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10/18 『프루스트와 기호들 』 제 2 장 기호와 진실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10-18 18:34
조회
400
! 이번 주 발제는 sungwoo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홈페이지 가입에 문제가 생기셔서 제가 대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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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 기획세미나, 삶과 문학. ∥2019년 10월 18일∥sungwoo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서동운, 이충민 옮김, 민음사, 1997. p.39~52

제 2 장 기호와 진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곧 진리를 찾는 과정이며, 진리는 근본적으로 시간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프루스트의 진리 찾기가 어떻게 정의되는 지 또는 어떻게 철학에서의 진리 탐구와 대립되는 지를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우선 들뢰즈는 진리란 친화성이나 선 의지를 통해 찾게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사유는 자발적으로 진리를 알 고자 하는 선한 본성을 자연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 오직 기호가 자극할 때만, 그 자극에 대한 사유는 그 기호에 대한 해석을 시작한다.” 이러한 인식은 프루스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된다. 참된 것에 대한 의지가 처음부터 생겨나 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오데트에 의 해 질투로 고통받는 스완이 그러하다. “그녀가 딴 남자와 함께 자신의 착각을 비웃고 있다고 상상했는데...그 순간 에 느꼈던 즐거움은 의혹이나 고통이 가라앉을 때와는 다른 즐거움, 즉 지적인 즐거움이었다...지금 그의 질투가 소생시킨 것은...진실에 대한 열정이었다.”(155) 들뢰즈는 ‘마주침’-사유자 앞에 우연히 나타나, 사유하고 진리를 찾게끔 강요하는 기호의 폭력-이 없는 철학적 관념은 가능성만을 주는 지성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근거없는 것 으로서만 머무를 뿐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진리는 선의지의 산물이 아닌,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 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외현적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란 어떤 사물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존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는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리 찾기가 항상 시간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기호들의 전개와 교차된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시간 자체가 복수적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복수의 시간성을 네 구조로 구별하고 있다. 먼저 존재들을 변화시키고(변질) 존재했던 것들 을 없애버리는(소멸)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측면에서 ‘잃어버리는 시간’ 으로 분화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우리는 ‘되찾는 시간’을 가지며, 영원성의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고 예 술의 기호이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기도한 ‘되찾은 시간’이 있다. 여러 기호들은 그에 상응하는 특권적인 시간 선을 가지면서도 불균등하게 여러가지 시간선에 참여한다.

먼저 들뢰즈는 시간 흐름 안에서의 변질과 소멸 즉 ‘잃어버린 시간’ 측면에서의 세 기호들의 특성들을 설명한다. 그 는 사교계의 기호들은 일시적이고 덧 없으며 공허한 성격을 지녔다고 말한다. “이 기호들은 자기가 변질되어 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미리부터 꼼짝 않고 고정되어 버린다.”(가면들의 전시장). 하지만 사교계란 매순간 변질되며 변 화 할 수 밖에 없다. “유행은 그 자체가 변화의 필요에서 탄생했으므로, 유행이 변화한다는 것은 당연하다.”(아가씨 들,433) 반면 사랑의 기호들은 변질과 소멸을 앞서가는 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감싼다고 볼 수도 있다. 들뢰즈는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자기만의 변질 과정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사랑이 끊임없이 사 라질 준비를 하고, 그 파국을 미리부터 모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나간 사랑들을 반복하는 것도 사실 이지만 우리는 현재의 사랑이 진행되는 순간에서도 파국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종말을 예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들뢰즈는 사랑이 미래를 향해 파국을 반복한다는 측면에서 질투의 장면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가 생겨나며, 사랑 의 세계는 거짓말을 드러내는 기호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감각적 기호가 ‘되찾는 시간’의 풍요로움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의 기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루스트가 신발과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얘기할 때가 그 한 예이다. “자기의 신발 쪽으로 몸을 굽혔다가 주인공은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을 느낀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며, 비자발적인 기억이 죽은 자기 할머 니에 대한 비통한 추억을 불러온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비자발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영 원한 이미지를 주지 않고 죽음의 격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지를 문제 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죄의식이 원인이 아니라 “주인공이 종종, 기쁨을 연장시키는 대신에 번민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양면감정”이 그 원인 이다. 들뢰즈는 이 양면감정을 감각적 기호 속에서 발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신발에서 비롯되는 느낌은 마들렌 의 경우에서와 같은 큰 행복을 체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바로 행복은 죽음과 무에 대한 확신에게 자리 를 내준다.” 다시 말해 들뢰즈는 기억 자체가 생존의 행복과 무라는 아주 이상한 모순을 함의한다고 말한다. 즉 기 억의 가능성으로서만 늘 머물러 있는 양면적인 특성이 있고 이 양가성으로부터 기호들의 열등함이 비롯된다.

