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인간의 조건>, 11~14절(155~189쪽)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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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the
작성일
2019-02-16 11:21
조회
952
20190216 정치철학 고전 세미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55~189쪽, 발제자: 홍원기

제3장 노동

11. 우리 신체의 노동과 우리 손의 작업
1. 노동과 작업의 구별은 생소: 이 구별을 지지하는 현상적 증거는 매우 분명해서 무시할 수 없음.(156)

2. 고대에 이 구별이 간과된 이유는 분명: 원래 노동에 대한 경멸은 필연성에서 벗어나 열정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노력과 어떤 흔적이나 업적, 기억할 만한 위대한 일을 남기지 않는 모든 수고에 대한 성급한 조바심에서 생겨남. 그런데 폴리스의 생활이 시민들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게 되고 또 정치활동 외의 모든 활동은 삼가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경멸은 확대. 마침내 육체적 수고를 요하는 모든 일이 그 대상이 됨.(157)
2.1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수행하는 신체의 노동은 노예적이라는 확신. 육체노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수행되는 직업들은 모두 노동의 지위와 같음.
2.2 정확히 이 이유 때문에 노예제는 옹호되고 정당화됨. 노동하는 것은 필연성에 의해 노예가 되는 것. 이런 노예화는 인간 삶의 조건에 내제.(161)
2.3 원래 고대의 노예제도는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이윤착취의 수단이 아니었음. 노예제도는 노동을 삶의 조건에서 제외하기 위한 시도. 사람이 다른 형태의 동물적 삶을 공유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음.(161)

3. 정치이론의 발생과 함께 철학자는 관조를 다른 모든 활동과 대립시킴으로써 활동들 사잉의 구별을 없앰. 심지어 정치활동조차 필연성의 지위로 평준화됨. 이제 필연성은 활동적 삶에 고유한 활동들의 공통분모가 됨.
3.1 기독교 정치사상은 철학자의 구별을 수용하여 세련되게 만들었고, 소수를 위한 철학과 달리, 만인을 위한 종교는 모든 인간의 삶을 구속할 수 있는 보편적 타당성을 그 구별에 부여.

4. 근대가 노동하는 동물과 호모 파베르, ‘신체에 의한 노동과 손에 의한 작업’, 이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는 하나의 단일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
4.1 대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조금 후에 숙련 작업과 비숙련 작업, 마지막에는 신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별을 발견. 마지막이 가장 근본적인 구분으로 간주.(162)
4.2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만이 문제의 핵심을 찌름.
4.2.1 근대에서 노동의 지위가 상승한 근본적인 이유는 노동의 ‘생산성’ 때문.
4.2.2 (신이 아니라) 노동이 인간을 창조하고 (이성이 아니라) 노동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한다는 마르크스의 불경스러운 생각은, 모든 근대인이 동의하는 바를 가장 급진적이고 일관성 있게 정식화한 것에 불과함.
더욱이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세계를 부유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에는 노동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듯이 비생산적 노동을 기생적(163)이고 일종의 노동의 왜곡이라고 경멸했을 때, 그들의 견해는 일반적인 근대의 의견과 일치.
4.3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에는 작업과 노동의 더 근본적인 구분이 포함.(164)

5. 노동생산물이 아무리 무상하고 지속성이 없다 할지라도 노동활동 자체는 역사적 환경에 상관없이 그리고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에서의 지위와 무관하게 ‘생산성’을 보유.
5.1 노동생산성은 노동의 생산물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에 있음. 인간의 힘은 자신의 생계와 생존수단을 생산하고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 즉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할 수 있음. 노동생산성을 설명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인간 ‘노동력’의 잉여이기 때문.(165)
5.2 노예사회에서는 폭력을 통해, 마르크스 시대에서는 착취를 통해 몇 사람의 노동이 모든 사람의 삶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노동력은 유통됨.

6.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노동은 ‘생산적’으로 보여야 했음. 노동과 작업의 구분은 타당성을 상실.
6.1 이 관점에 준거한 틀 안에서 모든 것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166)
6.2 모든 작업은 도동이 될 것. 모든 사물은 세계적이고 객관적인 실재로 이해되기보다 노동력의 결과물이자 삶의 과정에 작용하는 기능으로 이해되기 때문.

