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논평문: 실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다른 공동체 구성에 관하여ㅣ조정환(『인지자본주의』저자, <다중지성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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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1:07
조회
1315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논평문: 실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다른 공동체 구성에 관하여

조정환(『인지자본주의』저자, <다중지성의 정원>)


* 이 글은 지난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오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출간기념 서평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양극화, 금융위기, 경제위기, 비정규화 등 위기와 분열 및 불안정의 심화, 그리고 그것의 삶의 위기로의 전화 속에서 사람들은 나/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무엇인가? 묻는다. 이것은 현재의 조건 속에서 개체적 생존의 경로를 찾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류로서의 인간의 진화 가능성의 문제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약의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한 모색방향의 하나는 더 치열한 경쟁, 경쟁력(스펙)의 제고를 통한 승자되기의 길이다. 개개인들에게서 이 길의 선택은 불가항력적인 강제로 주어지고 일종의 자동반응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의 방향은 이루어지는 것은 개체적 생존을 넘어, 아니 개체적 생존을 위해 뿌리, 기원, 집단적인 것, 위기를 헤쳐나갈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전자가 자유주의liberalism의 길이라면 후자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의 길이다. 이 두 개의 모색이 (서로 뒤얽힌) 노선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전 지구적 정치쟁점을 구성한다. 보수-진보의 부르주아 양당체제는 이 쟁점을 둘러싸고 회전하고 있다.(한국의 진보당의 민족주의적 부분은 새누리당을 대체할 잠재적 보수세력, 대안적 보수세력이다.)

2. 20세기의 볼셰비키 혁명과 국가자본주의가 러시아에서 19세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대체한 후, 그리고 1929년 공황으로 자유주의 원리가 전 세계적 수준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후 국가공동체의 논리(일국사회주의)는 하나의 지배적 원리로 자리잡았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케인즈주의라는 1930년대의 모색은 2차대전 후에는 공산당, 사민당, 보수당 등이 교체하면서 이끄는 동구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민족해방사회주의(권위주의적 발전주의국가)로 구체화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그 자원, 형성, 조직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차이보다 공통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는 범사회주의 시대로 정의될 수 있다.

3. 1968년 혁명은 이 국가공동체 원리에 대한 사회 밑바닥으로부터의, 아니 국가 밖의 비국민들로부터의 도전이 표현된 것이다. 공동체의 억압성에 대항하여 차이, 다름, 정체성, 다양성 등이 반범사회주의의 이슈로서 제기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이 도전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반혁명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공동체의 원리를 폐기했는가? 범사회주의와 대립했는가? 그렇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국가동체의 원리, 사회주의의 원리를 전 지구적 수준에로 확장했다. 복지, 민족, 국가 등의 사회주의 원리는 채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그 아래에 층화된다. 이것이 지구제국이다. 지구제국은 전 세계적 채무망(화폐통제)을 중심으로 정보적 사회주의(정보통제), 군사적 보호주의(핵통제)를 지구적 주권체제로 재조직한다. 자유주의는 공동체주의의 보완물로 배치된다.

4. 한국에서 20세기 사회주의(냉전 체제 하의 권위주의적 발전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통해 21세기 사회주의(신자유주의) 질서 속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이 발전의 문제를 지구적 수준에서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좌파 사회운동은 이것을 종속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민족해방사회주의(NLPDR)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념적 과거가 운동의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좌파적 퇴행은 김대중, 노무현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5. 한국에서 차이의 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위로부터 수입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지구질서 속으로의 급속한 편입과 더불어, 달리 말해 세계수준에서 범사회주의질서의 신자유주의적인 채무사회주의적 재편과 더불어서 대중의 생활 속에서 현실화되었다. 자유는 우리에게 자본의 자유로서, 자본인 개인의 자유로서 체험되기 시작했다. 동구사회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의 전환(이른바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는 선도하기보다 상황을 뒤따르며 그것에 적응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어 왔다.(방어적 적응)

6. 채무사회주의의 위기 속에서 다시금 앞에서 말한 두 번째 노선, 즉 공동체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국가공동체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자각이 가족공동체에 대한 향수로,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민족공동체, 교회공동체에 대한 추구는 가족과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지는 공동체 유형들일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흐름(경쟁과 승리)과 합류되는 것이 한류열광일 것이다. 이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을 반복한다. 고대적인 것, 중세적인 것, 근대적인 것.

