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6_발제] p.380-393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20-08-15 19:48
조회
352
9 문명 자본주의 기계

#돈-자본의 충만한 몸, 380
- 탈 영토화의 큰 운동들 : 전제군주 국가의 초코드화, 흐름들의 탈코드화 → 그러나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들로만으로는 충분치 않음. Ex. 로마, 봉건제
-봉건 체계의 붕괴를 야기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가 맞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 둘 사이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전제군주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저들, 국가의 창설자들은 번개처럼 도래하기 때문이다.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인 반면,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새로운 창조적 절단의 분열증적 시간.)

#탈코드화 및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결합, 381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또는 옛 체계가 이번엔 밖으로부터 죽기 위해서는, 이 모든 탈코드화된 흐름의 만남, 이것들의 결합, 이것들 서로 간의 반작용이 한 번에 생산되는 이 만남, 이 결합, 이 반작용의 우발이 있어야 하리라. (“왜 유럽일까? 왜 중국이 아닐까?” 탁월한 우발성의 물음)
-탈코드화된 욕망들, 탈코드화의 욕망들은 늘 있었고, 역사는 이것들로 충만하다. 하지만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하나의 욕망을, 사회적인 동시에 기술적이 욕망 기계를 꿈꾸거나 결핍하는 대신 / 그런 기계를 생산하는 욕망을 형성하는 것은, 한 장소에서 이 흐름들의 만남을, 시간이 걸리는 한 공간에서의 이 흐름들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자본주의와 그 절단은 단순히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와 “새로운” 거대한 탈영토화 그리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결합에 의해 정의된다.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만든 것은 바로 이 결합의 특이성이다.
-미개영토기계 : 생산의 연결들에서 출발 / 야만 전제군주 기계 : 탁월한 통일성에서 출발한 기입의 분리들 위에서 정초 / 문명 자본주의 기계 : 결합 위에 설립
-이 결합이 사회 기계의 맨 앞줄로 이행할 때, 역으로 그것은 한 계급의 과잉 소비로서의 향유로 연결되기를 그치는 것 같으며, 노동의 원시적 연결들을 / 탈영토화된 새로운 충만한 몸으로서의 자본에 결부한다는 조건에서, 이 유일한 조건에서, 이 연결들을 되찾는 <생산을 위한 생산> 속에서 사치 자체를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만들고 모든 탈코드화된 흐름을 생산으로 복귀시키는 것 같다. 생산을 위한 생산은, 노동의 원시적 연결들이 방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참된 소비자이다.

