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붕괴의 가속화, 감수성만큼 느린 봉기, 새로운 희망ㅣ한태준(동국대학교 영화학 석사생)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0:45
조회
869
붕괴의 가속화, 감수성만큼 느린 봉기, 새로운 희망

한태준(동국대학교 영화학 석사생)


* 이 글은 인터넷신문 『대자보』 2013년 1월 3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jabo.co.kr/sub_read.html?uid=33729&section=sc2&section2=


갈무리에서 프랑코 베라르디[비포]의 『봉기』라는 서평을 써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국내는 한참 대선의 열기로 뜨거워져 있었다. 나는 이번 대선을 통해서 가상화된 공간과 그 공간을 통한 인지계급의 연대에 대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판단은 착각에 불과했었고,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간극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깊었다.

사회는 점점 더 가속화되어가고 있고, 우리는 정보의 과잉과 범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 정보의 가속화로 꾸준히 제공되는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감각해진다. 노동자의 잇따른 자살에 우리는 이 사회가 지닌 토대의 불안정성을 체감한다. 기호로 제공되는 폭력의 기표들이 감정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고 과잉으로 제공된다. 사회적 불안정성 속에서 금융 이데올로기는 꾸준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성은 이 사회를 점점 가속화시킨다. 경쟁의 양상은 완전히 변하였다. 금융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시간의 경쟁을 통해 결정된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주식상황을 바라보는 샐러리맨에게 감수성은 쓸모없고 해로운 것에 불과하다.

이번 대선에서 SNS를 통한 연대의 실마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 했다. 하지만, 붕괴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친구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그와 연결되기도, 또는 차단하기도 한다. 관계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쉽게 깨어질 수도 있는 불확정성의 지대로 변모하였다. 시간이 파편화된 공간에서 연대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봉기』의 저자, 프랑코 베라르디[비포]는 정보의 가속화와 언어의 자동화가 이루어진 공간에서 시적 언어를 통한 감각의 재활성화를 주장한다. 그는 보드리야르의 저서를 통해서 현 시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들뢰즈와 가따리의 저서에서 그 판단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서에 서술된 맑스의 개념은 후기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 책에서 후기 근대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것은 금융 자본주의와 기호-자본주의이다. 금융 자본주의와 기호-자본주의는 서로 동떨어진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이며 자본주의적 추상 과정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3장에서 추상의 세 층위를 제시하고 맑스적 추상에서 디지털 추상과 금융적 추상이라는 두 가지 새로운 추상을 돌출해낸다. 디지털 추상으로 인해 정보가 사물의 자리를 차지하고 신체는 소통의 영역에서 물러난다. 금융적 추상에서 금융은 가치화 과정이 사용가치 단계를 경유하지 않거나 그 어떤 상품 생산을 경유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시와 금융에 관하여’란 부제가 의미하듯이, 이 저서는 금융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를 비교해가며 내용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영화를 전공한 개인으로서 영화<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언어적 에너지와 정서의 착취에 의해 마비된 사회체를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디지털 추상은 네트워크에서 가치화 과정의 서로 다른 국면들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기호-자본주의의 토대를 흔드는 네트의 집단 지성과 그 산물들의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이 영화 속 주커버크의 내적 심리-풍경을 고스란히 투영된다.

2000년, 닷컴 경제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가속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사회성이 가상적 추상화는 더욱 개인들을 파편화시켰다. 이런 사회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보이며 가상공간을 통해 금융의 공격은 더욱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각 개인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혀 부채를 떠맡고,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는 광기가 점점 확산되는 것을 조장한다. 부채에 허덕이는 다중들에게 도덕적 가치는 폐기된 지 오래다. 그들은 시대의 가속화에 맞춰 삶의 변화를 자신들의 눈에 보여주길 원한다. 신체 기간 중 눈은 여전히 그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가속화에 맞춰 다른 기관들은 배제되어 버린다. 이미지는 빠르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따라 갈수가 없다.

기호-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기호는 과잉되어 나타나고 의미는 점점 줄어든다. 우리의 주의력은 과잉 생산된 기호를 다 인지하는데 한계가 있다. 과잉 생산된 기호는 TV, 멀티플렉스(multiplex) 영화관, 인터넷 뿐 아니라 지하철, 전광판, 스마트폰 등 일상 내내 우리의 신체를 점유한다. 그것은 항정신성 약물처럼 강한 자극과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라는 뮤지컬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다. 이 영화 속에 묘사되고 있는 프랑스의 모습을 통해서 현 국내 정세와 어떤 희망을 바라보았겠지만, 거대 자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고, 할리우드 메이저 자본에 의해 배급되는 영화를 통해서 사회적 연대의 실패를 치유 받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그야 말로 병리적이다. 기호-자본주의는 자본이 되는 그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은 위안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 상황도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는데, 혁명에 실패한 마리우스는 자신의 토대인 기득권의 세계로 돌아가고, 장발장은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유를 노래할 수 있다.

금융 기호-자본주의는 개개인들의 특이성마저도 집단의 보편적 감정으로 대체해버린다. 하나의 거대한 보편적 감정만이 이윤을 창출하고, 다의성은 배제되어 버린다. 그 증거로 지난 5년 동안 소규모의 영화관들이 얼마나 많이 문을 닫고, 거대자본의 멀티플렉스가 얼마나 많이 시장을 독식했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붕괴의 가속화 속에서 저자는 카오스를 정교화하는 코스모스를 창조할 수 있는 감수성의 틈새인 리토르넬로를 주장한다. 그것은 시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시는 단어들의 기존 의미를 초과하는 아이러니한 행위이며, 아이러니는 해석의 무한한 과정을 함축한다. 『봉기』에서 저자는 아이러니와 냉소주의를 혼동하지 않도록 이 둘 사이의 개념에서 갈라지는 지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사회는 냉소주의자의 선잠이 아니라, 아이러니스트의 꿈을 지향할 것을 주장한다. 영화 쪽에도 예전부터 아이러니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려는 선각자들이 존재했다.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의 아이러니는 기표의 의미론적 가치를 유예하고, 기의의 독재로부터 공통의 자율에 도달시킨다.

사회적, 정치적 패배 속에서 감정은 사라지고 머리만 남은 자들의 냉소주의가 팽배한 사회이다. 냉소주의자들의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벗어나 수많은 가능한 해석의 문을 제시하고 서로간의 공감에 근거를 둔 아이러니스트가 좀 더 분발할 때이다. 그래야 금융 기호-자본주의로 가속화되는 붕괴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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