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크랙 캐피털리즘』을 읽고 든 생각들 | 이성혁(문학평론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2:07
조회
1330
『크랙 캐피털리즘』을 읽고 든 생각들

이성혁(문학평론가)


* 이 글은 2013년 3월 2일 토요일 오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된 21세기 대안총서 시리즈 완간기념 집단서평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은 강력하고 시적인 저작이다. ‘혁명’에 대해 사유할 때 ‘사회과학’적 혹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것들에 대해 이미지로서 사유하면, 뭔가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치부되어 활동가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엄중한 영역에 대해 의미가 불명료한 ‘이미지로서의 사유’는 실천 활동하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혁명’에 대한 시적인 이미지는 어떤 과잉과 진폭이 큰 공명을 이끌어낸다. 그 이미지는 혁명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사유를 확장시킨다. 시적으로 이미지화 되어 사유되는 혁명은 사람들마다 다른 의미로서 삶에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공통적인 의미를 생산한다.

물론 『크랙 캐피털리즘』은 시집이 아니다. 이 책은 혁명에 대한 시적인 이미지만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시대에 혁명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논리정연하게 진술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논리의 일관성은 놀랄 만큼 강력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존 홀러웨이는 자신의 혁명에 대한 사유를 논리적인 진술로서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써, 혁명이 건조하게 또는 팍팍하게 사유되는 것을 차단한다. 논리정연한 진술 자체도 딱딱한 논문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문학적 에세이 형식으로 진술된다. 이렇게 반박하기 힘든 논리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강력함과 강렬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사빠띠스따의 마르코스의 선언문들은 그 자체가 문학 작품이기도 했다. 문학과 논리적 진술의 융합으로서 정치적 글쓰기에 대해 탐구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러웨이가 어떤 개념에 대해 시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대목을 두세 부분 찾아보면 이렇다. “‘자유’는 안정적 자율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아직-아님의 힘으로, 있을 수 있는 세계의 섬광처럼 생각되어야 한다.”(254), “혁명의 언어와 사유는, 화산을 산으로 보는 산문일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산을 화산으로 보는 시이며, 보이지 않는 열정, 보이지 않는 역량, 보이지 않는 지식, 보이지 않는 행위할- 힘, 보이지 않는 존엄을 향해 뻗어나가는 상상력이다.”(323), “균열은 혁명의 길로 가는 한 걸음이 아니라 바깥으로의 열림이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존엄의 등대이며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반란을 알리는 라디오 송신기이다.”(71) 이렇듯 홀러웨이는 자유와 혁명, 그리고 균열에 대해 ‘세계의 섬광’, ‘화산으로서의 시’, ‘존엄의 등대’, ‘라디오 송신기’ 등 시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홀러웨이가 말하는 ‘혁명의 언어와 사유’를 열릴 수 있도록 만들고 풍부하게 만들어낸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홀러웨이의 이 책은 매력적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삶에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적대적인가 설득력 있게 해명한다. 시적 이미지에서도 유래하는 그 설득력은 계몽주의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알다시피, 좌파 운동에서 계몽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주창해왔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대중이 의식화되어야 하며, 당의 지도에 이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한 실상을 교단에 서서 대중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하지만 홀러웨이의 책은 좋은 친구로서 옆에 앉아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말해준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는 이 체제에 의해 고통 받는 이에게 자신의 삶을 되찾으라고 힘을 북돋아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읽는 소녀’에 대한 논의는 그의 이러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는 그 소녀의 독서가 ‘추상노동’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고자 하는 행위로서 보고, 그 행위가 자본주의의 동일화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의미를 가진다고 가치화한다. 그렇기에, 그는 그 소녀에 대해 책 읽을 시간을 어떻게든 마련하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아마 자신의 정파의 입장을 담은 팜플렛을 건네주려고 할 것이다. 세상의 비밀이 이 책 안에 다 있다는 듯이 말하면서 말이다.

홀러웨이의 이 책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이 책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장이 모두 수긍된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 책은 무척 논쟁적이기도 하다. 정당을 운동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고, 자율주의와는 많은 부분에서 공명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이론에 비판적인 논평을 가하기도 한다. 마이클 하트와의 서한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홀러웨이와 네그리-하트 사이에는 그들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철학 자체에서 불일치 지점들이 있다. 가령, 네그리-하트와 홀러웨이의 사상에는 잠재력이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그 개념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가 다르다. 홀러웨이는 추상노동에 포섭된 유용노동-행위-의 힘, 그 추상노동이 다 포섭되지 않은 잉여의 힘에서 잠재력을 본다면, 네그리-하트에게 잠재력 개념은 존재론 범주에 놓여 있다.