7. <외로움>은 공동체에 대한, 특히 가족공동체에 대한 추구가 갖는 복고성을 '마음의 상태'와 그것의 움직임(정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확히 비판한다. 이 흥미로운 논리의 가닥을 잠시 따라가 보자.

8. 2장. 슬픔과 공동체의 윤리. 전쟁상태, 내전상태라는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상황에서 개체들이 어떻게 정동하고 반응하는가? 공포의 지배인가 고통의 창조적 승화인가? 생존인가 삶인가? 육친성, 근친성, 피붙이의 형식으로서 죽음에 감응할 것인가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면서 타자와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익숙한 공동체에 귀환할 것인가(탕아의 귀환) 새로운 공동체의 발명인가? 슬픔의 피붙이 형식을 넘어서 죽음과 상실에 대한 책임있는 감응, 애도의 윤리, 문학적 진실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보호 충동으로의 은둔인가 새로운 윤리적 관계의 발명인가? 죽음이 정치결사체들의 우정의 동창회로 회수되지 않도록 하자. 아무도 아닌 자들의 우정. 슬픔의 피붙이 형식에 대한 찬미는 열/냉전의 정동을 인간 본연의 것으로 만드는 공작이다. 이러한 해석공동체를 해체시키자. 공동체 대 불가능한-공동체, 불편한 공동체, 불편한 우정, 상처와 슬픔의 연대,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산책,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 동무들의 발걸음, 벌거벗은 존재들의 우정

9. 3장 슬픔과 주체성의 정치. 엄마를 돌봄, 보살핌, 헌신을 통해 신성한 노동을 수행하고 생명력을 체현하는 존재로 구현하는 재현방식, 그것을 고향, 문자이전, 온몸으로 이해해야 할 세계로 그리는 것은 보수적 정념이다. 엄마의 노동의 신성화는 농본주의적 인민주의. 엄마에 대한 다른 서사의 예는 무엇인가? 김숨, 똥파리(양익준), 마더(봉준호)=가족을 폭력의 원천으로 재현하는 방식. 가족이 생명의 원천이면서 폭력의 원천으로도 되는 것. 민주화 시대를 사라진 10년, 뿌리없는 시대로 유죄판결하는 것의 보수성. 신보수주의는 슬픔을 공동체의 근간으로 만든다. 이것은 금융위기 전후하여 진보진영의 과거에의 낭만적 노스탤지어와 보수주의의 복고적 향수가 불행한 조우/일치를 보인 것의 효과이고 이 시대의 위험한 증상이다. 유희석, 유보선, 신수정, 백낙청이 이러한 경향을 이상화하고 있다.

10. 4장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외로움으로부터 어소시에이션(반려, 동무)으로. 적대적 타자와 어떻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가?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한 후에 맺어지는 관계의 환상성. 민주주의의 발명과 더불어 외로움을 나눌 새로운 관계의 발명이 중요하다

11. 5장 사랑의 담론과 정치적인 것. 바디우, 이글턴의 사랑 개념은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이들과 달리 사랑의 개념에서 김영민(동무론)은 관계, 사소한 것에, 이종영은 성적인 것을 좀더 강조한다.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사드-히피-연쇄살인자로 이어지는 궤적을 그림으로써 해방의 정치를 힐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열정의 상실 이후에 오는 사랑을 그린다.사랑은 애착의 대상의 종언과 상실 이후에 재생산(종의 재생산과 가치의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정동적 방식이다. 이것은 서구중심주의가 자신의 보편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이 감각의 차이를 봉쇄하는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열정(중심)의 상실보다 고달픔(변방)의 나눔에 더 집중하자.

