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정치 3장 발제

작성자
dageumsong
작성일
2019-03-26 13:02
조회
653
- 「Ⅲ. 질주정 사회」 발제
송다금

“완전무결한 육체의 향연이라는 꿈”을 꾼 나치는 모든 독일인들을 기록하기 위해 무상 의료보험을 개시한 뒤, 국민들을 마치 “엑스레이로 찍듯이” 조사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나치가 한 일은 수백만 명의 인간(유태인, 집시, 슬라브인 등)을 죽이는 일이었다. 폴 비릴리오, 5장 「무능한 육체」, 『속도와 정치』 ,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14, 138쪽.

엑스레이 찍는 것과 같이 면밀한 조사는 결국 “인간이 서로 간에 세운 장벽을 기초로 해서 극악하고 흉측한 행동” 찰스 패터슨, 3장 「홀로코스트의 반향들 –종의 장벽을 넘어서」, 『동물 홀로코스트』, 정의길 옮김, 휴, 2004, 203쪽.
을 할 수 있는 근거로 작동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 전에는 늘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선행되었는데, 인간을 죽이는 일은 ‘열등한’ 유전자를 도태시키거나 동물을 죽이는 일로 치부되었고, 비인간동물을 죽이는 일과 인간을 죽이는 일은 시스템 호환 속에서 병치/병행되었다. 분업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를 가능케 한 일괄식 조립생산 라인은 도살장 시스템에서 발전된 것이며, 포드는 시카고 도살장에서 영감을 받아 일괄식 조립생산 라인을 만들었다. 포드와 히틀러의 영향 관계에 대해서는 『동물 홀로코스트』를 참조할 것.
동물을 체인으로 끌어올려 작업대 끝에서 ‘고기’로 뽑아내는 이 과정은 리프킨이 말한 바, “처음으로 기계가 대량 도살의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사람들을 단순한 공범자로 만들어 그 조립라인이 설정하는 속도와 조건들에 순응하도록 강제했다.” 패터슨, 위의 책, 2장, 110쪽.
독일계 유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그들은 단지 동물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살장에서 시작된 것이 아우슈비츠라고 선언한 바 있다. 독일 처형센터들은 목적이 인간학살이었지만, 인간사회의 동물 착취와 도살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가동되었다는 것이다. 패터슨, 위의 책, 2장, 169쪽. 이것은 동물 도살 시스템이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는 의미와 실제로 독일군이 인간을 도살할 때 동물에 대한 도살도 멈추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인간 학살 이전에 항상 비인간화, 동물화가 선행되었다는 것은 동물이라는 이름, 다른 종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음, 즉 동물 도살 시스템이 있는 한 언제든지 인간도 그 시스템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한다.
인간을 무력한 공범자로 만드는 인간 협력 체계로서 도살장이 있는 한 파시즘은 살아있다. 이는 비릴리오가 7.8장에서 지적한, 인간의 기계로의 대체, 발명된 공통된 감정으로서의 불안감이 이끌어가는 안전한 소비와도 연결된다.
조부모를 나치 수용소에서 잃은, 동물 운동가 바바라 스태그노는 슈퍼마켓의 진열대에서 ‘음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장식 농장과 도살장의 최종 산출물들을 본다. 박스 안의 고양이를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볼 때, 그는 거리에서 죽어가거나 동물보호소에서 치사량의 안락사 약제 주사를 맞는 수백만 마리의 고양이를 본다. 그는 이를 ‘투시력x-ray vision’을 얻은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위의 책, 202-203쪽.



5. 무능한 육체

17세기 이후 전투를 통해 생겨난 군대 질병에 대한 자각은 전쟁 기계가 육체 기관에 가한 손상을 또 다른 기계인 인공보철물이 복구하게 했다. 프랑스와 달리, 1914년 독일은 불구자들을 군복무에서 제외하는 대신 각자가 지닌 특수한 장애 상태를 모두 활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예를 들면, 귀가 먼 사람은 포병대에, 등이 굽은 사람은 자동차 부대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군부가 가한 운동의 독재는 인공보철물과 기술적 운송 장치를 완벽하게 융합시켜 무능한 육체를 활성화했고, 이는 프랑스 군사령부에도 영향을 주었다. 폴 비릴리오, 5장, 139-140쪽.

