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3월 22일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반성 - 피히테에서 반성과 정립 -발제

작성자
naebilato
작성일
2019-03-22 18:25
조회
729
삶과예술 세미나 ∥ 2019년 3월 22일 금요일 ∥ 요약발제자: 유성균
텍스트: 발터 벤야민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b, 2017

제1부 반성, 1. 피히테에서 반성과 정립

[반성하는 사유는 인식론적 숙고를 전개하는 하나의 근본사실이다.]
자기의식 내에서 자시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사유라 함은 하나의 '근본사실'로써, 프리드리히 술레겔은 물론이고 노발리스의 경우도 대체로 이 '근본사실'로부터 인식론적 숙고를 전개하고 있다. …… 슐레겔은 '루친데'에서 '사유는 자기 자신 바로 다음으로는, 자신이 무한히 사유할 수 있는 점에 관해 사유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 경우 동시에 이해되고 있는 것은, 사유는 자기 자신을 성찰함에 있어서는 끝이라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23]

[반성은 사유의 양식이다.]
반성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사유에서의 가장 빈번한 유형이다. …… 반성개념 속에서 낭만주의적 사유에 매우 잘 적용될 수 있는 모방, 작풍, 양식이라는 세 형식이 발견되는데, 초기 노발리스의 경우처럼 피히테의 '모방', 슐레겔이 자신의 독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에서처럼 '작풍', 하지만 주목해야할 '반성'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지극히 깊은 통찰을 자의적이지않고 필연성을 가진 말로 나타내고 있는 사유의 양식이다. [24]

[낭만주의 정신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공상]
낭만주의적 정신은 초기낭만주의의 예술작품과 사유에서 슐게겔이 '슈테튼발트에서 언급한 '낭만주의적 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공상하는 것을 흡족해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수행하고 있다. 노발리슴는 공상의 한 단편에서 현세의 존재 전체를 정신들의 자기 자신에로의 반성으로서 해석하고, 현세에서 생활하는 인간을 저 원초적 반성의 부분적인 해소 내지 '돌파'로서 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빈디쉬만 강의에서 슐레겔은 '자기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활동의 능력, 자아가 자아일 수 있는 능력이 사유이다. 그러한 사유는 우리 자신 외에는 어떠한 대상도 갖지 않는다.' 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공상의 원리 즉, 사유와 반성의 원리를 정식화한 바 있다. [24-25]

[사유의 반성적 본성 속에 있는 사유의 직관적 성격 발견한 낭만주의자들]
여기에서 사유와 반성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반성 속에 주어져 있는 저 무한성 (즉 사유가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것 이상의 자세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가 불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저 무한성)을 사유에 대해 확보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낭만주의자들은 사유의 반성적인 본성 속에 사유의 직관적인 성격이 보증되어 있음을 목격했다. [25]

[예지적 직관 개념의 흐름과 피히테의 입장]
칸트의 예지적 직관의 사유가능성과 동시에 경험의 영역에서의 예지적 직관의 불가능성 주장 이래 나타난 직관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노력들의 흐름이 피히테, 슐레겔, 노발리스 및 셸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학문론(지식학)에 관한 자신의 초안에서 (예지적 직관의 개념을) 반성적 사유와 직접적 인식간의 교호적인 융합상태로 접근하고 있다. 직접적 인식이라는 문제에서는 초기낭만주의자들과 학문론(지식학)에서의 피히테의 입장과 일치하지만 후에 피히테는 낭만주의적 사유와의 친밀한 체계적 유사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25-26]

[피히테의 학문론 - 형식과 행위로서의 반성]
학문론에서 피히테는 반성을 '어떤 형식의 반성'으로서 규정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반성 속에 주어져 있는 인식의 직접성을 증명하고 있다. 학문론은 내용만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도 지닌다. 그의 사고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학문론은 어떤 것에 관한 학문이지, 이 어떤 것 자체는 아니다." 학문론이 어떤 것에 관한 학문이라 할 때의 그 어떤 것은 "지성의 필연적 행위"이다. 그 행위는 정신 속에 있는 모든 대상적인 것에 앞서 있고, 이 대상적인 것의 순수한 형식인 바의 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가능적 학문론의 질료 전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학문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학문을 완성하려면, 저 모든 행위의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인간적 정신의 어떤 행위, 즉 인간적 정신의 행위 방식 일반을 의식에까지 높히는 행위가 또한 그 위에 필요하다. …… 그런데 이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그 자체가 형식인 것, 즉 지성의 필연적인 행위가 내용으로 여겨지고, 어떤 새로운 형식, 즉 지식 또는 의식의 형식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저 행위는 반성이라는 행위이다." [27-28]

[반성작용과 자유행위]
그러므로, 반성이란 하나의 형식에로 변화시키는 - 그러한 변화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 반성작용 (the reshaping reflect/reflection on a form)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자유의 행위에 의해 형식은 이 형식 자신을 내용으로 삼는 형식이 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는 바, 이러한 자유의 행위는 반성이라 불린다." (이 진술은 직접적 인식이라는 것의 규정과 정당화가 시도되어 있다. 이 시도는 후에 지성적 직관에 의해 직접적 인식의 정초를 수행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28]

