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니체와 철학 262-274 202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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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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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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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니체와 철학 262-274 20220206 이승수
2. 연민의 분석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근본적인 결탁은 다음에 있다: 바로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든다. 무의 의지 아래서 보편적 삶이 비현실적이 될 때 개별적 삶은 반응적이 된다. [262]
“반응적 허무주의”는 어떤 식으로 “부정적 허무주의”를 연장한다. 승리하는 반응적 힘들은 그들을 승리로 이끄는 그 부정하는 힘을 대신한다. 그러나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적 완성이다. 즉 밖에서 인도되기보다 오히려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하는 것이다. [262-263]
그 역사는 또 다른 식으로 언급된다. 신은 죽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그는 연민으로 죽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모든 것을 살펴보았고, 인간까지 살펴보았던 신, 그 신은 죽어야만 했다. 인간은 그런 증인이 살아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263]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0)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들을 위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누가 연민을 느끼는가?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그 삶과 그것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니체의 상징주의에서 연민은 항상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복합체, 전자와 후자들의 유사성, 후자들을 위한 전자의 관용을 가리킨다. [263-264]
신은 연민으로 질식되었다. 마치 반응적 삶이 그의 목 안으로 들어가기라고 한 것처럼, 모든 일이 벌어진다. 반응적 인간은 신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가 더 이상 그의 연민을 감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264]
원한은 무신론적이 되지만, 그 무신론은 여전히 원한이고, 항상 원한이며, 항상 가책이다. 신의 살해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고통스런 소리를 내며 감춘 수치심으로 가득한” 반응적 인간이다. [264]
그렇게 언급된 이야기는 우리를 똑 같은 결론으로 데려간다. 즉 부정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에 의해 대체되고, 반응적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에 이른다. 신에서부터 신의 살해까지, 신의 살해자에서 최후의 인간까지. [266]
부정적이고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허무주의. 니체에게서, 유대교, 기독교, 개혁, 자유사상,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등이 점철된 유일하고 동일한 역사이다. 최후의 인간에까지 이르는. [267]

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정식은 사변적 명제가 아니라, 비극적 명제, 전형적인 비극적 명제이다. 사람들은 신속에 죽음을 놓지 않고서는 신을 가지고 종합적 인식으로 만들 수 없다. 비극적 명제는 종합적이므로 본질적으로 복수적이고 유형적이며 미분적이다. 누가 죽고, 누가 신들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가? “신들이 죽을 때, 그들은 항상 여러 종류의 죽음을 죽는다.”[267]
1) 부정적 허무주의 관점에서: 유대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의식의 계기.
신의 관념은 무의 의지, 삶의 비하를 표현한다. “사람들이 삶 속이 아니라, 내세에, 무 속에 삶의 중력 중심을 놓을 때, 그들은 삶에서 그 중력 중심을 빼앗는다.”[268]
유대의 신은 자신의 아들을 그 자신과 유대 민족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죽음에 처한다. 신의 죽음의 첫째 의미는 그와 같다.[268]
유대교의 의식은 신을 유대인의 전제들 자체와는 별개인 그의 아들 속에서 신을 표현한다. 그것은 신을 죽음에 처하게 할 때 그의 신을 정말로 전 세계적이고, “모두를 위한” 보편적 신으로 만드는 수단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은 유태인의 신이지만 전세계적이 되며, 그의 전제들로부터 분리된 결론이 되었다. [269]
그는 고아로 태어나서 자신의 모습대로 스스로 아버지를 만들어 낸다. 사랑의 신, 그러나 그 사랑은 여전히 반응적 삶의 사랑이다. 바로 여기에 신의 죽음의 두번째 의미가 있다. 즉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우리에게 다시 신을 만들어 준다.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아버지 대신에 우리는 약간의 신뢰, 약간의 믿음을 요구하는 아들을 갖는다. [269]
신의 죽음의 셋째 의미: 성 바울은 그 죽음을 독점하고, 기독교를 구성하는 [그 죽음에 대한] 어떤 해석을 제공한다.… 아버지는 더 이상 자기 아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그를 죽인다.[270]
십자가 못 박힌 신은 부활한다. 성 바울의 또 다른 날조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부활, 우리를 위한 사후의 생명, 사랑과 반응적 삶의 통일. 아들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더 이상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 속에서 죽고,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아버지 속에서 부활한다. “결국 성 바울은 구원자의 삶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과 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했다‥…”: 즉 부활. - 기독교의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원한을 숨길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방향을 바꾼다. 유대교의 의식은 원한의 의식이었고, 기독교의 의식은 가책이다.… 그것은 삶의 사랑이지만 반응적 삶으로서의 사랑이며, 보편적인 사랑이 된다. …치료자인 예수, 증오를 품은 예수, 하지만 사랑에 의해서다.[271]
2) 반응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유럽적 의식의 계기.
지금까지 신의 죽음은 신의 관념 속에서의 무의 의지와 반응적 삶의 종합을 의미한다.[271]
신의 의지 대신에 반응적 삶, 신 대신에 반응적 인간, 더 이상 인간인 신이 아니라, 신인 인간, 유럽인이다. 인간은 신을 죽였지만, 신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반응적 인간.… 그 반응적 삶은 신을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다. 그것은 신의 연민을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희생이라는 말로 그[신]를 받아들이며, 그의 긍휼이란 함정에서 그를 질식시킨다. 그것은 그가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 뚜껑 위에 주저앉는다. 더 이상 신의 의지와 반응적 삶 사이의 상관관계는 없지만, 반응적 인간에 의한 신의 이동, 대체가 있다. 여기에 신의 죽음의 넷째 의미가 있다: 신은 반응적 삶의 사랑으로 질식한다. 신은 그가 너무나 사랑한 배은망덕자에 의해서 질식당한다.[271-272]
3) 수동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불교적 의식의 계기.
만약 사람들이 복음과 더불어 시작하고 성 바울과 더불어 결정적인 형태를 발견하는 날조를 참작한다면, 예수에 관해서 무엇이 남는가? 그것의 인격적 유형은 무엇인가?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니체가 성서의 “벌어져 있는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를 인도해야만 한다. 텍스트를 우리에게 진정한 예수에 대해 짐작해 보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가 가져온 즐거운 소식, 원죄 관념의 제거, 모든 원한과 복수심의 부재, 결과로서조차 모든 전쟁의 거부, 사랑의 마음으로 이 아래 세상에서 신의 왕국의 계시, 그리고 특히 그의 이론의 증거로서 죽음의 수용이다.[ 272]
예수는 성 바울이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반대이며, 진정한 예수는 일종의 부처였다. “거의 알려지지 않는 영토 위에서의 부처”였다.… 가책과 원한을 넘어서서 예수는 반응적 인간에 교훈을 제공했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예수는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지만 불교도였다. 교황보다는 달라이라마에 더 유사했다.[273]
아주 온순한 예수의 수단이 된 것은 증오였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불교와 성 바울의 공식적인 기독교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종교이다. “불교는 끝을 위한 종교이며 문화의 무기력이다. 기독교는 그 문화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만약 필요하다면 그것을 창조해 낸다.”[273-274]
불교가 실현된 목적으로, 도달된 완성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을 기독교는 단지 동력으로 체험한다. …그것[기독교]이 예수의 참된 실천을 재발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예수는 그 궁극적인 목적 속에 자리 잡았고, 불교적이지 않은 곳에서 부처의 새의 날개 짓으로 그것에 도달했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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