7. 숙련과 비숙련 작업, 정신노동과 신체노동의 구별이 고전 정치경제학이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함. 노동의 생산성과 비교할 때 이 구별의 중요성은 부차적.
7.1 분업은 숙련노동을 완전히 폐지하는 경향을 지님. 분업으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것은 이제 개인의 기술이 아니라 ‘노동력’.(167)

8.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다름.
8.1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를 이어주는 끈은 노동과정. 후자의 노동과정은 정신에 의해 수행되고, 전자는 신체의 다른 부분의 사용을 통해 이루어짐.
8.2 두뇌의 활동으로 여겨지는 사유는 생명 자체와 함께 끝이 난다는 점에서 노동과 비슷하지만, 노동보다 덜 ‘생산적’. 노동이 어떤 영속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사유는 구체적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음.
8.3 사유는 혼자만의 힘으로 어떤 대상을 물질화하지 못함. 이때 작업은 그 자체로 항상 물질적인 것을 필요로 하며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여 수행됨. 정신적 작업이 가지는 특수한 작업적 특성은 모든 다른 종류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우리 손의 작업’ 덕분에 얻어짐.(168)

9. 근대의 조건에서 모든 직업은 사회에 대한 ‘유용성’을 증명해야만 했고 지성인들도 자신을 노동인구로 생각해주기를 희망함.
9.1 외견상 이런 발전과 모순되게도 이 사회가 어떤 ‘지식인’ 업적을 필요로 하고 존중하는 정도는 로마제국의 쇠퇴기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만큼 높았음.(170)

12. 세계의 사물성
1. 고대이론에서의 노동에 대한 경멸이나 근대이론에서의 노동예찬은 모두 노동자의 주관적 태도나 활동에 방향을 맞춘 것으로,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노고를 불신하거나 노동생산성을 찬양했음.
1.1 마르크스: 노동생산성은 삶의 과정이 자기 재생산을 위해 제시하는 요구와 비교하여 평가됨. 노동생산성의 근거는 노동력에 내재하는 잠재적 잉여에 있지, 노동이 생산하는 사물의 성질이나 성격에 있지 않음.(171)

2. 노동과 작업의 구별은 생산물의 세계성 즉 그것의 지위와 기능 그리고 세계에서의 지속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정도의 차이가 돼버림: 빵과 탁자.

3. 세계의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간주되는 작업생산물: 지속하는 사물의 세계 안에서만 우리는 생존수단인 소비재를 발견.
3.1 소비재: 인간의 삶의 위해 존재. / 사용물품: 인간의 세계를 위해 존재.(172)

4. 소비재와 사용물품 모두와 구별되는 행동과 언어의 ‘생산물들’: 인간관계와 인간사의 구조를 구성. 그 자체로는 구체성을 갖지 못하며, 소비를 위해 생산하는 것보다 덜 지속적이고 더 무상함. 그 실재성은 전적으로 인간의 다원성에 의존. 행동과 언어가 하는 유일한 활동은 사유 활동.
4.1 행동‧언어‧사유의 공통점: 스스로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삶 자체만큼 무상. 그것이 세계의 사물이 되려면 보이고 들리고 기억될 수 있어야 하며, 사물로 변형되어야 함.(173) 따라서 실재성을 갖고 물질화되려면 인공세계의 다른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활동 필요.

13. 노동과 삶
1. 모든 구체적 사물 가운데 수명이 가장 짧은 것은 삶의 과정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 생산되자마자 소비됨. 세계성의 관점에서 가장 덜 세계적인 동시에 가장 자연적.(174)

2. 자연과 살아 있는 모든 사물이 강제로 떠밀려 들어가는 자연의 주기적 운동은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함. 인간 존재의 탄생과 죽음은 단순히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됨. 탄생과 죽음을 전제하는 것은 부단한 운동 속에 있지 않지만 그 지속성과 상대적 영속성 때문에 나타남과 사라짐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

3. 인간적 삶의 주요 특징: 삶 자체가 언제나 사건들로 가득하다는 점.(175) 단순한 생명(zoe)와 구별되는 비오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종의 행위’라고 말했음.

4. 자연의 순환운동이 성장과 부패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세계뿐.
4.1 타생과 죽음처럼 성장과 부패도 자연적 사건이 아님. 인위적 세계로 들어갈 때에만, 자연과정은 부패와 성장이라는 특징을 가짐. ‘이 강아지’ ‘이 나무’처럼 자연의 산물들을 개별적 사물로 생각할 때에만 그것들은 성장하고 부패하기 시작. 이는 그것들에게서 ‘자연적’ 환경을 제거하여 우리의 (인위적) 세계로 집어넣는 것을 의미.
4.2 대상이 완성된 기존의 사물세계에 보태질 때 끝나는 작업과는 달리, 노동은 늘 똑같은 순환 속에서 움직이며, 이 순환은 생명유기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규정된다.(176)