#냉소, 384
맑스, 자본, 두 <주요>요소들의 만남
① 탈영토화된 노동자 : 그는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자유롭고 벌거벗은 노동자가 되었음.
② 탈코드화된 돈 : 이것은 자본이 되어 노동력을 살 수 있음.
: 이 두 요소가 봉건제 전제군주 국가의 절편화 및 봉건 체계 자체와 그 국가의 해체에서 유래한다는 점은 / 아직 우리에게 이 두 흐름, 즉 생산자들의 흐름과 돈의 흐름의 외래적 결합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요소들이 어떻게 그 모든 경과의 결합과 더불어 만나는가? 시대는 이제 잔혹의 시대도 공포의 시대도 아닌 냉소의 시대이며, 냉소의 시대는 이상한 독실함을 동반하고 있다. (이 둘은 휴머니즘을 구성한다. 냉소는 사회장의 물리적 내재성이며, 독실함은 정신화된 원국가의 존속이다. 냉소는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이지만, 독실함은 이 동일한 자본이되 모든 노동력이 그로부터 유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신神-자본과도 같다.)
-이 냉소의 시대는 자본축적의 시대로, 이 시대는 정확히 말해 /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모든 흐름의 결합을 위한 시간/을 내포한다.
-하지만 결합의 결과는 / 실은 자본에 의한 점점 더 깊은 생산 통제이다. 자본주의 내지 자본주의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모든 흐름의 결합은, 다른 흐름들 중의 몇몇 흐름이요 다른 요소들 중의 몇몇 요소에 불과한 / 상업자본 내지 금융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 산업자본에 의해 정의된다. (...)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자본주의 기계가 조립되는 것은, 자본이 생산을 직접 전유할 때 뿐이며, 금융자본과 시장 자본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에서 / 분업에 상응하는 특유한 기능이 될 때 뿐이다. <이제 생산들의 생산, 등록들의 생산, 소비들의 생산이 다시 발견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는 / 자본을 사회의 새로운 충만한 몸이 되게 하는 /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저 결합”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혈연 자본과 결연 자본, 386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
① 상품 (단순교환) : 시장 생산물들을 추상적 노동 단위의 특정한 얼마(quanta)로서 기입
②화폐 : <일반적 등가물>이 화폐로 나타날 때에만 얼마임(quantitas)의 세력권에 이르며, 이 얼마임은 모든 종류의 특수한 가치들을 지닐 수 있거나 모든 종류의 얼마들에 타당할 수 있음. 이 추상량은 온갖 특수한 가치를 지녀야만 하며, 그래서 그것은 여전히 얼마들 간 크기의 비로만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교환 관계와 독립해서 생산되고 / 나아가 기입되는 부분대상들을 형식적으로 합병한다.
→ 상업적/화폐적 기입은, 추상적 노동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 특유한 생산양식 아래서 고려된 사회체의 / 기입의 예비적 성격들과 예비적 기입 양식들에 의해 / 초코드화된 채로, 심지어는 탄압된 채로 있다. 맑스의 말처럼, 추상적 노동은 / 생산 활동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관계지만, /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기계 속에서만 추상적 노동으로 나타나며 또 실천적으로 진실이 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전에는 상업적/화폐적 기입은 / 자기 고유의 몸을 이용하지 못하고, 단지 기존의 사회 몸의 틈바구니 속에 삽입되어 있었다. (상인의 자신이 보유한 영토성 이용, 새로운 결연(상인 부르주아지, 은행가 부르주아지, 봉건제의 결연)
-요컨대 자본주의 기계는 / 자본이 혈연 자본이 되기 위해 결연 자본이기를 그칠 때 / 시작된다. 자본은 돈이 돈을 낳거나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혈연 자본이 된다.
-오직 이 조건들에서만 자본은 충만한 몸, 새로운 사회체 또는 모든 생산력을 전유하는 준-원인이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얼마 또는 얼마임의 영역에 있지 않고, 결합으로서의 미분 비 영역에 있는데, 이 미분 비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내재적 사회장을 정의하며, 추상 그 자체에 그 실효적인 구체적 가치와 그 구체화 경향성을 준다.
-추상은 그 본연의 것이기를 그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단순한 양 속에서 독립 항들 간의 가변적 비로 나타나지 않으며, 자기 독립을, 즉 항들의 질 및 비들의 양을 획득했다. 추상적인 것 자신은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서> 자기를 발전시킬 더 복합적인 관계를 정립한다. 그 관계란 미분 비 Dy/Dx인데, 여기서 Dy는 노동력에 미분되어 유도되며 가변자본의 변동을 구성하고, Dx는 자본 자체에서 미분되어 유도되며 불변자본의 변동을 구성한다. 바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유동(fluxion, 뉴턴의 미적분법)에서, 이 흐름들의 결합에서, 자본의 혈연적 형식인 x+dx가 나온다. (1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미리 지급한 100파운드는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미분 비가 표현하는 것은,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본현상이다. 여기서 수학적 외양이 옛 코드들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은, 잔존하던 코드들과 영토성들이 파산하여 (탈영토화, 초코드화, 탈코드화) / 완전히 다르게 기능하는 종 자체가 / 다른 기계에 이용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는 점을 뜻할 따름이다.
-더 이상 삶의 잔혹도, 다른 삶에 맞서는 삶의 공포도 없으며, 사후(post-mortem)의 전제주의가, 항문과 흡혈귀가 된 전제 군주가 있다. (...) 이렇게 산업자본은 자본주의 기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새-혈연을 제시하며, 이것과 관련하여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은 이제 특유한 기능들을 맡으면서 새로운-새 결연의 형식을 취한다.

