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외로움, 경계 그리고 파시즘의 징후들ㅣ김원(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1:02
조회
1540
외로움, 경계 그리고 파시즘의 징후들

김원(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 이 글은 지난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오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출간기념 서평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권명아 선생(이하 권명아)의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나의 눈에 밟히는 화두는 가족, 경계 그리고 파시즘(의 징후)다. 이번 책에서도 지난 테마들이 전제되어 깔리고 있으나 새로운 대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관계, 윤리의 구축을 위한 조건들에 대해 탐색하는 듯 보인다. 이번 토론에서 나는 현실인식, 관계 그리고 대안이란 순서로 간단한 논평을 해보고자 한다.

우선 문제를 현실 인식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해보도록 하자. 이 책에서는 1980년대 이후 20여년의 변화를 ‘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이미 가족서사에서부터 파시즘 해석을 결부시켰듯이, 이번 책에서도 2012년 현실은 ‘파시즘’으로 해석된다. 위기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한 안티’로서 파시즘(의 징후)은 무럭무럭 자라났다는 것이다. 1997년 여야 정권교체 이후 진보개혁의 대안 부재와 기존에 호출되지 못하던 주체인 약자의 위기감 그리고 민주주의/페미니즘 등 담론에 대한 환멸/피로감이 생존논리를 이념화시킨 ‘실용의 세계’ 혹은 경쟁의 대상인 적을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쟁체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서 권명아가 제안하는 파시즘에 의해 호명되는 10년간 호명되지 못한 주체가 ‘자영’(自營)이란 지점이다. 계층/직업적 구분이 아닌, 민주정부 하에서 호출되지 않은 주체이자 ‘자갈치아지매’로 상징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생존의 신화’로서 ‘자영’은 위치 지워진다. 전후 ‘전쟁미망인’ 담론에서 드러나듯이, 여성들은 생존, 희생, 가족과 연관해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한다. 전후 가족/자녀 생존을 위한 희생의 상징이었던 전쟁미망인의 후예인, 경제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생존’을 위해 묵묵하게 달려온 ‘자영’이야말로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혹은 패륜아 386세대와 구분되는 ‘주체’였던 것이다.

권명아의 진단을 보면서, 나도 파시즘의 긴 역사적 궤적과 역사적 경험과 연관성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위기, 대안 부재, [기존에 호출되지 않은] 약자의 호명 등 요인을 중심으로 파시즘(이나 그 징후)을 식민지 이래 (동질적이진 않지만) ‘연속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악하는 것은 ‘문제적’이지 않나 싶다. 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지점은 파시즘이 모든 것에 대한 반대, 기존 이념/운동에 대한 피로감 등에 기초한 것이라면 기존의 노동의 인간학에 기초한 기존 대안적 패러다임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질문하고 싶다.

두 번째로, 제일 많은 지면이 할애된 내용이 ‘관계’를 둘러싼 문제다. 몇 년간 권명아는 풍기문란, 부적절한 정념 등을 드러내는 사례들 - 내가 공명했던 소년원(생)을 포함하는 - 을 탐구해왔다. 권명아는 싱글라이프와 트렌스젠더 등 사례를 보여주며, 특이성, 번역불가성, 임계점 등을 이번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들 예는 시인 최승자에서 보여 지듯이 ‘공동체 질서와 불화’이자 ‘익숙한 공동체의 파괴자’로 익숙하게 재현됐다. 이들은 구호대상이자 문젯거리이자 공인된 정체성과 역할의 경계를 ‘문란’하게 만드는 자들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아마 이들이 ‘타자’일 것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 『해운대』에서 살아남은 자들(공동체에서 승인된 정상인들)은 ‘청소’란 은유를 통해 ‘익숙한 삶의 정상화’를 욕망한다. 반면그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공동체 규범에 익숙하지 못한 타자의 타자성은 다시 배제되곤 한다.

이런 익숙/친근함의 사례로 제기되는 것이 ‘육친적 근친성’- 피붙이로 이야기되는 - 가족/가족서사다. 권명아는 전작(前作)에서 가족서사에 대해 비판한 ‘연장선상’에서 위기의 서사/마지막 남은 ‘핏덩이의 보루’로 가족이란 단위(육친적 친밀성)가 재서사화된 맥락을 서술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등 텍스트에서 ‘회복해야할 공동체의 윤리’로 ‘향수, 신성한 가치, 생명의 세계, 낭만적 농본적 세계, 포용’ 등 가치를 언급한다. ‘내 새끼’란 육친성 안에 가족 외부의 이질적이고 익숙치않은 문젯거리들은 자리 잡기 어렵다(『가족의 탄생』이나 『안토니아스라인』에서 재현되는 관계는 꿈도 꾸기 어려울 것이다).