1921년 마리네티는 장갑차를 장기나 조직을 이식받은 자로서의 초인, 추진력을 지녔기에 대담해질 수밖에 없는 비인간, 시공간을 절멸시킬 수 있는 기계화된 육신의 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동물적 신체로 은유화했다. 마리네티의 장갑차의 은유화를 통해서 미래주의 예술적 근거를 알 수 있다. 미래주의는 전쟁의 예술(방법), 그리고 전쟁의 정수인 속도의 예술(기예)이라는 사실상 단 하나의 예술에 근거하고 있다. 미래주의는 1920년대의 질주학적 진화에 가장 눈부신 전망을, 초음속의 측정 구간을 제시해준다. 위의 책, 140쪽.

사실상 ‘강철 벽감’의 인간 육체는 이중으로 불구인 프롤레타리아 병사의 육체이다. 의지를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 병사는 공격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운송적 인공 보철물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별안간, 질주광의 어마어마한 동적 힘은 평가 절하된다. 현실적 전쟁은 이런 대중들이 질주정의 지배적인 대리인, 속도의 동력이자 생산자가 되기에는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세계대전 이래로, 사람들은 인적 자원을 탐욕스럽게 요구하게 됐다. ‘영토의 행정관’이 된 장군들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과정이 산업적 프롤레타리아트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임이 입증되었다. 위의 책, 141쪽.

전장에도 구조가 존재한다. (페리) :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이탈리아, 포르투갈 같은 나라의 각 정부들은 자국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가축을 놓고 흥정을 벌이거나 서둘러 교환을 진행했다. 자신들의 가축은 “낮은 온도에도 견딜 수 있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뛰어난 노동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이때 자국의 식민지 소유물로서 세네갈의 크리올들, 흑인들, 모로코의 노동자들, 인도차이나의 원주민들이 수만 명씩 동원되었다. 위의 책, 141-142쪽.

현실적 전쟁은 공격을 두 단계로 나눠놓았다. 위의 책, 142쪽.

1. 앞으로 다가올 전투를 위해서 새로운 철도와 역, 전화 시설, 확장된 도로·선로, 일괄 퇴각로, 후송로, 방공호와 같은 최초의 하부구조가 창출된다.
2. 두 번 째 단계는 다시 교통로의 감시였다. 더 나은 궤적을 위한 힘의 변형, 생존과 맞바꾼 삶을 따라서 대지를 고갈시키는 것이 현실적 질서가 됐다. 테야르 드 샤르댕, 「나의 우주」, 비릴리오 위의 책, 142쪽.

질주정은 한정된 군사적 적수에 맞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공격, 그 공격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공격이다. 식물상과 동물군의 소멸, 자연 경제 폐기는 좀 더 잔인한 파괴를 위한 느린 준비로서 더 큰 규모의 경제 봉쇄·포위 경제, 고갈 전략의 일부이다. 사냥꾼 –침략자 카스트는 비록 집단에게 먹을 음식을 제공해주긴 했지만 식량의 비생산성으로 인해 식량 권력을 육성했다. 위의 책, 143쪽.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내포적인 정복(“세계평화 선언”)에 실패했던 미국은 오늘날 녹색의 유럽에 맞서 무자비한 전쟁을 이끌고 있다. (농민에 맞서는 캠페인, 식량 산업의 통제, 곡물을 둘러싼 전쟁 등). 1977년 베트남에 대한 세계은행의 차관 확대를 허가한 미국 의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지정학적 이유로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농촌 지역의 식물상과 동물군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가 자신들의 적을 최고 고객으로 둔갑시키는 미국의 속도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위의 책, 144쪽.

아테네와 스파르타 예시에서, 스스로 군사를 조직했던 스파르타인들과 달리, 그리스의 정책 아래 단결한 다른 식민지 위성국들과 같이 아테네는 (느린) 내포적 침투 체계를 채택하기 위해서 (신속한) 외향적 침투 체계를 단념하였다. 내부 자연 경제의 폐기(농지 개혁, 도시화, 작업장과 공장 창출)가 외부를 향한 군사적 개입을 대체한 것이다. 위의 책, 145쪽.