#돈의 두 형식, 두 기입, 389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말하자면 총자본과 관련한 잉여가치의 경향적 저하라는 유명한 문제는, 자본주의 내재장의 집합 안에서만, 또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된느 조건들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선 (발리바르의 지적에 부합하게) 이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는 끝이 없으며, 오히려 이 경향에 상반되는 요인들을 재생산하면서 자신을 재생산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p.363 무한부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채권자에 맞서 채무자 편을 들라)
-하지만 왜 이 경향에는 끝이 없을까? (...) 오히려 그들은 이로부터 자신들이 숨기려 하는 것을, 즉 임금노동자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과 기업 대차대조표에 기입되는 돈이 / 같은 돈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해야 하리라.
①임금노동자의 돈 : 교환가치의 무력한 화폐기호들, 소비재들 및 사용가치들에 상대적인 지불수단들의 흐름, 화폐와 생산물들의 선택 폭 간의 일대일대응 관계가 있다(내가 권리를 갖고 있는 것), 소비 흐름에서의 가능한 채취-절단을 재현
②기업 대차대조표의 돈 : 자본 권력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들, 생산의 미분계수들의 체계(이 체계는 여기서 지금 실현될 수 없으며,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장기 경제 전망 능력 내지 장기 평가를 증언), 생산 흐름들이 자본의 분리들에 전유되는 방향으로의 경제적 사슬들의 이탈-절단 및 재절합의 가능성을 재현
<은행업의 이원성 : 은행이 융자와 지불에 둘 다 참여하고, 이 둘의 돌쩌귀에 있다는 점은, 이 둘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보여 줄 따름임.)
지불수단 구성체 vs 융자 구조
화폐 관리 vs 자본주의적 축적의 융자
교환 화폐 vs 신용화폐
-모든 상업 채권이나 은행 채권을 포함하는 신용 화폐에서, 순수한 상업적 신용은 / 지불수단으로서의 돈이 전개되는 단순한 유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거꾸로, 은행 신용은 화폐의 비화폐화 또는 비물질화를 행하고, 돈의 유통 대신 어음들의 유통에 기반하며, 하나의 특수 회로를 가로지르는데, 이 회로에서 은행 신용은 / 교환이라는 도구적 가치를 얻고 나서 잃어버리며, 흐름의 조건들은 / 무한 부채에 자본주의적 형식을 줌으로써 환류의 조건들을 내포한다.
-하지만 조절자로서의 국가는, 직접 금과의 관련을 통해서건, 간접적으로 신용 보증인, 단일 금리, 자본시장의 통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 집중화 양식>을 통해서건, 이 신용 화폐의 원리상 태환 가능성을 보증한다. 따라서 은행업 실천의 두 양상인 지불과 융자라는 돈의 두 형식의 이원성이 지닌 깊은 은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이 은폐는 오인에서 기인한다기보다 자본주의 내재장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외견상 객관적 운동을 표현하는데, 이 운동에서는 하위의 종속된 형식이 다른 형식 못지 않게 필수적이며 (돈이 두 테이블에서 노니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이 운동에서는 적용되지 않은 / 태환 가능성이라는 이 원리의 그림자가 없다면 / 피지배계급의 통합은 전혀 실효성이 없을 테지만, 이 원리만 있으면 가장 낙후된 피조물의 욕망이, 경제를 알건 모르건, 전력을 다해 / 자본주의 사회장의 집합을 투자하는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자본주의가 그 본질 내지 생산양식에 있어 산업적이라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장자본주의로서만 기능한다. 자본주의가 그 본질에 있어 혈연적 산업자본이라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업적/금융적 자본과의 결연을 통해서만 기능한다. 어느 모로는, 체계 전체와 욕망의 투자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바로 은행이다. 케인스의 공헌 중 하나는 화폐의 문제에 욕망을 다시 도입했다는 점이리라.

#경향적 저하, 391
-돈의 이원성, 두 기입. 크기의 두 차원을 같은 분석 단위로 측정하는 것은 순전한 허구이자 희극적 사기로, 이는 마치 은하계들 간 거리나 원자 내부의 거리를 미터나 센티미터로 측정하는 것과도 같다. 기업들의 가치와 임금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가치 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전혀 없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경향적 저하에는 종결이 없다.
-총생산량 관점에서 생산의 흐름의 변주의 극한이 문제라면 미분계수는 물론 계산 가능하지만, 생산의 흐름과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흐름이 문제라면 미분계수는 계산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차이를 본성의 차이로 구성하는 관계 속에서 / 차이는 무화하지 않으며, <경향>은 종결이 없고, 도달할 수 있거나 나아가 접근할 수 있는 외부 극한이 없다. 경향은 단지 내적 극한을 갖고 있을 뿐이며, 끊임없이 이 극한을 넘어가지만, 이 극한을 이전하면서, 말하자면 이 극한을 재구성하면서, 이전을 통해 새로 넘어가야 할 내적 극한으로 이 극한을 재발견하면서, 그리한다.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의 외부 극한이라면, 그 까닭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외부 극한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스스로 자본이면서 / 자본이 만나지는 않지만 / 자본이 늘 이전함으로써 재생산하는 내부 극한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82. 자본주의 생산은 그것에 내재하는 극한들을 부단히 넘어가려 애쓰지만, 이 극한들을 새로이 엄청난 규모로 자기 앞에 놓는다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만 넘어선다. 자본주의 생산의 참된 극한은 자본 그 자신이다.)

***
아니 내용을 요약할 수가 없어요ㅋㅋㅋ
여튼 내일 뵙겠습니다.
아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 저는 줌으로 참여할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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