[반성의 중심에 있는 절대적 주체]
여기에서 피히테는, 어떤 직접적이고 확실한 인식은, 서로 상대방 속에로 이행하며 또한 자기 자신 속에로 되돌아가는 두 의식 형식 (즉 '형식'과 '형식의 형식' 또는 '지'와 '지의 지')의 연계에 의해 근거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유의 행위만이 관계하는 절대적 주체가 이 반성의 중심점이며, 또한 그런 이유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28-29]

[자기인식의 형식]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직관에 의한 대상의 인식이 아니라 방법, 즉 (절대적 주체를 대표하고 있는) 형식적인 것의 자기인식 (* 자기인식의 형식 form)이다. 서로 상대방 속으로 이행하고 있는 이 두 의식형식이 직접적 인식의 유일한 대상이다. 이 이행이, 저 직접성이라는 것을 근거 짓고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9]

[초기낭만주의의 피히테 인식론 수용]
초기 낭만주의는 이 피히테의 근원적이고도 신비적 형식주의를 동반한 인식론을 고수하였고 한편 피히테의 지시를 훨씬 넘어서 형성하고 있었다. (이 후의 저작들에서 피히테는 인식의 직접성이란 인식의 직관성 본성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29]

[낭만주의에 있어서의 반성하는 사유와 무한성을 위한 체계적 의미]
낭만주의에 있어서 반성하는 사유는, 모든 선행하는 반성을 그것에 뒤따르는 반성의 대상이 되게끔 한다는 그 비완결성에 의해, 이 무한성을 위한 어떤 특별한 체계적 의미를 획득했다. [29]

[낭만주의의 무한성 개념 영역]
피히테는 무한성을 이론철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고 이것을 실천철학의 영역에로 몰아넣고자 노력한데 반해, 낭만주의자측은 이 무한성을 다름 아닌 이론철학에 대해, 또한 그들의 전체 철학 일반에 대해 그 본질을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 (슐레겔이 실천철학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30]

[헤겔의 변증법에 선행한 반성과 정립 개념]
피히테는 자아의 이처럼 무한한 두가지 활동방식 즉, 반성활동 이 외에 정립활동을 알고 있다. 피히테의 사행은 명백히 자아의 이 두가지 무한한 활동 방식의 결함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이 결함 속에서 양 활동은 각각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본성, 그것들의 공허함을 서로 충전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사행은 하나의 정립적인 반성 혹은 반성적인 정립이다. 그것은'...정립하는 것(작용)으로서의 자기 정립이며, …. 결코 단순한 정립이 아니다.'고 피히테는 정식화한다. [30]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는 정립 작용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활동성을 자신의 본질로써 파악한다. …… 자아는 자기(A)를 정립하고, 상상력 속에서 비아(B)를 자기에 반정립시킨다. ……. "이성은 중재한다. 그리하여 B를 한정된 A(주관) 속에로 받아들이기 위해 상상력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때 한정된 것으로 정립된 A는, 다시 한번 어떤 무한한 B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B를 상상력은 위와 꼭 마찾가지로 다룬다. 이와 같이 나아가다가 마침내는 (여기에서는 이론적인)이성의 자기자신에 의한 완전한 한정에까지 나아간다. 거기에서는 상상력내에서, 이성 외에는 그 어떤 제한하는 B도 필요하지 않다. 즉 마침내 표상자의 표상에 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실천적 영역에서는 상상력은 무한히 나아가서 마침내 최고 통일의 결코 한정할 수 없는 이념에까지 도달한다. 이는 다만, 그 자체로는 불가능한 어떤 완성된 무한성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31]

[자아와 표상으로서의 비아가 지닌 이중성]
그러므로 정립작용은 이론적 영역에서는 무한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이론적 영역의 특성은 바로 무한한 정립작용의 제어에 의해 구성된다. 즉 그것은 표상 속에 존재해 있는 것이다. 여러 표상을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표상, 즉 표상자의 표상을 통해 자아는 이론적으로 완성되고 충실해진다. 이들 표상은 비아에 관한 표상이다. 비아는, 이미 인용한 여러 명제로부터 밝혀지듯, 이중적 기능을 지닌다. 즉 인식에서는 자아의 통일 속에로 돌아가고, 행위에서는 무한 속에로 들어간다고 하는 이중적 기능을 지닌다. [31-32]

