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트위터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ㅣ권범철(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1 13:31
조회
1137
트위터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권범철(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 이 글은 인터넷신문 『참세상』 2012년 11월 5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category2=137&nid=68163


정보기술의 발달, 그로 인한 새로운 소통 도구의 등장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이런 질문이 새삼스러울만큼 그 변화는 이미 익숙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만큼 극적이다. SNS 혁명이라는 말도 익숙한 시대가 됐으니 말이다. 트위터, 페이스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소통 환경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까?

<국가에서 마을로>는 이러한 정보기술 발달에 따라 나타난 새로운 소통의 도구들이 가져오는 사회의 변화를 살피며, 그 특성을 분석한다. 저자의 말을 빌어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국가에서 마을로’는 오늘날 국가 단위의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과거 마을의 그것에 근접해가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을이라고? 그렇다. 여기서 마을은 자립적인 공동체, 그러니까 과거 근대화 이전 어느 시골의 작은 마을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왜 현재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예전 마을을 닮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답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정보유통/처리시스템의 구체적 양식은 그 시대 그 공간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마을에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입말언어, 즉 입으로 하는 말이었다. 기록되지 않는 ‘말’ 말이다. 이 입말언어는 직접 만나야 소통이 가능하고, 정보 보존 시간과 보존량이 크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말언어의 미디어적 특징은 마을이라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결정짓는데, 그것은 구술성의 문화, 개인의 미디어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미분화, 사생활의 부재, 균질한 정보 공유, 직접민주제의 작동, 자생적 평판체계 등의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지점은 마을의 개인은 공동체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그 정보와 지식에 기반하여 공동체의 현재 상황에 맞게 각자 자신들의 행동을 조절한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게 그 방향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입말언어라는 공통의 미디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입말언어는 공동체의 규모를 한정하는 구속요건으로도 작동했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밀도와 속도가 일상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데, 입말언어로는 큰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확대는 문자의 발명으로 가능해졌다. 문자는 많은 점에서 입말언어와 달랐다. 문자는 많은 정보를 기록, 축적할 수 있었고, 비동시적인 환경에서도 소통이 가능했다. 이를 통해 문자문화는 입말언어로는 포괄할 수 없는 규모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거대 권력의 탄생을 이끌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문자로 소통한 것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한 것은 주로 지배계급이었고, 마을에 사는 신민들은 여전히 입말언어를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삼았다. 지배계급이 문자를 사용하여 넓은 지역을 관리하는 동안, 입말언어에 기반을 둔 공동체는 작은 단위로 고립된 채, 서로 네트워크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자를 사용하는 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자와 입말언어라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사용하는 계급 간의 지배-피재배 관계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차이였다. 저자는 비릴리오에게서 속도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도 그 자체보다는 속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 효과란 바로 힘의 차이로서, 이러한 차이는 매스미디어가 등장한 근대 국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는 등 정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파되는 시대가 되어도 그 차이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매스미디어 시대에 대다수는 정보 수용계층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즉 소수의 전문가, 지배계층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정보를 전파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런 도구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을 수 있었지만 빠른 정보소통 도구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정보에 대해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입말언어가 지배적 커뮤니케이션인 환경에 머물러 있었고, 그로 인해 계급 간 속도의 차이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근대민주주의 환경도 공동체 내부에서 속도의 차이에 기반한 조직화된 소수의 지배현상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뿌리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터넷이 속도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속도의 차이가 만들어내던 힘의 차이 역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저자가 보기에 인터넷이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지점은 바로 인터넷으로 인해 “공동체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균질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절대속도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역사상 어떤 시대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같은 속도의 미디어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이로써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앞서 살펴본 마을의 그것을 닮아가게 된다. 인터넷 게시판의 게시물과 댓글은 문자문화라기 보다는 입말언어의 특성 즉, 구술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프라이버시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으며,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 서비스의 등장은 사용자 개인들을 미디어로 만든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형성되는 여론과 그에 기반한 집단행동들은 직접 민주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것은 비록 현재는 제도화되어있지 않지만, 이미 실제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에서 직접민주주의적 효과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러한 특성들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마을의 그것에 근접해가고 있다고 이 책이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는 입말언어를 사용하는 마을의 구성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 사회의 개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같은 속도의 미디어를 갖게 됨으로써 생겨난 변화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제 홀롭티시즘적holoptical 공간이 되었다. 새로운 사회변화를 지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인 이 홀롭티시즘적 공간은 판옵티콘과는 정반대의 공간이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즉 시선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원형감옥과는 달리 홀롭티시즘적 공간에서는 개인이 공동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마치 마을에서처럼 말이다. 이제는 국가단위의 공동체가 마을처럼 작동한다. 속도의 비대칭이 사라진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저자는 정보기술의 발달에 대해 많은 미래학자들처럼 대책없이 장미빛 미래를 낙관하지도,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만을 그리지도 않는다. 저자는 그것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판단하기 보다는 우리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시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먼저 그것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오늘날과 같은 정보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근대사회 전체가 그리고 근대사회의 저항운동조차도 지식인 혹은 전문가 편향적인 경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근대사회가 바로 이러한 미디어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저자가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의 성격을 크게 규정짓는 틀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 단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같은 속도로 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다수의 개인들을 실시간으로 연결시켜주는 이러한 도구가 등장한 21세기는 당연히 과거와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저자가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저항운동의 변화된 모습이다. 근대사회의 저항운동이 전위가 이끄는 위계적 질서를 내재하고 있었다면, 21세기의 운동들은 수평적인 개인들의 네트워크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변화에 따라 가능해졌다. 더이상 지배권력은 실시간으로 연결된 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 모두가 지배권력과 다르지 않은, 속도의 차이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이 성장하는 이러한 사회에서는 전문가의 힘이 크게 약화되며, 대의제 민주주의 또한 위기를 맞이한다. 저자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적 환경에 적합한 제도인지 심각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의제로 민의를 반영하는 속도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공론을 형성하는 속도보다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보면 속도의 우위가 지배로 이어져왔는데, 지금은 오히려 속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야할까.

때문에 저자의 관심이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조율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할지, 그것을 어떻게 구축할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가 한때 유행처럼 들었던 웹2.0 즉, 집합지능을 활용하는 새로운 협력의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거버먼트 2.0 즉 개인들의 참여를 정부의 영역에 확장하여 제도화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이제 개인의 참여를 제도화하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인식하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작금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가져온 정보기술의 발달은 현재의 대의제, 행정 시스템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것을 보완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또한 가능한 단계까지 와있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누가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다. 성벽을 무너뜨린 정보기술로 어떤 마을을 만들 것인가. 아직 그 상은 분명치 않지만 우선 생각해야할 것은 그 상을 그리는 일에 집합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새로운 협력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과정 역시 그래야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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