정치질서 건설하려면 군사력 강화뿐 아니라, 국내 안정에도 신경 써야 하지만 스파르타는 그러지 못했다. 위의 책, 146쪽 각주.
그리스 최초의 민주정인 스파르타에서 서구의 중요한 주제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으나, 유동성(이동성)을 발견할 수 없다.
스파르타인들은 헌정상의 모든 변화를 적대시하며 실존의 동적 준거로서의 역사를 거부해왔다. 무엇보다 그들은 운송이나 바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리스 한 가운데의 메세니아를 식민지로 만들고, 뤼쿠르구스의 체제를 실험하던 2세기 동안, 군사적 힘이 가져온 결과를 내던져버렸다. “라케다이몬인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은 아테네의 정복 이래 발생한 금과 은의 유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군대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경제 전쟁이 성취했다. 147쪽.

정지는 죽음이다, 이 말은 전 세계의 보편 법칙이다. 질주관은 뤼쿠르구스와 마오의 혁명이 지녔던 원래의 민주주의를 꾸준히 억압하였다. 마오는 내포적 성장 체계라는 서구 제도를 중국에서 지연시켰을 뿐이다. 148쪽.

국가-요새, 국가-요새의 권력과 법률은 거대한 순환의 장소에 존재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역사의 의미가 18세기에 등장해 19세기 중요한 저작을 등장시켰다는 통념과 달리, 이미 16세기 중반에 법률가들은 ‘완벽한 역사라는 관념’을 제시한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유럽 국가들은 로마의 방식을 좇아 스스로 정당한 전쟁이라는 관념을 재확립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이 이상적 형태로 재탄생되자 (중앙집권주의로 인함) 단순한 보복 원정과 기술적으로 구분되면서 편협한 절충안에서 원래 개념을 엄밀하게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가자마자 국가의 역사적 이상이 등장했다. 실제로, 역사의 진보는 무기 체계의 발전 속도와 비례한다. 매년 봄철마다 되돌아오곤 했던 전쟁처럼, 한 해는 계절적으로 파악됐다. 위의 책, 149쪽.

역사적 창작물도 고대의 전쟁기계처럼 작동했다. 서사라는 수단은 반복됨으로써 우연을 제거하며, 그 이야기에 담긴 논리가 스스로를 증식시키며 제 능력을 발휘하는 전쟁기계가 된다. 포병대와 군사적 교통로 감시가 국가 체재의 일부가 됐을 때에야 역사적 언어는 말 그대로 비교급에서 원급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강렬도를 언급하지 않아도 됐으며 역사에 도달한다는 것은 운동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위의 책, 151-152쪽.

질주정의 엘리트들은 서구 유럽을 휩쓸었으며, 더 이상 영토에 대한 권리를 창출하는 힘이 아니라 침략 자체 즉 침략 능력이 되었다. 사냥꾼-침략자의 집단이 정지와 (토지나 영토의) 할당이라는 의례의 뒤를 이은 것이다. 결국 이 질주정적 권력이 부당하게도 유럽의 영토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갖고 있던 조직체계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겉보기에 분산되어 있는 듯 보이는 봉건사회도 행진하는 부대처럼 잘 조직된 것이다. 위계상의 분할 자체가 이미 행군의 순서였으며, 배치된 영토 자체가 작전을 수행할 전역이었다. 지휘사령부의 건물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성채나 알제리인들의 요새와 똑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군사 점령자에 의한 대지의 지배와 토착민에 의한 토지 소유권이 완벽하게 구분됐기 때문에, 영지는 반식민지의 역할을 했다. 질주정 국가에게는 대지에 대한 지배가 이미 대지의 모든 차원에 대한 지배다.
고대 로마의 지적법(토지의 소재, 경계, 면적 등을 조사/측량하는 방법)인 백분할도 점령하기 위해 분할해 놓은 소유-취득의 흔적이다. 이 지워지지 않는 분할은 침략이라는 이동-권력의 본성이며 따라서 군사 국가는 도로에 존재한다.
아성(주인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을 선점한 자는 신중한 물리적 수단을 통해서 영토를 조화롭게 지배하곤 했다. 특히 개벌을 통한 투명성(즉, 토지를 개벌해 사방팔방이 모두 드러나 보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침략자들로서 자신들의 침투 능력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이다. 토총을 쌓고, 그 다음으로 아성을 쌓은 것도 모든 차원을 부감(내려다 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던 또 다른 방법이었다.
사회적 특권은 (행운이나 타고난 운명이기 이전에) 시점의 선택, 곧 운동의 궤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에서 교통로, 강, 바다, 도로, 다리의 관문을 장악하고 조직할 수 있는 상대적인 위치의 선택에 기반한다. 위의 책, 157쪽.