다음으로 들뢰즈는 ‘잃어버리는 시간’ 즉 헛되이 낭비하는 시간의 기호들 속에서 사교계의 기호들, 사랑의 기호들 그리고 감각적 기호들을 설명한다. 다시 한번 그는 자발적인 의지가 노력해서 수행하는 노동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진리는 추상적인 가능성 이외에 별로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실은

헛되이 보내 버린 시간 안에 있는 것이며(들뢰즈의 내재성),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아닌 평범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도 “우리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부터, 가장 심오하고 가장 지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보다 기호의 측면에서는 더 풍부하게 된다.” 프루스트는 평범한 여성이 지적인 여성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풍족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불안전한 재료와 물질들이 기호 로서 더 풍부하고 그것들이 우리와 결합할 때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평범 한 여성은 이해가능하며 분명한 내용으로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해독해야만 하는 기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다. 이는 문자보다 상형문자가 우세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기호는 사전을 통해 배울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기호는 그 자체 관계에 있어서의 이질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비범한 걸작들이 전국 고교작문 경연대회 출신이나...아카데믹한 교육에서 나오지 않고 경마장과 고급 술집에 자주 출입하는 자들 쪽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웠다.”(알베르틴,607) 들뢰즈 는 ‘잃어버리는 시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에서도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프루스트는 이 진리 를 ‘지성의 진리’라고 부른다. 이 진리는 필연성이 결핍되어진 자발적인 선의지의 지성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에 서 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학자에게는 지성의 노동이 먼저이고 작가에게는 그것이 나중에 온다는 차이”가 있다.(되찾은 시간,880) 다시 말해, 어떤 기호의 강렬함을 체험해야하 고, 지성은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랑의 기호는 거짓과 질투의 기호이며 고통스럽고, 사교계의 기호는 보잘 것 없다. 하지만 들뢰즈는 “사교계의 가 장 하찮은 기호들이 법칙으로 환원되고, 사랑의 가장 고통스런 기호들이 반복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그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지성의 소관”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왜냐하면 놀라운 즐거움이 기억을 움직이게 하듯이, 고통은 진리를 찾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반복적으로 고통스럽게 하지만 관계가 깨진 그 사슬은 지성의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지성 덕분에 우리는 처음에 몰랐던 사실 즉 진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을 배우고 있었 다...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전 생애가...하나의 천직이 다.”(되찾은 시간,899) 결론적으로 각각의 기호들은 특권적인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다른 시간선에도 복합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되찾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역으로 작동한다. 들뢰즈는 이 모든 차원 들이 합쳐지고 진리를 발견하는 곳은 예술작품의 절대적인 시간 속인 ‘되찾은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진실 찾기의 집단들인 기호의 세계들은 진정한 배움의 선인 시간선들을 따라 펼쳐지는 것이다.


질문: 볼드친 문장과 대립되는 프루스트의 관점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름다운 책의 위대하고 경이로운 특징중 하나로, 저자에게는 ‘결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독자에게는 ‘독려’ 라고불릴수있을것이다.우리는저자의지혜가끝나는곳에서우리의지혜가시작된다는사실을아주잘느 껴서저자가우리에게대답을주길바라는데,그가할수있는건우리에게욕망을안기는것이전부다.그리고 그가 우리 안에 욕망을 일깨우는 건 자기 예술의 마지막 노력이 도달하도록 허락해준 궁극의 아름다움을 우리 가 응시하게 만들 때만 가능하다.”(독서에 관하여, 58) “우울증 같은 몇몇 병적인 경우에는 독서가 일종의 치료 법이될수있고,거듭되는독려를통해게으른정신을정신의삶속으로끊임없이끌어들이는임무를질수있 다. 그럴 때 책은 정신과 의사가 일부 신경쇠약 환자에게 하는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61) “독서들에 이어 지는 열광이 개인적인 개인적인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ᅵ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멋진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작가를여럿인용해볼수있다.에머슨은플라톤을몇쪽다시읽지않고글쓰기를시작하는일이드 물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 천국의 천국의 문턱까지 인도한 시인은 단테만이 아니다.”(65) “가장 위대한 작 가들은 생각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 시간에도 책과의 교류를 즐긴다.”(73) “아마도 우정은, 개인을 상대로 한 우 정은 변덕스러운 무엇인데, 독서는 하나의 우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지한 우정이다. 독서가 죽은 이를, 부재 한 이를 상대한다는 사실이 독서에 사심없는 무언가를, 거의 감동적인 무언가를 부여한다.”(78)

“다시말해우리가오로지내적상태에있게되면모든감동은열배나더커진다.소설가가쓴책은꿈과같은 방식으로,그러나우리가자면서꾸는꿈보다더선명하고더오래기억되는꿈으로우리를뒤흔들것이다.소 설가는한시간동안모든가능한행복과불행을우리마음속에서폭발시키는데,실제삶에서라면그중몇개를 아는데도몇년이걸리며,또그중에서도가장격렬한것들은너무도느리게진행되어우리지각을방해하기때 문에 결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도 있다.”(스완네 집 쪽으로,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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