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존재권력』(브라이언 마수미) 서평ㅣ사발지몽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12-14 11:53
조회
788
 

『존재권력』(브라이언 마수미) 서평


사발지몽(주요섭) /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1. 마수미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마수미가 어렵다. 여전히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정동’ 개념을 비롯해, ‘날 활동’과 ‘빛’, ‘미-결정성’ 등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 늘 배운다. 존재권력과 선제 개념, 생명권력과 존재권력의 구별,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구별을 통해 또 배운다. 마수미의 독자로서, 반갑고 감사하다.

권력을 관(貫)역사적 프로세스와 작동 논리로 이해하는 데도 동의한다.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의 추상기계와 비슷한 것 같은데 조금 다르게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의 작동’에 대해서도 알 듯 모를 듯 느낌은 온다. 동아시아의 기(氣)의 운동이나, 후설의 선험적 생활세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윌리암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주의’에 대한 강조에도 동의한다. 나에게 급진적 경험주의는 비유기체적 몸의 움직임에 대한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대항 권력, 삶-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새로운 조건문 만들기나 이중의 가정법을 실험해보고 싶다.

2. 현실로 경험하는 ‘선제’ 권력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비-존재성이 지금으로선 완전히 끝나고 완료된 것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는가?(292)

마수미의 경험적 연구질문으로 보인다. 나에게 선제공격은 절절한 현실이다. 부시의 침략을 통해, 중동에서의 전쟁 중계방송을 통해, 그리고 한반도 상공을 가로지르는 전략폭격기의 동선에 대한 보도를 통해 제국은 공포로 경험되고, 공포가 사회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체감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선제성 개념이 현실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마수미는 묻는다. 누가 ‘경험’을 지배하는가? 제국은 지각공격을 통해 ‘경험의 사회적 형식’을 지배하고 또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정권과 김정은에 대해서, 그리고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학습했던 그리고 지금도 널리 통용되는 제국의 ‘군산복합체’ 논리는 매우 소박한 분석이었던 것 같다.

3. ‘인식권력’과 ‘생명권력’을 넘어서

나에게는 무엇보다, ‘존재권력’이라는 책 제목이 ‘인식권력과 생명권력을 넘어서’로 읽힌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시스템 논리’가 아니라 ‘프로세스 논리’의 재발견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인식권력’의 인식은 일반적인 지각의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적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권력과 맞서야 했다. 소박하게 말하면, 많이 알고 정확히 아는 권력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했다.

생명권력을 넘어선다는 것은 (푸코의 ‘환경적 권력’을 참조하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기체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의 그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인식권력과 생명권력을 넘어서 존재권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작동논리가 ‘선제성’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선제의 양상은 ‘지각공격’으로 드러난다.

3. 정동적 공격

제국의 권력은 이제 (지각이 아니라) ‘지각의 조건’을 선제적으로 바꾼다. 존재권력은 동어반복 같지만 ‘존재가 있게 하는 권력’이다. 생명을 구속하고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특정한 형태’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특히, “행동 사이의 가장 작은 간격보다 더 작은 간격으로 발생하는 ‘기저-지각적 시간’, ‘날 활동’을 장악함으로써 습관을 바꾸고 행동을 이미 바꾼다”(132). 정동적 공격이다. 그리고, 시간을 장악한 힘은 ‘공포’를 재생산하도록 강제한다.(‘이미’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비-시간적인’ ‘시간공격’이다.)

또 한 이점이 확인되어야져 한다. 그것은 심리문제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신호 관리’의 문제이다. 마수미의 친절한 설명대로, “관리 되는 것은, 충격이 긴장된 유보 상태에서 공포로 변하고 그 결과 충격 관리자가 원하는 대로 회고적으로 반성하는 행동이 뒤따르는 리듬이다.” 리듬, 정동은 음악의 박자표처럼 관리된다. 존재권력은 기호를 통해, 물리적 폭력을 통해. 초경험적 차원에서 신체들 사이의 공간을 점령한다.

3. 존재권력과 환경권력

마수미는 푸코의 주권권력(죽이거나 그대로 살게 놔두는 권력), 규율권력(자기-봉쇄 속에서 작동하는 집단적 장치에 의한 개인의 규범적 생산), 생명권력(단지 생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번성시키는 것)을 구분하고, ‘환경적 권력’을 참조하며, 생명권력 개념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물론 결론은 존재권력이다.)