6. 생체적 운송장치에 대한 검토

공격은 외적 측면에서 신속한 죽음을 요구하는 반면 내적 예비 단계에서는 느린 죽음을 부과한다. 현대의 생태학적 전쟁은 주민들의 주변 환경을 파괴해 그들을 천천히 죽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신기하게도 원시적이고 ‘인종적’인 의미에서의 ‘영혼’, ‘마나’를 회복시켜준다. 162쪽. 마나 : 주변 환경과 구분할 수 없을뿐더러 개별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이며, 갖가지 형태를 띤 유동적 형태인 동시에 사회적, 동물적, 영토적 신체의 여기저기 응고된 채 존재하는 잠재적 실체.

질주학적 진보는 공간 위치에 종속된 두 종류의 신체라는 관념을 강요함으로써 두 종류의 영혼이라는 관념까지 강요한다. 하나는 환경에 의존하므로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영혼, 또 하나는 자신을 탈영토화할 수 있어서 자신의 ‘마나’를 손닿지 않는 곳에 둘 수 있기에 강하기 그지없는 영혼이다. “전쟁은 우리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다.”라고 한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의지 없는 신체가 창출되어 ‘세계 내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일군의 노동자 무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운동할 수 없는 침략자의 상대적 무능력과 침략자의 이동-권력 사이에 놓인 지워지지 않는 분할을 사유하게 된다. 162-163쪽.

군사 폭력의 경제는 인간이라는 가축을 사냥꾼-침략자가 훔쳐간 고대의 양떼, 어린아이, 여성, 유색인, 프롤레타리아에 비유하게 한다. 총력전을 펼치면서 내부에 유태인, 집시, 노예라는 낯선 신체를 적대시하는 사회적 전선을 그었을 때, 나치가 한 일도 바로 이것이었다. 나치의 수용소는 이 가축들을 산업적으로 다루는 실험실에 불과했다. 163쪽.

강제수용소와 굴라크가 주는 교훈은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현상 아니면 정적 현상 즉 감금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와 굴라크가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 이유는 태곳적 사회 격투사 같이 어마어마한 수의 길들여진 신체를 보란 듯이 역사에 재등장시켰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완벽하게 길들여진 범주, 엔진을 끌고 가는 다산 계급, 병참학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설화에 현존하는 유령. 165쪽.

9세기 서유럽 대장에 기록된 인구 중 16퍼센트가 채 못 되는 병적 일탈자forenses들의 존재가 언급된다. 고용 보장 없이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던 이주 노동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오늘날 도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잉여는 애초에 봉건적 통제 방법이었으나 곧 코뮌적·사회적 통제 방법이 됐던 현상, 즉 앞서 언급한 전략적 감금이라는 현상의 직접적 산물이 됐다. 165쪽.

실제로 요새의 유기적 기능은 일종의 한계 즉 주민의 수와 확장 영역의 한계를 설정할 때에 유지될 수 있었다. 165쪽.
중세에 무장한 사회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공민의 공간의 사라진다는 것, 공간에 대한 서민의 권리와 자격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166쪽.
“아크로폴리스(도시 내 성채)는 과두정과 군주정에 적합하며, 평평한 평원은 민주정에 적합하다. 그러나 귀족정에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요새가 낫다.”(아리스토텔레스) 이렇듯 정치가 지형의 문제가 된 이래로 시민의 평화를 구가하던 민족을 끝내버린 진정한 개벌, 즉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벌을 보게 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거주한다는 것”이라면,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6쪽.

중세 요새들은 전쟁기계를 작동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했던 영구적인 사회적 거부(배제)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향한) 원시 시대의 환대와 신성하기 그지없었던 고대의 수용력을 없애버린다.
잉여 인구는 일종의 의무인 원정이라는 운동 속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공위의 질서에서 거부된 수많은 신체들은 미지의 장소, 눈에 띄지 않는 지대, 전략적 도식의 무한한 틈새를 이동하는 육체적 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의 이동은 위험천만한 순례, 어린이 십자군이나 가난한 자들 또는 “일자리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 건장한 걸인들”의 고통스런 운동이 되어버렸다. 167-168쪽.

노상강도들은 순환한다. 이들은 교통로를 배회한다.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옮기기까지 해야 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기 때문에, 교통로야말로 이들의 계급적 공간이다. 169쪽.