권명아는 ‘해방의 서사’의 종언과 민주주의/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피로감이 ‘잃어버린 육친성의 세계’이자 ‘가장 익숙한 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집단적 고해성사라는 “병리적 증상”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제위기 이후란 조건의 차이는 존재하나, 순수/향수/농본/신성함이란 낭만적 가치가 한국 사회의 대안으로 등장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가장 익숙하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잊혀지고 비판되어 극복되었다고 싶었다가도 다시 꼿꼿하게 부활하는 것이 (좌/우파를 막론한) ‘가족서사’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반복’되는가에 대한 의문/답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기/피로감/대안의 부재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익숙한’ 가족서사의 반복 등장의 배경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혹은 가족서사도 파시즘이라는 정치/사회적 기획의 일환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 든다. 한국 사회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가족으로 은유된 정치공동체’는 80년대 이래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야기의 각도를 재현-관계로 틀어보면, 권명아는 불화하는/파괴자로 재현되는/문란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번역이 불가능하며 정상적인 공동체 구성원들과 소통이 어려운 ‘무엇’이라고 본다. 또 이들의 언어와 문장은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는, 구호대상자로 전락하기를 거부하는 몸짓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월경하는 주체/다문화주의에 대한 권명아의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2000년대 들어서 제국 환타지가 점차 약화되고 현실 속에서 국경 내 차이, 우열, 성차 등은 ‘내부화된 차이’(혹은 ‘국경 넘어 게토’) 형식으로 나타났다. 권명아는 언어발화의 동기/온도차 문제를 생존과 타자에 대한 예의라는 ‘비대칭성’으로 설명한다. 더 나아가 인종적 타자에 대한 ‘관습적 재현’으로 신화/원시적/천진함/야만 등 심상을 식민지 남방 문제 - 물론 이는 60년대 베트남전에서도 ‘반공문명인’ 등 형태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 를 통해 역설한다. 그래서 중심적 문제는 “우리 안의 익숙함과 결별”이라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익숙함’ 혹은 ‘관습적’인 것과 결별이란 말은 쉽지만 간단치 않은 문제/결단이다. 특히 관습적/익숙한 글쓰기, 학문/문학제도-장(場), 토론과 비평 등 지식/문화권력에 결부된 조건에서 국문학자/비평가인 권명아가 사유하는 ‘익숙한 것과 결별’ 혹은 ‘경계에 선 지식’의 상은 아직 나에게 구체적으로 와닿진 않는다. 익숙하고 관습적인 개념/용어와 거리두기, 습관적이고 통용되는 역사서사와 거리두기, 제도학문의 장과 역시 관습적인 운동의 문법과 동시적 거리두기 혹은 비정상인과 타자의 세계를 탐색하기 등 나의 체험을 비춰 봐도 그렇다. 관습/익숙함은 제도/비제도화된 지식의 활용 형태이지 이를 통해 해당 공동체의 안정성/정상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거기서 빗겨날 경우, “뭐, 그런 걸 연구하세요?”, “00선생은 참 특이해” 등의 눈빛과 답변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한편 최근 흐름을 보면 언어발화의 온도차/비대칭성은 현실의 문제이고, 제국 판타지는 약화라고 단언하긴 이르다. 한류건 케이팝이건간에, 발전주의 성장이 경제위기로 전환되자,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작용한 것이 문화민족주의/문화상품 등이다. 나의 경험을 빌자면, 유난히 구사회주의권 대학원생이 많은 학교에서 이들에게 한국은 ‘제국’까진 아닐지라도 ‘모델-선진’이자 이들의 미래의 생존 수단이다. 좀 고약하게 말하자면 ‘한국학’(Korean Studies)이란 생계 수단일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경제성장, 새마을운동, 민주화, 올림픽-월드컵 등 제국 모델의 한 측면을 덜어내어 균형을 맞추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서구-근대-한국-미래’라는 사유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국내로 돌리더라도, 최근 한류의 지속성장을 위한 “한류문화진흥단”이 출범하고 “드라마부터 시작된 한류가 최근 케이팝(K-pop)열풍으로 발전한 것을 한국문화 전반적으로 확대하여 문학과 예술, 관광,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로 지속적으로 확대”, “K팝 중심의 한류 붐이 확산하고 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국내외 인지도와 발전은 지체된 상황이며 한류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전통문화의 창조적 발전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중심이 된 정부 지원책이 제안되고 있다. 이처럼 한류는 문화상품을 넘어 국가정체성, 국민정신 등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전통문화의 진흥은 국가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형성하는 핵심으로 국가의 지원은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이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강조하는 장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전통, 과학기술 등이 수입된 것이 아닌, 한국민족이 만들어낸 고유한 것이며 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과 자부심 등을 강화해야한다는 언급도 발견할 수 있다. 60년대 후반 민족중흥/민족주체성 서사의 재림이라고 하면 과도한 지적일까? [증명할 순 없지만] 주체성 위기의 징후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닌지 고민 중이다.