홀러웨이는 존재론을 기각한다. 그는 존재와 행위를 대립항으로 놓고, 존재 개념을 추상노동으로부터 파생된 이데올로기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구체적인 행위와 존재자들을 추상적으로 동질화할 때 존재라는 개념이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 아닐까 추측된다. 존재론은 행위의 세계를 추상화하고 사물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논리의 산물이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에게는 존재와 생성이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생성하는 만물 자체가 바로 존재인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잠재성은 생성할 수 있는 존재, 즉 그 존재의 생성 능력에 의해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잠재성의 현실화는 어떤 결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홀러웨이는 ‘미래’의 시간성을 괄호친다. 그에겐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와 잠재력이 보존되어 있는 과거가 중시된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의 회귀’가 중요한 개념으로서 등장하고, 벤야민의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관인 진보의 시간-결국 자본의 논리에서 유래하는-을 대체하여 ‘충만한 현재시간’ 개념이 호출된다. 그에게 ‘미래’는 진보의 시간관의 핵심적인 시간으로서 취급된다. 미래라는 시간은 현재가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진보의 시간에서 미래는 충만함이 이루어질 시간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현재는 언제나 그 미래를 위해 부족한 무엇을 참아내야 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무엇이 성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범주 역시 그에게는 기각된다.

하지만 현재시간의 충만성은 미래에의 어떤 기대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기대 없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 없이 현재 행위의 강렬함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자본의 지배에 대한 ‘절규’가 행위의 출발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관에 따르면, 유물론적인 목적론 역시 폐기되기 때문에 기획이나 구축-하트가 말한 제헌권력과도 관련 있는-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홀러웨이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의 기획이나 구축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파열들을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논의이고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는 미래에 투사된 기획을 부정하기 때문에, 대안적인 제도에 대한 상상 역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행위 위에 추상적으로 군림하려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 같다. 결국 그것은 레닌주의의 변종일 것이라는 의심. 이는 ‘지속’의 시간을 둘러싼 하트와 홀러웨이의 논쟁과 연결된다. 홀러웨이에게는 파열의 시간, 현재의 시간이 중시되며 하트는 차이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지속-생성적인 존재이자 제도-을 중시한다.

물론 홀러웨이가 제도나 조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제도나 조직이라는 존재를 동사화 하여 행위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본다. 홀러웨이와 하트는 “제도화하라, 전복하라”라는 구호를 공유한다. 그런데 하트는 그 구호를 바꾸어 “전복하라, 제도화하라”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홀러웨이의 구호는 “제도화된다면” “다시 전복하라”라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아무튼, 이 주제는 이 토론회에서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을 만큼 흥미가 있다.

아마도 시간관의 차이, ‘가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특히 ‘추상노동’과 ‘구체적으로 유용한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도 네그리/하트와 홀러웨이의 차이를 부각할 수 있다. 홀러웨이는 유용한 노동을 행위로 해석하고, 추상노동을 그 행위의 소외로서 해석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는 유용노동과 추상노동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분리될 수 없는 개념 쌍으로 본다고 홀러웨이는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유용노동에서 추상노동을 분리하지 않고 추상노동과 유용노동 바깥에서 자기가치화를 찾는 해리 클리버를 비판한다. 자기가치화 개념은 노동하는 일상의 외부에서 해방된 공간을 찾는다는 비판이다. 반면 홀러웨이는 추상노동과 행위가 갈등하는 현장에서 반자본주의적인 균열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균열의 행위는 언제나 추상노동과의 포섭 안에서, 그리고 그 노동과의 갈등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순수할 수 없으나, 자기가치화 개념은 자본의 지배 너머 순수한 공간을 전제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글의 논의가 자율주의와 홀러웨이 사이의 쟁점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쟁점 역시 글을 급하게 쓰느라 거칠게 스케치되고 만 느낌이다.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만 언급하느라 자율주의와 열린 맑스주의가 공명하고 있는 주제, 바로 이 서평회의 주제인 ‘공통되기’에 대해 조명하지 못하고 말았다. 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에서 ‘공통되기’의 문제가 기반이 된다는 것은 두 이론 모두 공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조명은 서평회에서의 방담을 통해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 책에는 지금까지의 논의 말고도 끄집어내어 소개하고픈 매력적인 대목이 많이 있다. 특히 정체성의 마스크에 대한 논의 부분, 마스크 뒤의 여성에 대한 논의 부분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는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추상노동에 의해 축적이 가동되는 자본주의가 삶까지 추상화시키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설파한다. 남성노동을 기준으로 삼는 추상노동은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만들며, 이에 따라 우리-생물학적으로 여자든 남자든-는 ‘남성’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홀로웨이는 우리의 마스크 뒤에는 여성-남성에 대비된 여성, 정체성이 부여된 여성이 아닌 그 무엇으로서의 여성-이 존재하며, 자본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남성적인 성격의 추상노동으로부터 탈주하여 마스크 뒤에 있는 여성으로서의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에 수긍하면서, 나 역시 어느새 단단해진 남성의 정체성을 허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질문을 던져보니, 이 책의 매력은 아마도 이렇게 어떤 행위로 우리를 이끈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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