태곳적 이래 군사적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경로는 이주자들의 궤적과 종종 섞이면서 나란히 나아갔다. 국적 없는 노동력을 점점 더 많이 신규 모집한 까닭에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최초의 병참학적 우회로를 보게 된다. 이런 궤적을 따라서 임시 막사를 건설했고, 마을 주민들은 침대를 제공했다.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에도 불확실한 생활 조건에서 살다가 또다시 군인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자들에게 필요했던 호스피스 같은 보건 시설도 갖춰 놓았다. 172쪽.

이 호전적인 ‘순방 순례자들’이 호스피스나 검역소에 잠시 머무는 것 같은 일시적인 정주는 일종의 사회 문제가 됐다.
오랫동안 군사적 프롤레타리아트화의 사회적 요구는 봉급, 직업 안정, 병자와 부상자에 대한 현장 보조 같이 간단할 뿐 아니라, 극히 중요한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10년까지도 미뤄지기도 한 봉급 지불에 대한 한정된 파업 형태인 폭동과 항명이 흔했다. 항명자들은 자율적으로 전투 집단을 조직하며, 민주적인 평의회의 지원을 받는 대장을 선출한 이후, 프롤레타리아 부대는 곧장 자신들의 주요 요구를 내건다. 이 군인들은 자신의 고용인들에게서 양보를 받아낼 때까지 요새를 점령하거나 장악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제한된 반란은 정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기적 봉급 지불을 보장해주는 식으로 상습적 탈영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시에는 이처럼 국고의 돈을 사용해야만 군대의 목표가 간신히 성취될 수 있었다. 그 나라 사람이든 이웃나라 사람이든, 방랑자들은 과거나 출생을 불문하고 발견되는 족족 군대로 편입됐다. 이 당시에는 뭔가 일을 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지역을 장악한 침입자 아니면 약탈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73쪽.

바뵈프와 엥겔스 이래로, 프롤레타리아 병사들의 육체적 역학, 전쟁기계에 복무해 일정 횟수의 협력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그들의 의무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훗날 사람들은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조건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173쪽.

유괴나 납치, 이것이야말로 질주관들의 전통적 수법이다.
프랑스에서는 한 해에만 3만 2천 건의 유아 유기가 발생하고 어린아이 30명 중 한 명이 시민의 지위 즉 자기 정체성을 박탈당했다...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특정 지리를 차지하는 집단에서 배제되어 이동 중에 있는 궤적 안으로 떠밀려 나간다는 것, “아직 이성을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를 도로에 내던지는 것과 관련 있다. 175쪽.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에 의해서도 똑같이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는 ‘기계적’이며 순수한 동력과, ‘자유로운’ 동력은 다르다. (프롤레타리아의 신체를 지배하는 영혼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지이며, 이러한 지배를 받는다는 점은 동물이나 인간이 다를 바 없다. 비릴리오는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어떻게 ‘자유로운’ 동력이 될 수 있는가.)
동물들이 희생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대역’ 배우였던 도미니크 자디는 <동물들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수아르>> 신문에 기고했다. “조연들은 (동물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동물도 내가 해왔던 것 같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동물, 여성,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절대로 다치게 한 적이 없다. 사람들도 다 알고 있듯이, 이들도 모두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박탈당한 대역 배우의 신체는 같은 처지에 놓인 여타 가축들의 신체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고대 사회의 경우, ‘여성 노예’의 결혼을 둘러싼 거래와 의식은 두 집단 간의 동물 교환과 똑같다. 군대와 경찰에는 아직까지 동물-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고 있다. 예) 보병들이 전투용으로 훈련시킨 군견대가 계속되고 있으며, 바다 포유동물들이 활용된다. 중세 때에는 말이라는 운송장치-신체가 발사체와 똑같이 취급됐다. 코끼리 신체는 돌격대/불도저/견인차로, 황소, 낙타, 노새의 신체는 모든 지형을 넘나드는 운송 장치로 다뤄졌다. 사회 엘리트들만이 보유할 수 있었던 비둘기는 운반체로서 자신의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일삼았다. 177쪽.

자신의 정체성을 박탈당한 방랑자들과 살아있는 시체들의 신체에 깃든 채 그들의 신체를 점령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은 타인의 의지라는 확신이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프랑스의 경우, 1791년 8월 법안은 토지 소유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도록 함으로써 이런 경향을 더욱 악화시켰다. 방랑하는 신체는 늘 뭔가를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다.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도 그렇게 여겨졌다. 179쪽.