그러나 이때 생명은 개인적이건, 집합적이건(인구), 유기체적 생명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생명체는 환경 안에서만 생명체일 수 있다.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을 빌려 말하면, 체계는 항상 환경과 동시발생이고 동시작동이다. 체계는 항상 ‘체계/환경’이다. 그러므로 생명체 역시 ‘생명체/생명환경’이다.

푸코도 마수미도 이제 유기체 생명만이 아니라, 유기체 생명의 환경에 주목한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와 마수미는 자본주의와 제국의 존재권력적 속성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는 마수미를 통해 훨씬 더 늦게 깨닫게 된 것이고.

선제권력은 생명체의 존재 조건에 선수를 친다. 선제권력은 “신체에서 무엇이 시작되기 전에 막으라”고 명령한다.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을 바꾸도록 장치를 만든다. 그러므로 앞에서 본 것처럼, 선제권력은 지각의 조건을 바꾸는 정동권력이다. 또한 “선제권력은 환경권력이다. 창발하는 삶의 환경적 조건을 바꾼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존재권력은 (‘현재’권력과 구별해) ‘잠재권력’으로 불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존재권력(onto-power)은 생명권력(bio-power)과 구별되며 다른 동반권력과 함께 생명권력을 어떤 프로세스로서 아우른다. “삶의 시초가 다르게-창발되는 효과를 발휘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하는 환경적 권력이 존재권력이다.”

※이는 문화와 자연을 보는 관점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문화/자연의 이분법이 아니라, 문화-자연 연속체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 마수미에게 자연은 스피노자를 빌려, ‘산출하며 산출되는 자연’이 된다. “문화는 자연의 창발적 표현이다.” 이는 루만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루만의 ‘체계/환경’ 도식은 사회적 체계와 그 환경인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구별한다.

4. 존재권력의 작동논리와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구별

그리고, 생명과 환경을 포함한 전역적(全域的) 과정을 프로세스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스템과 구별된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고유한 ‘작동논리’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프로세스이며 작동논리다. 시스템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자본주의도 하나의 존재권력이다. 시스템은 현재성의 자기생산으로서 잠정적이다. 시스템은 프로세스의 한 표현이다. 반면에, 프로세스는 ‘잠재성의 생애주기’로서 차이 참조적이다. 시스템이 권력적이라면, 프로세스는 ‘존재권력적’이다. 그러나 잠재성은 현재성과 함께할 때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체계/프로세스는 분리할 수 없다.(체계이론의 언어로 말하면, 체계/환경 차이의 전체 운동을 이르는 듯하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프로세스와 신보수주의 권력 프로세스는 공생관계이다. 이들은 그동안 시스템을 지배하는 것으로도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선제권력을 통해 프로세스 전반을 지배하려 한다.(물론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마수미의 역사관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공감 동의하는 부분이다.)

5. 결국은 시간관의 문제

결국은 시간관의 문제, 우주론의 문제일 수도 있다. 마수미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미래가 현재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가? 부시의 부적 같은 조건문,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가? 마수미는 명쾌하게 답변한다. “미래성과 과거성 사이의 피드백 루프”만들기(368). 이는 물론 ‘선제’의 작동 논리이기도다. (동양의 오랜 수행 전통의 깨달음을 제국은 꿰뚫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런 맥락에서 “역사와 선형적 시간은 ‘우화덩어리’이거나 ‘문학적 노력’”라는 말도 타당성을 얻게 된다(322). 이제 우화는 ‘자기-원인’이 된다. 불교의 업장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 지금 여기의 몸짓과 내러티브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결과적으로 미래를 동시에 바꾼다. 여기에 ‘대항-권력’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6. 대항권력: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수미의 말대로 “숨을 곳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다. 싸울 수밖에 없다. “흐름의 방향을 그때그때 다른 종점으로 향하도록 굴절하면서 흐름과 함께 앞으로 전진하는 선택만 남아있다.” 궁극적인 개념은 법과 언어가 아니라, 활동프로세스이다. 활동적 프로세스는 보편적 활기-불어넣어짐(animatedness)이다.(강조는 저자, 92)

