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금융독재, 삶의 수식화에 맞선 사회적 연대를 재구축하는 무기로서의 시ㅣ권범철(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1 13:45
조회
1150
금융독재, 삶의 수식화에 맞선 사회적 연대를 재구축하는 무기로서의 시

권범철(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 이 글은 인터넷신문 『미디어스』 2012년 12월 2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75


금융 위기, 경제 위기에 대한 기사는 이제 아침 신문의, 저녁 뉴스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 불안의 탈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위기에 대한 기사는 늘 ‘구제’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 구제가 경제지표의 개선에 지나지 않음은, 그리고 지표의 개선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자본의 개선 이상이 아님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사실 그 구제책이 목표로 하는 것이 바로 불안의 일상화이다. 끝나지 않을 무한한 전쟁, 경쟁 사회 속에서 금융 자본은 자라나기 때문이다. 불안의 상품화. 금융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불안을 먹고 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봉기』의 저자인 프랑코 베라르디는 익숙지 않은 진단과 대안을 제시한다. 결론부터 시작해보자. “금융독재는 언어를 자동화automation하고 식민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오직 언어 영역에서만 사회적 연대가 재건될 수 있고, 오직 언어 영역에서만 해방의 과정을 위한 새로운 조건들이 창출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언어 행위란 다름 아닌 시인데, 시만이 금융 자본주의를 넘어서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부제이기도 한 시와 금융은 어떤 관계인가? 이 낯선 조합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먼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적어도 모든 이들에게 금융이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열쇳말임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저자가 보는 이 금융 자본주의는 어떠한 사회인가? 1972년 브레튼 우즈 협정의 파기와 함께 달러화는 현실에서 어떤 참조점도 가지지 않는 화폐가 되었다. 오직 그 가치가 언어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되게 됨에 따라, 화폐는 자신의 지시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금융 자본주의는 이처럼 기호의 지시대상이 사라진 세계다. 여기서는 더 이상 가치 축적을 위해 구태여 물질적 상품 생산을 경유하지 않는다. 화폐의 순수한 유통, 삶과 지성의 가상화virtualization로부터 가치를 추출한다.

“경제 금융화는 본질적으로 언어 기계에 의한 생산과 소통 과정을 포섭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언어는 “디지털-금융 기계에 포획되었다.” 언어가 포획된다는 건 무슨 말인가? 책 말미에서 저자가 가져온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실행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고, 살아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영역에서만 우리는 존재의 현실과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그러므로 언어가 포섭된다는 것은 삶 자체가 포섭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금융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역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삶, 지성, 즐거움 등이 희생된다. “삶은 형이상학적 부채를 상환하는 시간으로 변모했다.” 이것이 금융 자본주의,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의 언어의 자동화, 식민화다.

저자는 우리가 현재의 권력 형식에 맞설 수 있는 행동의 양식을 발견하려면, 금융투기를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기술-언어적 자동기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난 세기 동안 시와 금융은 비슷한 운명을 공유해왔는데, 그것은 기호와 지시대상의 분리다. 상징주의 시대 이후 시는 기호와 지시대상의 관계를 끊으려고 시도해왔고, 금융 역시 화폐와 실물 경제가 분리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일치하지 않는다. 언어는 경제적 교환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시는 교환불가능성의 언어이고, 무한한 해석의 귀환, 언어의 감각적 신체의 귀환이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적 삶을 금융 알고리즘의 회로를 따라 흐르게 하는 장치라면, 다시 말해 삶을 수식數式화한다면, 그것은 디지털화된 기술-언어적 자동기제를 통해서이다. 사회적 소통의 가상화가 인간 신체들 간의 감정이입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이때 봉기는 그러한 회로를 넘어 사회적, 정서적 신체를 재구성하는 기능을 한다. “거리 행동의 주요한 이해관계는 일반지성의 신체의 재활성화다.”

이때 시는 봉기의 언어로 작용한다. 시는 “언어에서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교환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공유된 의미를 이해하는 새로운 공통의 토대에 길을 내준다. 즉, 새로운 세계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는 “목소리의 특이한 진동”이며, “이 진동은 공명을 창출할 수 있고, 공명은 공통의 공간을 생산할 수 있다.” 그곳은 특이성이 경제적 문법으로 환원되지 않고, 수식화되지 않는 장소이다. 때문에 금융 자본주의라는 기술적 자동기제를 회피하는 것은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언어 행위만이 새로운 삶의 형식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며, 그때 새로운 삶의 형식은 일반 지성의 사회적∙충동적 신체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언어를 축적의 원천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의 길을 여는 요소로 전환하는 것, 이 패러다임의 이동이 핵심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답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성장과 경쟁의 도그마를 숭배하는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경제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변의 법칙으로 구성된 경제 사회란 없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현실에는 어떠한 의미도, 역사적 필연도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현실은 착취와 복종의 결과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형이상학적 부채에 대한 복종이 아닌 거부를 우리의 출발선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때 현실은 새롭게 구성될 것이고, 시는 우리의 무기가 될 것이다. 금융독재, 삶의 수식화에 맞선 언어의 탈자동화, 탈식민화로서의 시. 사회적 연대를 재구축하는 무기로서의 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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