여기서 우리는 (장벽 없는 바다와 전쟁이라는) ‘자유로운 이성’의 사회적·정치적 중요성을 보게 된다. 무지한 신체들은 비이성적이며 그들에게는 순수하고 단일한 이성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관점, 자본주의에서보다는 덜 하지만 맑스주의 조직 구성도에서도 충실히 재생산되고 있는 이런 진술과 관련해 지니는 중요성을, 질주정적 권력이 도래하면서 우리는 태곳적의 윤회가 도착적이 되어 가는 광경을 보게 됐다. 개인이 등장함으로써 영혼은 이성, 즉 우리의 행동, 우리의 운동, 심지어 우리의 운명 전체를 규정하는 법칙의 소재지가 되어갔다. 179쪽.

(성경에서 그렇듯이) 육체에 있어 이성은 죽음의 형태이다. 신체는 그 거주자가 항상 주의를 기울이거나 불안한 마음으로 거주해야 하는 빈 집, 될 수 있는 한 불편하도록 만들어진 집이다. 신체는 또한 생체적 운송 장치이다. 게다가 우리가 신체에서 쫓아내려는 유사 악령은 ‘조종자’의 자리를 점하면서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지성적 존재다.
이 ‘지성적 존재’는 텅 빈 신체에 상황에 알맞은 몸짓을 취하라고 명령하면서, 그곳에 거주할 수 있도록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토지를 개간하는 사람이 정복자로 바뀌었을 때 시적이었던 영혼의 윤회는 정복에 그 자리를 뺏긴 채 사라진다. 생체적 운송 장치를 합리적으로 점유해 그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일종의 해적 행위이다. 정신분석학은 “심령론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중요한 침투 수단”이다.
해적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일군의 침략자들이나 불량배들, 군사적 수도사들은 죽음과 공포에서 희열을 찾았다. 사실상 그때 이후로 사회의 군대화가 모든 시민을 일종의 전쟁기계로 만들어버렸다면, 군인-수도사는 이에 관한 한 일종의 본보기이자 선구자였을 것이다. 자연, 시간, 공간, 자신이 포기해버린 사회적/인간적 조직 안에 자기 스스로를 금욕적으로 가둬두는 관례, 개인적 취향과 정체성 포기는 하이데거가 말한 기술 혁명의 허무주의를 예견한 것이다. 수도사는 양심의 ‘지휘자’가 부리는 운송장치가 된다. 금욕주의는 종교적 발명품이 아니라, 군사적 발명품이다. 184쪽.

갖가지 사례에서 정복자들과 전사들은 사제들의 기능을 도착적으로 뒤집어놓은 듯한 기능을 요구해왔다. 성경에는 유태-기독교도들에 관한 언급들이 모두 다 들어있다. 전사는 타락한 사제이다.
사제(마법사)와 가부장(그리스어 파트리아르케스. 창조자, 발견자, 무엇의 기원이 되는 자라는 뜻)의 중요성은 신/자연과 일종의 교환 관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며, 신/자연의 변덕과 폭력을 누그러뜨리는 그들의 능력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경험주의 덕택에 자신이 바친 제물, 즉 토지에 대해 치르는 지대를 신/자연이 받도록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이다. 186쪽.
‘이방인’이 등장해 재화 교역이 지중해 연안에서 제도화되었을 때, 양자 사이에 물리적 접촉 없이도 교역이 이뤄졌다. 거래 물품을 해안가나 도로 주변에 두면 이방인이 그것을 집어간 다음 그곳에 지정된 대가를 두고 간다. 식민지의 부두 창고와 자유항은 아직도 이런 식으로 군사적 약정 외부에 존재하는 교환 과정을 재생산한다. 이와 같은 전사, 질주정적 암살자, 교차로-도시 창시자는 역사의 여명이 떠올랐을 때부터 토지에 치르는 지대를 가차 없이 거두는 데 자신의 모든 노력과 지식을 기울였다. 무장 세력은 언제나 군사적 점령세력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전사가 타락한 사제로 등장하게 된다... 핵 억지의 원칙은 전략적 공식일 뿐 아니라, 육지 거주자들이 마지막으로 지대를 치르게 만드는 것, 협정(한계나 종말)에 이르도록 만든다. 186-187쪽.