12. 6장 위기감과 불안, 그리고 파시즘의 정체성 정치. 새로운 파시즘의 징후가 세계화와 이에 따른 위기감의 만연, 현존하는 대안패러다임의 한계 및 이에 대한 반작용(약자의 위기감과 환멸)에서 생성된다. 파시즘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를 기초로 구축된다(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모두. 그 대신에 총후부인, 군국의 어머니, 아시아해방) 이것은 비가시적 집단들을 가시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청년, 부인, 소국민. 이들의 입신출세주의와의 결합. 이명박 정부의 파시즘 징후는 실용주의적 전환, 자영(자영업자를 넘는 자영의 환상)의 기대와 환상에 대한 자극으로 약자의 환멸을 불쏘시개로 삼아 피어오른다. 국박집 할매, 맨몸의 노동, 삶에 대한 애정이 그 이미지 전략이다. 자갈치 아지메는 민주당에 의해서는 노동으로, 한나라당에 의해서는 환멸의 민심으로 전유되었다. 이 둘 모두가 생존의 위대함, 생존의 절대성에 호소한다.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이다. 파시즘은 통제와 이념을 자발성의 기제로 작동시키는 고유한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적대의 조밀화를 통한 파시즘에의 자발적 참여유도가 그것이다.(272) 파시즘은 경쟁과 생존이 그 자체로 주체성의 근간, 이념, 대안으로 정립되는 현실적 맥락과 관련된다. 파시즘은 위험요인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음모론적 대중정치와 선동을 지속한다. 자살, 출산거부, 성노예화, 비국민화가 동시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징후적이다. 파시즘의 정보독점은 유언비어를 조장한다. 맺음말: "사회적 약자의 삶의 새로운 조건들을 사유할 수 있는 사상과 그 실천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287)

13. <외로움>은 슬픔에 기초한 공동체들에 대한 추구(가족공동체)가 갖는 보수성과 복고성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해서 이와는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글들로 편성되어 있다. 이 모색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차이, 차이의 윤리이다. 어떻게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이것을 마음의 풍경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모색하는 것이 <외로움>의 글쓰기 전략이다. 그런데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어떻게 공동체의 기초가 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주어지는 <외로움>의 답은 아직 속이 시원할 정도는 아니다. 이 아쉬움은 단지 미래적 문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미결의 과제가 슬픔과 애도, 외로움, 불안, 환멸과 같은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정동의 이중성(복합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을 그 이중성/복잡성의 측면 모두에서 핍진하게 추적하면서 그 하나하나와 대결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보다 그것의 일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사랑과 같은 정동도 애착의 대상의 종언과 상실 이후에 재생산(종의 재생산과 가치의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정동적 방식으로 읽히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이 책의 적극적 과제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즉 이 문제가 착상은 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고민중이거나 보류되어 있음으로써 <외로움>에 발생하는 빈 곳의 역류(혹은 작품의 내적 균열)로 생각된다.

14.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서로 다른 공동체 대안을 내놓는다. 하나는 시장공동체, 다른 하나는 인간공동체(가족, 교회, 국가). 나는 이것들이 실재하는 공통적인 것들과 삶의 공통되기의 과정들을 회수하는 자본의 두 가지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실재하는’, 그러나 자본의 것으로 회수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탐구 없이는 허공을 맴돌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한다. 국가는 자신을 환상적 공동체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그 원형적 세포로 활용한다. 국가의 과제는 많은 경우에 가족에게 위임된다. 그래서 가족은 공통적인 것, 공동체를 담보하는 최저층의 조직으로 된다. 가족 속에서 엄마는 생태적인 공통적인 것(생물적 생존)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고 아빠는 사회경제적인 공통적인 것(사회적 생존)을 담당하는 식의 분업이 이루어진다. 엄마의 노동은 이 분업관계에서 강제된 비임금노동이면서 한 사회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기반이 된다. 이 강제된 노동은 생물적 보존의 욕구와 결합되어 강한 자발성의 형태를 띤다. 강제와 자발이 엄마의 노동 속에서 중첩된다.

15. 그런데 생태적인 공통적인 것과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이 생존subsistence의 기반이자 동시에 삶life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이 두 공통적인 것의 재생산 없이는 생존도 삶도 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재생산이 적대적 분업과 적대적 관계(남/녀, 자본/노동, 국가/시민...)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이 적대의 형식을 걷어내면서 공통적인 것을 재생산할 현실적 형태를 그때그때 발명해 내는 것이다. 이 현실적 형태 발명의 지체, 아니 저지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이다.

16. 그 형태의 발명은 엄마의 노동이 취하는 환상적 형태, 사랑이 취하는 환상적 형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이다. 차이의 윤리/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구성될 수 있는 공동체라는 커다란 방향설정과 취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여기에서 차이가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온 차이, 공동체의 개념적 동일성으로 회수되지 않으면서 다시 생각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차이를 특이성의 개념으로, 창조성과 잉여의 힘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이 넘쳐 흐르는 특이성의 힘들이 열어낼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이 문맥에서 나는 슬픔이나 환멸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사랑이 이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숙고해 보고 싶다.(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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