종점은 있다. 생명 주기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역시 미결정성의 상태이다. 또 다른 종점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건문이 필요하다. 또 다른 가정법이 요구된다. “위협을 느끼면 위협은 있다.” 그렇다면, “희망을 느끼면 희망은 있다.” ‘과정기획’이 필요하다. 핵심은 “초역사적인 정동의 잠재성을 누가 선점하느냐”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신보수주의와의 공생을 통해 존재권력적으로 바뀐 자본주의의 프로세스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이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기참조적이고 반성적인 시스템이 아니다(104). 앞서 언급했듯 두 프로세스의 결합도 우발적이거니와, 프로세스의 구성 개방성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체계/환경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방성의 비의도성’은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강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확실성과 비-결정성으로서 약점이 되기도 한다. 팬데믹과 기후재난의 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범접할 수 없는 대-성채처럼 보이는 자본주의 제국이나 쇠락해보이는 지역공동체나 마찬가지다.(물론 그 전제가 있다. 역사적인 사례와 경험도 적지 않다.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체계의 붕괴다. 권력의 공백상태다. 체계/환경 프레임으로 말하면, 환경 복잡성에 대한 체계의 처리능력 상실이다.)

7. 다시, 한 가지 의문: 어떻게 존재를 알 수 있을까?

7장에 제법 길게 설명하는 ‘개념의 작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들뢰즈의 ‘추상기계’를 떠올리지만, 이에 대한 설명도 없다. 사변적 실재론을 떠올리게 되는데, 잘 모르겠다. 오히려 다시, 앎의 근본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동아시아적 문법으로는, 깨달음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다. 사실은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론도 그렇고.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도 그렇고...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루만에게 작동의 연쇄로서의 체계는 경험적 사실이다. 그러나 체계의 환경 쪽에 위치한 것들, 예컨대 사회적 체계의 환경인 인간과 생태계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다. 소통체계의 외부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재성을 인정하지만, 그래서 체계는 항상 ‘체계/환경’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환경복잡성을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루만의 체계이론은 ‘체계/환경’ 도식을 기본으로 하지만, 환경이론이 아니라 체계이론이다.

그런데 마수미는 체계의 생성의 근거를 묻는다. 환경만이 아니라, 전 프로세스, 그리고 근원을 탐구한다. 마수미의 마지막 물음, “그 빛은 선제성 저편에서 빛나는가?”(320)도 심오하다.

8. 하나의 아이디어: 만국의 ‘비-자본주의’여 연대하자

마수미의 팜플렛, ‘가치의 재-가치화에 관한 99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를 읽으며 매우 공감했다. 『존재권력』에서 언급하고 있는 ‘회피’ 개념에도 공감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회피들’을 수행하고 있다. 비업, 비혼, 방콕, 폐인, 낙향, 귀촌, 백신거부 등

‘또 다른 시간을 탄생시키기’에도 적극 동의한다. 니체를 빌어 이야기한 결론에도 공감한다. 어느 새벽 하늘의 시간, 냥이와 함께 하는 시간, 순환하는 시간, 끝없는 시간, 시간 없는 시간,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시간, 천제 지내는 시간, 다시 개벽의 시간 등등. 정확히 말하면 ‘시-공’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선제’적인 제안 하나. “만국의 비-자본주의여 연대하자” 100년 전 숨을 곳 없어 싸울 수밖에 없었던 동학의 2대 교조는 해월 최시형은 30년간 도바리를 치면서도, ‘궁을(弓乙)이 문명을 돌이킨다(弓乙回文明)’고 선언했다. 또 다른 동학을 이야기한 강증산은 일제강점기를 앞둔 시절에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을 꿈꾸었다. 존재권력과 정동이론을 공부케 해준 브라이언 마수미 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한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전-지구에서 우선 1만개의 비-자본주의 몸짓과 내러티브를 연결할 것을 제안한다. 만 개의 전-지구적인 비-자본주의 네트워크.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또 다른 프로세스와 시스템이 만들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1년 12월 12일 <대자보>( https://bit.ly/3s0FW59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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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정치』(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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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사건 :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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