5. 마르크스가 ‘인간이 자연과 행하는 신진대사로서’ 노동을 정의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의 재료들은 인간의 욕구에 맞는 형태로 변형되어 노동이 스스로 그 주체인 인간과 통합된다”라고 정의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생리학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노동과 소비는 영원히 반복되는 생물학적 과정의 순환에서 두 단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음.(177)
5.1 마르크스: 노동하는 동물―“인간의 자신의 생계수단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기 시작한다” / 작업―“최악의 건축가외 최고의 벌을 구별하는 것은 건축가는 건축물을 실제로 세우기 전에 건물의 구조를 상상 속에 미리 세운다는 점”(178)

6. 노동과 소비는 모두 물질을 파괴하여 게걸스럽게 삼키는 과정.
6.1 노동활동의 이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측면은 오로지 세계의 관점에서만 그리고 작업과 구별하여 관찰할 때만 드러남. 작업은 신체와의 결합을 위한 물질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원료로 변화시켜 생산품을 만들어냄.(179)

14. 노동과 다산성
1. 가장 미천한 지위에 있던 노동이 인간활동 가운데 최상위의 지위로 갑작스럽고 눈부시게 상승. (로크,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1.1 마르크스만이 가장 강력하게 일관성 있게 노동이 최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능력이라고 주장.
1.2 노동은 실제로 가장 자연적이지만 가장 비세계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특히 마르크스는 모순에 빠짐. 이 모순의 가장 간단한 해결책 또는 이 위대한 이론가들(180)이 이 모순을 의식하지 못했던 가장 명백한 이유는 그들이 노동을 작업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노동은 이들에 의해 작업만이 가지는 능력을 부여받음. 이런 노동과 작업의 동등화는 결정적인 불합리성을 낳음.

2. 로크는 ‘단기적 물건’(비내구재)만을 생산하는 노동의 명백한 불명예를 없애기 위해 화폐를 도입해야 했음. 이것이 없다면, 삶의 과정에 예속된 노동하는 신체는 결코 소유와 같이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것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 실제로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정의한 마르크스조차 노동의 생산성은 사물화, 즉 ‘객관적 사물세계의 건설’과 함께해야만 시작된다는 것을 인정.(181)
2.1 로크가 ‘우리 신체의 노동과 우리 손의 작업’이라는 자신의 구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내구재’와 ‘망가지지 않고’ 매우 오래 ‘지속하는’ 것들의 구별은 인정해야 했음.

3.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즉 자신의 중심사상에 대한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애매모호하고 이중적.(183)
3.1 노동은 ‘자연이 부여한 영원한 필연성’이자 인간 활동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활동. <-> 혁명의 과제는 노동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 노동을 철폐할 때에만 ‘자유의 영역’이 ‘필연성의 영역’을 대신할 수 있음.
3.2 즉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정의한 다음. <-> 이 인간을 바로 그의 가장 위대하고 인간적인 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로 인도한다는 것.
3.3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을 제거한다.” <->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동물과 구별한다.”(184)

4. 17세기 이후 정치이론가들이 직면했던 현상은 전대미문의 성장과정, 즉 부와 소유 그리고 소득의 성장과정. 진행하는 ‘과정’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가짐.
4.1 모든 인간 활동 가운데 행위나 작업이 아닌 노동만이 삶 자체와 일치하고 또 의사결정과 인간에게 유의미한 목적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진행됨.
4.2 마르크스의 이론 전체가 다산적 삶의 과정의 두 양식인 노동과 생식의 이해에 근거함.(185) 노동생산성의 참된 의미는 생산성과 다산성의 동일화에 근거를 둠.(186)

5. 노동에 내재하는 삶 자체의 축복은 작업에서 발견될 수 없으며, 이는 일을 성취할 때 찾아오는 잠깐의 안도감이나 기쁨과 혼동하지 말아야 함.
5.1 ‘최대다수의 행복’: 노동하는 인간의 기본적 현실을 하나의 ‘이상’으로 개념화.(187)

6. 삶의 힘은 다산성. 유기체가 자기 재생산을 위해 힘을 다할 때, 그는 소진되지 않음. 유기체의 ‘잉여’는 잠재적인 증식에 있음.
6.1 마르크스는 오직 이 과정 자체, 즉 모든 동물 종의 삶처럼 생산과 소비가 늘 균형을 이루는 ‘사회의 생산력’ 과정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삶의 소비과정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그것에 저항하는 세계적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문제는 그에게는 발생하지 않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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