핵으로 인해 유폐된 전사들은 유폐된 주민들에게 막대한 지대를 요구하는 위치에 서게 되므로, 군사적 보호자이자 세금 징수자인 이 영웅의 기능은 제한될 수 없으므로 클라우제비츠의 이해처럼 ‘인간들의 교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전사나 군사적 수도사가 대지의 호의를 이처럼 악용한다는 것은 자신을 도구로 쓸 뿐인 국가의 이름으로 토지와 부를 획득하거나 축적하는 것이자 자기 자신을 무한정 끊임없이 능욕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은 설립하는 것을 원하지 소유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복은 탐색으로, 몸짓은 운동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침략자의 움직임은 운동선수, 마침내 1초의 몇 분의 몇으로 자기 기록을 경신해 나가는 올림픽 승리자의 움직임과 닮아있다.
질주광에게 엔진은 자신을 생존케 해줄 인공보철물이다. 예컨대 생체적 운송장치가 기계적 운송장치로 뒤바뀌어 가던 역사적 진화 과정의 교체점, 곧 동물적 신체의 윤회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등장한 최초의 자동차, 조제프 퀴뇨가 1771년 군사용으로 만든 운반차가 증기를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0쪽.


7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종말

질주정적 진보의 마지막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종말, 시간의 전쟁 속에서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는 단계이다. 괴벨스나 엥겔스의 정의를 되새겨 본다면, 투사, 노동자 계급의 프롤레타리아트화는 군사화의 한 형태, 그것도 일시적인 형태일 뿐이다.
1914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동 능력과 정치적 능력은 유럽의 전장에 부응하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교통로, 라디오, 전화, 텔레비전 같은 매개체에 의해 사방에서 꿰뚫려 몰락하고 있으며, 순식간에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자본가들조차 노동자 계급에게 구애를 보내고 도움을 간청하던 시기가 종말에 다다랐다. 그때부터 이전의 길들여진 종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라는 동물적 신체의 가치도 절하됐다.
핵무기는 필연적으로 전세계 모든 국가의 정치 체제를 뒤바꿔놓을 것이다. 우리는 억지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폭발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국가 영토의 보전을 책임져야 할 수장에게 제기된 문제들이 더 중요하다. 폭탄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얼마나 빠르게? 우리가 즐겨 말하듯이 폭탄은 정치적이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폭발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폭탄 자체가 군사적 감시의 궁극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다.
질주정 사회와 그 사회의 식민지를 이해하려면, 사회적 저작을 읽는 것보다 식민지 조약의 흑인 단속법을 읽어보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 흑인 노예는 동산으로서 일종의 이동가능한 재화였다. 207쪽 각주.

미디어는 사회를 확고히 결속시켜 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 자체를 보장한다. 미디어만으로도 미국식의 범인간주의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을 통제할 수 있다. 미디어는 사회를 확고히 결속시켜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 자체를 보장한다. 인종차별은 미국이란 나라가 자신의 권위 자체를 기대고 있는 체제의 미디어 헤게모니를 가능케 해주기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라디오 메시지 송신이 지연된 진주만 사건에서 마이크로폰을 사용한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이나 케네디 암살에 이르기까지 목록을 작성해야 할 정도로 많은 미국의 내적, 외적 대격변이 질주학적 사건들이라는 사실을, 즉 침투와 전송의 기술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팝-문화에는 신체와 영혼의 기술이 기이할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켜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 없는 신체는 기계적 인공 보철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신체이다. 1920년대부터 전개된 미디어의 탈중립화는 흔히 ‘내수 시장을 둘러싼 전쟁’, 가구를 “소비 상품의 무한한 저장소”로 불러내거나 재발명하기 위해 대규모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의 길을 닦았다. 이 캠페인으로 미국 시민들은 매우 신속하게 동물로 길들여졌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국 영토에 진정한 복지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부장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안락함의 문명이 가사 로봇에서 정신의학 사업이나 최신형 자동차에 이르는 기계를 활용한 신체의 보조를 통해서 사회적 보장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늘날 이 나라는 파시스트적인 미래주의가 꿈꿔왔던 초인적 신체, 즉 특정 기관을 기계로 만든 이식 조직으로 대체해놓은 인간의 신체를 되살려 내려는 낭만적인 취향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존속을 추구하는 정치가 안락함의 정치를 폐기처분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이 자신들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됐다. 미국의 이상적 소비자라는 몽타주, 라디오 신문 텔레비전 영화 등을 통해 삶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 버릇, 태도가 쉴새없이 방송되어 곧 그러한 상업적 메시지에 파묻혀 버리게 될 사람, 즉 시민의식을 지닌 사람의 본보기와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말이다.
1975년 <삼각 위원회>는 사회적 동원을 해체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또다시 언급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침묵하는 다수를 자랑한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

