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차이와 반복226쪽(17줄)~235(20줄)

작성자
youn
작성일
2019-11-03 06:56
조회
684
다지원 들뢰즈와의 마주침 발제/ 2019년 11월 3일/ 발제자: YOUN
텍스트: 질 들뢰즈/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민음사 226쪽(17줄)~235(20줄)

두번째 종합: 잠재적 대상들과 과거

우리는 동시적으로 성립하는 두 차원을 구별해왔다. 즉 수동적 종합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심화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능동적 종합을 향해 이행할 수 없다. 이 심화의 방향에서 수동적 종합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응시적인 종합으로 머물러 있다. 하지만 묶인 흥분을 현실원칙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새로운 사태에 도달하게 된다. 게다가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위에 구축되려면, 이를 위해서는 수동적 종합이 반드시 능동적 종합과 동시적으로 존속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그와 동시에 전개해가야 하며.또 능동성에 대해 비대칭적이면서도 보충적인 관계에 있는 새로운 정식을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보자.(226쪽~227쪽)

가령 엄마가 노력의 목표이자 '현실안에서' 능동적으로 합류해야 할 종착점이 될 수 있다. 아이는 이 종착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성공과 실패들을 가늠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 아이는 또 다른 대상, 전혀 다른 유형의 대상을 스스로 구성해낸다. 그것은 잠재적 대상 혹은 초점이다. 아이의 현실적 활동의 진전과 실패들은 이 잠재적 대상에 의해 규제당하거나 보상을 받는다.(227쪽)

아이가 그렇게 손가락을 빠는 것은 단지 수동적 종합을 심화하는 가운데 응시해야 할 어떤 잠재적 대상을 제공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거꾸로 아이가 바라보는 현실적인 엄마는 단지 행위의 목적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능동적 종합안에서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의 역할을 맡고 있다.(227쪽)

아이는 타인에게 책을 내밀 때, 마치 그가 자신의 능동적 활동의 현실적 종착점인 양 내민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책의 반대쪽을 잡되,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수동성과 심화된 응시의 잠재적 초점인양 붙든다.(228쪽)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초점 중 어느것도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228쪽)

사실 묶기의 수동적 종합, 묶인 흥분들로부터 출발하여 어린아이는 이중의 계열 위에서 자신을 구축해간다. 그러나 이 두 계열은 모두 대상적이다. 즉 하나는 능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심화되는 수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이다. 수동적 자아는 바로 이 잠재적 초점들을 응시하면서 심화되고 또 이제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된다.(228쪽)

유아적 세계는 결코 원환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원적이고 이중의 중심을 갖는데, 이 두 중심은 모두 대상적이거나 객체적이지만 본성상 서로 다르다. 게다가 어쩌면 그 두 중심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는 어떤 교차, 어떤 뒤틀림, 어떤 나선, 어떤 8자형이 형성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드와 위상학적으로 구별되는 자아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아는 8자형의 교차 지점에, 서로를 잘라내는 비대칭적인 두 원환의 접합 지대에, 다시 말해서 현실적 대상들의 원환과 잠재적 대상이나 초점들의 원환이 만드는 접합 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자기보존 충동들과 성적 충동들의 분화는 상관적 관계에 있는 이 두 계열의 이중성과 결부 되어야 한다. 사실 보존 충동들은 현실원칙의 구성, 능동적 종합의 정초, 그리고 능동적 자아 전반, 만족스럽거나 위협적인 것으로 포착되는 현실적 대상과의 관계들 등과 분리될 수 없다. 하물며 성적 충동들은 잠재적 초점들의 구성 혹은 이 초점들에 상응하는 수동적 종합과 수동적 자아의 심화 등과 더더욱 분리되지 않는다.(228쪽~229쪽)

잠재적 대상들은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에서 절취된다는 사실, 그리고 잠재적 대상들이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안에 편입(합체)되어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확증되고 있다. 이런 절취는 우선 어떤 고립이나 불안정을 함축한다. 이 고립을 통해 현실적 대상은 고착화되고 이로부터 어떤 하나의 자세, 국면, 부분이 추출된다. 하지만 이 고립은 질적이다. 고립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적 대상에서 한 부분을 훔쳐낸다는 것이 아니다. 훔쳐낸 부분은 잠재적 대상으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본성을 획득한다. 잠재적 대상은 어떤 부분 대상이다. 이는 단지 잠재적 대상이 현실적 대상에 남아 있는 한 부분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잠재적 대상은 즉자적으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부분대상이다. 이는 그것이 잠재적인 두부분으로 쪼개지고 이분화되기 때문이고, 이 두 부분의 각각은 언제나 다른 한 부분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잠재적 대상은 현실적 대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특성 전반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점재적 대상은 그 기원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서 조갓이고 파편이며 허물이다. 잠재적 대상은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결여하고 있다(229쪽~230쪽)

능동적 종합은 수동적 종합을 넘어서서 전면적 통합(총괄적 적분)과 총체화 가능한 자기 동일적 대상들의 정립을 향해 나아간다. 반면 수동적 종합은 스스로 심화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총체화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부분 대상들을 응시하기에 이른다.(230쪽)

