 익숙함과 어떻게 결별할 것인가.’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비록 관성화 된 가족 중심주의의 프레임 안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김수현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가족 그 자체보다는 삶의 불안함과 외로움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려로서의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고 이 드라마를 중요시한다. ‘반려’의 ‘문제틀’은 저 타자들, “무사회적 고립자로서” “친구도, 가족도 사회관계도 상실한 채 단절된 삶 속에 유폐되어 있”는, 게토 속에 살고 있는 “외로운 존재들”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타자의 타자성을 삭제하는 다문화적 인정은 어떤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동일화의 메커니즘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또한 “외로움을 나누는 우정의 연대라는 문법 속에서는 차이의 발견이 동일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로 환원될 위험성이 항존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우정의 연대는 외로움의 발견을 통해 서로간의 차이를 넘어 불안과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층위에 타자를 세움으로써 보편성으로서의 연대의 문법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세우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외로움은 한없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 외로움이 주권성과 반려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계 구성 원리를 발명”하는 전제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외로움이라는 정서 상태affect에는 주체 위치와 통치성, 그리고 정치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그 “역사성을 사유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윤리, 혹은 삶의 정치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외로움을 나누기 위한 새로운 관계의 발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정동의 역사적 정치적 분석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화의 차원”에서 ‘정동-코뮨’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실천의 문제와 연결되는지 이 4장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4장의 내용을 다소 자세하게 살펴본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이 책에서 행한 저자의 날카롭고도 정교한 비평은 현재의 우울한 상황을 돌파하는 정치적 주체화의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 야심찬 작업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야심찬 작업에는 으레 몇 가지 질문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떠오른 질문들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첫째, 신경숙 소설 비판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한편으로 그럼 ‘엄마’는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엄마’라는 주체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엄마’는 노동해야만 하는 가난한 여성이다. 이 가난한 여성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를 따라 이 여성이 『엄마를 부탁해』에서처럼 신화화되고 상징화되어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것을 비판해야겠지만,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사는, 가난하고 나이 든 여성은 한국 사회에서 ‘형제들의 공동체’ 외부의 타자 아닐까? 저자의 대답이 듣고 싶다.


둘째, 저항 주체의 문제다.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타자에 대한 윤리-‘응답 책임’-로서만 정치적 주체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을 구축할 주체가 다소 수동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응답 책임을 통한 주체화는 상황이 먼저 있고 이에 주체가 반응하는 식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을 걸고자 하는 접속에의 욕망이, 그리고 그 역능이 상황 너머에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의 구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응답책임의 윤리는 도리어 내국인의 입장에서 내국인이 갖추어야 할 윤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즉 응답책임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타자 역시 응답책임을 가지는 것 아닐까? 이는 저자가 원용하고 있는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에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버틀러는 아랍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문제를 던지고 있지만, 그 질문은 결국 미국인의 입장을 바탕으로 해서 던져지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수평적인 접속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애도의 정동에 기초하는 응답 책임의 윤리라는 문제틀과는 다른 지평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는 저항의 실천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될 것이다.


셋째, 역사의 반복과 차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저자의 분석은 식민지 시기 파시즘, 전쟁, 그리고 군부 독재 시기의 파시즘과 현재를 연결시킨다. 이는 현재에 관습화 되고 자연화 된 것들을 역사화 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저자의 기획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현 존재 조건과 과거 사이의 차이가 사상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현재의 징후들이 과거의 파시즘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는 느낌인 것이다. 현 파시즘은 과거와 어떤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분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문학 자체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 타자의 언어를 번역한 듯이 보이는 배수아의 소설과 같은 문체를 주목한다는 것은 이해하나, 낯익은 문체로 써진 소설은 모두 인민주의적인 것이 되는지? 그렇다면 자칫 형식주의적인 분석으로 빠지는 것은 아닐지? 한편, ‘불편한 공동체’에 대한 비판에서 저자는 ‘문학’ 자체를 심문에 부치지 않고 문학의 아우라를 유지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학은 글쓰기로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문학은 기존의 개념과는 단절된 새로운 내용으로 충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문학에 대해 아직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인지, 나로서는 이 마지막 질문군이 심각하게 떠오른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저자에게 직접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들은 독자인 나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좋은 책의 요건 중 하나는, 그 책이 좋은 질문을 품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독자가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자극하는 데에도 있다. 이런 질문을 품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면에서도, 나로선 이 책을 읽는 일은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다른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품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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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신자유주의의 덫, 생명공학의 상업화 / 조아라
자율평론 | 2018.02.28 | 추천 4 | 조회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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