다만 나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은 관계의 문제는 육친적이지도 낭만적 농본주의도, 형제들만의 것도 아닌 타자성을 구현할 수 있는 공동체(혹은 불편한 우정)의 형체에 대한 문제다. 나도 ‘무엇이 거부되어야’하며 ‘익숙한 것에 대한 거부/의심’이란 윤리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정치화된 80년대 ‘(남성)형제들의 공동체’가 타자화 시켰던 혁명의 신화/전위의 신화가 붕괴(혹은 위기의 위기)된 지금, 새로운 ‘관계의 윤리’란 일상에서, 존재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언급만으로는 뭔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80년대는 논리적이며 수미일관된 정치적 삶/언어가, 어미/아비의 가치관과 언어를 부정하려는 ‘부정’도 공존한다. 물론 이런 것을 부정한 80년대 형제들의 공동체는 낭만적 형제애(혹은 민중공동체)를 전투와 혁명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이른바 열사-전사-어머니라는 담론의 계열이 대표적 사례가 아니던가?)했다. 80년대 세대/체험집단에게 가족서사는 부정된 것이라기보다, ‘유사가족서사’가 이념을 달리해 재생되어온 것이 아닐까?

질문을 달리하자면, 민주주의, 혁명, 페미니즘(혹은 타자성 윤리)에 대한 대중들의 ‘피로감’이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인 것의 구성은 어떤 관계/윤리에서 출발해야 할까? 물론 권명아는 김수현의 『인생의 아름다워』의 이중적 측면을 지적하며, 동일화의 폭력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어소시에이션, 자기통치성의 확립 그리고 삶의 불확실성과 외로움을 넘어서는 우정, 반려, 주권성을 인정하는 반려/통치방식의 변화가 동반되는 새로운 관계 구성의 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 출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현재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관계 재구성을 설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 대안에 관한 검토다. 일단 나는 권명아의 논지 자체에 대해 찬성한다. 권명아는 ‘정치적 외로움’이 새로운 결연의 가능성을 가져올 것이라고 언급하며, 앞서 말한 파시즘-실용의 세계와 맞설 것을 주창한다. 나는 권명아의 연속/동원/자발성 극대화로서 파시즘에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현 정권을 억압/몰상식으로 몰아가는 해석 틀은 잃어버린 10년이 극우파가 만들어낸 인식의 또 다른 일면이다. 진보개혁/야권연대[비판적 지지]/정권교체/진보정당처럼 관습적이고 익숙한 것이 한국 정치담론 안에 또 있겠는가?

여기서 권명아가 주목하는 것은, “파시즘의 징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의 삶의 새로운 조건들을 사유할 수 있는 사상과 그 실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이 가장 중요”(287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가 파시즘화에 빠지지 않게 경계하는 일은 “말의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지난한 투쟁”(286면)이라고 논한다.

나도 권명아의 주장에 동의한다. 합법적 공간에서 말의 지위를 빼앗긴, 문란하고 위험한 경계인들, 익숙하지 않고 이질적이고 낯선 언어를 지닌 존재들은 작가, 연구자, 텍스트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그들의 현실 그리고 재현 체계에서 이중으로 배제된다. 권명아가 약자들이 유언비어, 유언, 자살 등으로 자신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계급이나 민족으로 통합되지 못하는 주체들, 공동체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경계인들은 ‘사건’이란 형태로 재현되거나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잊혀 지거나 공동체의 이질적 존재로 텍스트화된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사회적 약자의 삶의 조건을 사유할 수 있는 패러다임에 대한 권명아의 ‘숙고’다. 나는 역사가 오래된 그러나 익숙한 민중(사)이 목적론적이며 통합적인 주체를 가상하는 관성을 지적하며, 타자/비정상인의 사건을 통한 재현을 언급한 적이 있다. 무등산타잔사건, 광주대단지, 소년원탈출사건 등이 이들에게 부여된 역시 익숙한 위치/의미/용어로부터 탈정체화하는 모멘트(moment)란 이야기였다. 그럼 사회적 약자의 삶의 조건을 사유할 것을 권하는 권명아의 새로운 페러다임은? 이들의 말의 권력은 어떻게 쟁취될까? 특히 이들과 공감하려고 하나 동일시는 불가능한 무한하게 외로운 글쓰기/지식생산자란 위치에서 그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새로이 등장하는 ‘르포’일까, 이들에게 글쓰기/자기역사를 이야기하게 해주는 일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상/정치철학인가. 고민의 단초를 들려주었으면 한다.

그래도 『무한한 정치적 외로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저 멀리서 나와 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글쓰기를 고민하는 외로운 사람이 있구나라는 자각이었다. 아마 그것은 ‘불편한 우정’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그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숙고하는 권명아의 다음 행보가 그래서 기대된다(물론 나도 어디선가 다른 방식으로 숙고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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