프로이트는 어떻게 성기기 이전의 성욕이 자기보존 충동들의 운동에서 절취된 부분 충동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절취는 그 자체로 부분적인 대상들의 구성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렇게 가정된 부분 대상들은 성욕의 잠재적 초점들로 항상 이분화되는 극들로 기능한다.(230쪽)

거꾸로 이 잠재적 대상들은 현실적 대상들 안에 편입, 합체되어 있다.(231쪽)

합체는 주체의 한계를 넘는것 이므로 결코 동일시도, 내투사도 아니다. 합체는 고립에 대립하기는 커녕 고립을 보충한다.잠재적 대상이 합체되어 있는 현실이 무엇이든, 잠재적 대상은 그 현실 안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박혀 있거나 꽂혀 있다. 하지만 잠재적 대상은 현실적 대상 안에서 자신을 메워줄 반쪽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잠재적 대상은 오히려 이 대상에 언제나 부재하는 나머지의 잠재적 반쪽이 있음을 증언한다.(23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체는 여전히 보존 충동들과 이것들에 상응하는 능동적 종합이---그것들 고유의 능력과 더불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차례에서 ----성욕을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로 끌어내리고 또 외부로부터 성욕을 현실원칙의 지배 영역 안으로 통합할 수 있는 조건이다.
잠재적 대상은 본질적으로 과거적이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 에서 두개의 중심을 갖는 세계의 도식을 제시했다. 여기서 하나의 중심은 현실적이고 다른 하나의 중심은 잠재적이다. 이 두 중심으로부터 한편에서는 '지각 이미지들'의 계열이 뻗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회상 이미지들'의 계열이 뻗어 나오며, 이 두 계열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회로안에서 서로를 조직한다. 잠재적 대상은 사라진 현재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질과 이행의 양상은, 능동적 종합에 의해 구성되는 한에서의 현실성의 계열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순수 과거는 자신의 고유한 현재와 동시간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렇게 정의된 순수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하고 또 모든 현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잠재적 대상에 질이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순수 과거이다. 잠재적 대상은 순수 과거의 한 조각이다.(231쪽~232쪽)

현재의 현실적 대상에서 절취된 잠재적 대상은 현실적 대상과는 본성상의 차이를 지닌다. 잠재적 대상은 현실적 대상에서 훔쳐낸 것이지만 단지 그 현실적 대상과의 관계안 에서만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잠재적 대상은 그 자체로 어떤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잠재적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반쪽이고, 나머지 반쪽을 차이나고 부재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그런데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이 부재는 부정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영원한 반쪽인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않고, 오로지 그런 조건에서만 자신이 있는 곳에 있다.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없는 곳에서 탐색되어야 하고, 오로지 그런 조곤에서만 자신이 발견되는 곳에 있다. 잠재적 대상은 자신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소유되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니지 않는 자들에게 소유된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반과거 시제의 존재자이다.(232쪽~233쪽)

현재는 지나가는 현재이고 자기 자신과 더불어 실려 가는 현재이다. 순수 과거는 보편적 운동성과 보편적 편재성을 띠고, 이를 통해 현재가 지나갈수 있도록 해준다.(234쪽)

잠재적 대상은 어떤 고착된 현재 안에서, 자신이 구가하는 현재와 동시간적인 가운데 과거적이다. 잠재적 대상이 과거적인 것은 부분 대상으로서 어떤 다른 부분을 결여하고 또한 동시에 그 자신에 해당하는 부분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잠재적 대상은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리를 바꾸었기 때문에 과거적이다.그렇기 때문에 잠재적 대상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단편으로만 실존 할 뿐이다. 즉 그것은 오직 잃어버린 어떤 것으로만 발견될 수 있다---그것은 오로지 재발견된 어떤 것으로만 실존한다. 여기서 상실이나 망각은 어떤 극복되어야 할 규정들이 아니다.오히려 거꾸로 그것은 망각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상실된 것의 자격에서 재발견되는 대상의 객관적 본성이다.(234쪽)

에로스와 므네모시네

바로 이런 것이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연관 관계이다. 에로스는 순수 과거에서 잠재적 대상들을 탈취하고, 우리는 또 그 에로스에 힘입어 그 대상들을 체험한다.(235쪽)

만일 팔루스 개념에 이런 확장된 외연( 모든 잠재적 대상들을 포섭하는 외연)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이는 이 개념이 앞에서 언급된 특성들을 실제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부재를 증언하고 과거적인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증언한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 본질적으로 자리를 바꾸고 있다는 것, 오로지 잃어버린 것으로서만 발견된다는 것, 언제나 분신 안에서 동일성을 잃어버리는 단편적인 존재자로서만 발견된다는 것 등이 그런 특성들에 해당한다.(235쪽)

팔루스는 '페니스'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소유된다.상징적인 팔루스는 성욕의 아득한 태고 못지 않게 순수 과거의 에로스적 양태를 의미한다. 상징은 언제나 자리를 바꾼 단편이며, 결코 현재인 적이 없었던 어떤 과거, 곧 대상=x에 대해 타당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잠재적 대상들이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어떤 요소를 전제한다는 이런 생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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