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정치 4장 심아정님 발제문입니다.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9-03-25 22:54
조회
816
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Ⅳ. 비상 상태

2019년 3월 26일(Tue) 심아정

거리의 축소는 곧 공간의 부정이기에, 그 경제/정치적 귀결을 전략적으로 좀처럼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형을 포기할 경우, 군사 기동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오늘날 시간을 획득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벡터(방향&힘의 크기)의 문제이다. 영토는 발사체 때문에 그 중요성을 점점 상실해왔고, 속도의 비-장소성(속도로 인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이 지닌 전략적 가치는 장소의 전략적 가치를 대체해 왔다. 초음속(항공기, 로켓, 방송전파)의 벡터가 등장함으로써, 침투와 파괴는 하나가 되어갔다. 운동과 운송 장치에 침투할 수 있는 불의 능력과 불의 파괴 능력을 구분하는 것이 ‘적합성’을 잃고, 즉각적인 침투와 공간의 파괴가 동시에 가능해졌다. 운송장치의 작동(정확성, 사정거리, 속도)이 가속화되면서 공간-거리에 이어 시간-거리까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 거리에서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준비되어 있지 않은 적 뿐만아니라, 일종의 장(場)이자 거리이며 물질인 세계를 패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전쟁기계는 이중의 사라짐을 결합했다. 핵분열 속에서 이뤄진 물질의 사라짐과 운송적 절멸을 통해 이뤄진 공간의 사라짐을. 그렇지만, 핵억지력을 통한 평화적 공존이라는 균형 속에서, 물질의 분열은 끊임없이 지연되고 있지만 거리의 소멸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곧 레이저 무기의 등장과 더불어 빛의 속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지점들’이 더 이상 지정학적 거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리적 국지화가 분명히 그 전략적 가치를 잃었으며, 그만큼의 가치가 영구적인 운동 중에 있는 벡터의 탈국지화에 부여되었음을 인정해야한다.

사실상, 속도의 맹렬함이 없다면 무기의 맹렬함도 그다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따라서 오늘날 무장 해제는 무엇보다도 감속을 의미한다. 서로를 파괴할 수 있는 경쟁의 속도를 제한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습격이 초음속의 속도로 이뤄져 경계경보를 울리기까지의 시간이 단축됐기 때문에 간편하게 완전화된 방어 체계에 의해 국가 수장의 성찰 능력과 결정 능력이 박탈당할 위험에 놓여있다. 그 이래로 교전 여부의 결정은 전략컴퓨터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억지력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정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공간의 전쟁이 가져온 포위 상태가 시간의 전쟁이 가져온 비상 상태로 뒤바뀌는 데에는 고작 몇 십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한편으로 자동화에 세례를 베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행동이 축소화되기 시작한 시기를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이 적절하게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가능성이 ‘비상 상태’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될 임계점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너무 빠른 발전때문에 마치 각 당사자들의 병기 자체가 자기(내부의) 적이 되어버리는 식으로 진행된 것.

무기는 사용 전부터 두려움의 대상, 즉 일종의 위협으로 기능한다. 새로운 무기의 창안이라는 불길한 징조는 억지력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단계이다. 적이 신형 무기를 발명하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그 성능을 개선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전쟁은 실행 단계에서 구상 단계로, 자동화라는 특징을 지닌 단계로 이동했다. 새로운 파괴 수단의 출현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까닭에 이 새로운 무기는 전략적이다. 공격과 수비를 결합시켰기 때문에 군비 경쟁의 운동은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파괴 수단을 생산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이 또다시 파괴의 불가피성을 불러오는 악순환. 어쩔 수 없이 억지력에 끌려 들어간 우리의 주인공들은 최악의 정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악의 비정치’를 수행하게 됐다. 따라서 핵무기의 위험, 그리고 핵무기가 보여주는 군사 체계의 위험은 핵무기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이라기보다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핵무기가 우리의 정신을 내파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다. 완전한 폭발은 비상 상태와 더불어 발생한다. 그리고 속도의 폭력은 정주(定住)이자 법이 됐으며, 세계의 운명이자 세계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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