[자아에서의 비아의 형성]
피히테의 인식론과 초기낭만주의의 인식론의 관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은, 자아에서의 비아의 형성이란 자아의 어떤 무의식적인 기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의식의 개별적인 내용은…… 그 내용이 의식 속에서 세력을 얻게 되는 충분한 필연성이라는 점에서는 그 어떤 물 자체에의 의식의 의존성으로부터는 설명될 수 없고, 단지 자아 자체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의식적인 생산 작용은 여러 근거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따라서 거듭 어떤 특수한 표상 내용을 전제하고 있다. 근원적인 생산 작용에 의해서야말로 우선 최초로 비아가 자아 속에서 획득되거니와, 이 생산 작용은 의식적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적이다.' 피히테는 '주어져 있는 의식 내용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책을, 의식 내용이 보다 고차의 표상, 어떤 자유로운 무의식적 표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 속에서" 발견하는 셈이다. [32]

[반성의 생성 조건]
반성은 무한한 정립 작용에 기반을 둔 형식이다. 즉 반성은 절대적 테제 속에 있는 정립작용으로서, 절대적 테제 속에서의 정립 작용은 인식의 실질적인 측면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순순하게 형식적인 측면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아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 테제 속에 정립할 때, 반성이 생겨난다. 전적으로 피히테적인 의미에서 슐레겔은 빈디쉬만 강의에서 자아 속에 있는 '내적 이중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32-33]

[반성의 가능성 조건으로서의 정립 활동의 제한성]
정립 작용은 표상, 비아, 반정립에 의해 자신을 제한하고 규정한다. 규정된 여러 반정립들에 기초하여, 그 자체 무한으로 나아가는 정립 활동은 마침내 다시금 절대적 자아 속으로 되돌려지며, 그것이 반성과 만나는 지점에서 표상자의 표상 속에서 파악된다. 무한한 정립 활동의 저 제한은 그러므로 반성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자아의 규정, 자기자신에 대한 자아의 반성은 …… 자아가 자기 자신을 어떤 대립된 것에 의해 한정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이 제약되 반성은 정립작용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다시금 하나의 무한한 과정이지만, 그러한 반성에 대해 그 무한성을 파괴함으로써 반성을 철학의 기관(organ)으로 삼으려고 하는 피히테의 노력이 새로이 눈에 띈다. [33]

[반성의 무한성으로 인한 현실적 의식의 역설]
미완인채로 끝난 '학문론의 새로운 서술의 시도 (1797) 피히테는 "너는 네 자신을 의식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는 '너의 사유하는 자아와 이 자아의 사유에서 사유된 자아를 필연적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너에게 이 점이 성립할 수 있으려면, 저 사유에서의 사유하는 자아가 의식의 객체일 수 있기 위해 다시금 보다 높은 사유의 객체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리하여 너는 이전에는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던 바를 다시금 의식하는 하나의 새로운 주체를 동시에 손에 넣는다. 여기에서 나는 이제 또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논증한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이 법칙에 따라 추론을 진행하기 시작한 이상, 너는 나에 대해 우리가 그만두어야 할 장소를 어디에서도 지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의식에 대해서도 그것을 객체로 하는 새로운 의식을 무한히 필요로 할 것이다. 또한 그리하여 우리는 결코 현실적인 의식을 용인할 수 있는 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33-34]

그것은 항상 반성의 저 무한성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는 '의식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는' 채로 머문다는 결론에 이른다.[34]

[사유라는 정신상태]
자기 의식에 거기에서는 이미 직접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원리상 끝없는 반성에 의해 불러내어질 필요가 없는 그러한 정신상태를 얻고자 하며 또한 이를 발견한다. 그러한 정신상태가 사유이다. '나의 사유의 의식은, 나의 사유에게 결코 우연적인 것, 나중에 비로소 그것에 부가된 것, 그것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나의 사유로부터 억지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34]

[직관 - 자기 의식으로서의 사유의 직접적인 의식]
사유의 직접적인 의식은 자기 의식과 동일하다. 그것은 그 직접성 때문에 하나의 직관이라고 불린다. 직관과 사유, 주체와 객체가 합치되어 있는 바의 그러한 자기 의식 속에 반성은 매어 있고 붙잡혀 있으며, 더욱이 그것은 없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무제한성을 면하고 있다.[35]

[절대적 자아에 이르는 변증법적 잠재성]
절대적 자아 속에는 반성의 무한성이, 비아 속에는 정립작용의 무한성이 극복되어 있다. 피히테에게는 이 양 활동의 관계가 아마도 전면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것들의 차이를 느끼고 그 각각을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체계 속으로 편입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이 체계는 그 이론적 부분에서는 결코 무한성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밝혀졌듯이, 반성 속에는 두 계기, 즉 직접성과 무한성이 있다. 전자는 피히테 철학에 대해, 세계의 근원과 세계의 설명을 바로 저 직접성 속에서 구하도록 지시한다. 후자는 저 직접성을 흐리게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철학적 과정을 통해 반성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낭만주의의 방향]
최고 인식의 직접성에 대한 관심은 피히테가 초기 낭문주의자들과 고유했던 점이다.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인식론에서도 또한 명확이 각인하고 있는 무한자에의 예찬은 그들을 피히테로부터 떼어놓았으며, 또한 동시에 그들의 사유 속에 무한자에 대한 지극히 고유한 방향을 부여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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