모든 위대함은 습격에 있다!
처음부터 나치는 습격하는 인간의 눈부신 신체, 태어날 때부터 금발이었던 아리안족의 신체를 곧잘 과시하곤 했다. 베를린 경기정에서 열린 올림픽 제전 축하식은 침투 속도에 따른 신체들의 위계질서를 보여줬다. 속도나 거리의 기록에 흥분한다는 것은 습격에 흥분한다는 것과 같다. 시간과 공간에서의 초읽기라는 운동 경기의 원리는 느린 속도로 질서정연하게 행군을 시작했다가 점점 더 강력히 신체를 가속해 마지막 폭발로 나아가는 군사적 돌격의 ‘절대적 위대함’을 추구하는 경주(질주)의 극화일 뿐이다.
나치가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만천하에 공개된 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시즘이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직면하게 됐다. 그럴 지도 모를 일이다. 파시즘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에 새삼 부활할 필요도 없다. 다만 파시즘은 해양 제국이나 식민지 건설처럼 서구 질주정이 이룩했던 가장 뛰어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확실히 파시즘은 명칭을 제외하고는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공산주의보다 ‘미래’를 덜 두려워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은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패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살아 있다. 총력전, 그 뒤로는 총력적 평화가 새로운 공간적 시간적 과정과 칸트적 세계의 역사적 우주 안에서 거대한 국가 조직(군대, 생산력)의 사령부를 차지해왔기 때문이다.

8장 안전의 소비

유폐된 부르주아지의 육중한 모델이나 답답하기 그지없는 맑스주의적 총동원령 (표면적으로 본다면 재화, 사람, 사상의 운동을 둘러싼 계획된 통제)의 독특한 도식을 보건대, 서구는 오랫동안 병참학적 위계 질서의 다양성을, 국가의 부가 자동차, 여행, 영화, 공연 등에 투자되는 유토피아를 거부해왔다. 일종의 발사체나 즉석 정보 은행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는 냉전의 전략에 종속되어왔다. 군산 복합 민주주의는 낙오자, 비트 세대, 자동차 운전자, 이주 노동자, 여행객, 올림픽 우승자나 여행 안내업자 등 일체 사회적 범주를 아무런 구분 없이 속도의 질서에 종속된 무명의 병사로 만들어버렸다. 보행자에서 로켓에 이르기까지, 생체적인 것에서 기계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점점 더 많이 통제하게 된 속도의 위계질서에 종속된 무명의 병사로.
안전이라는 필요를 위해서 조직된 사회적 신체들이 필요하다. 민간적 사회적 보호는 더 이상 재앙과 동시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수행되며, 필요하다면 발명된다.
사실상 정부가 이처럼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방식으로 안전에 대한 필요를 교묘하게 조작해내는 것이야말로 핵 전략이 오늘의 민주주의에 새롭게 불러일으킨 온갖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이다. 안전(보호)의 소비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비는 불안감이라는 발명된 공동의 감정이 이끌어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정치에, 소비나 안락함을 사회적 안전에 밀접하게 결부시켜 왔다. 그렇지만 이런 경제적 운동의 이면에는 원조가 놓여있다. 무능한 신체의 허약함은 군사적 노동자를 창출하라는 요구를 통해 사회적으로 튼튼해졌다... ‘사회적 안전’을 새롭게 조장한 사람들이 사회적 안전을 총력전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사회 사업을 재분배한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 그리고 장애자 올림픽의 기록에 주목한다. 우리는 움질일 수 없는 육체의 무능력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새로운 믿음을 강요한다. 또다시 정말 이상하게도, 군대는 이런 박애주의적 행위 뒤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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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공지] 요나하 준, 『헤이세이사』 첫 세미나 참가자 모집! ― 12월 09일 토요일 오전 10:00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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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님들께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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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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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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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09/30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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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4장 - '어느 자유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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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5장 -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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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3장 -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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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09/16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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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09/02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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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장 -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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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08/26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첫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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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공지]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첫 세미나 참가자 모집! ― 08월 26일 토요일 오전 10:00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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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06/03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세미나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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