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3/9 마그리트의 <연인>

작성자
보미
작성일
2018-03-09 19:01
조회
871
마그리트의 <연인>

연인은 1928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미지의 배반>의 제작연도가 1928~1930년인 점을 고려해 보면, 이 그림, <연인>또한 마그리트가 회화의 '재현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의 배반>을 그릴 때, 마그리트는 칼리그람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특별한 조작을 가하고, 이로써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를 종속시키며 만들어내는 공통의 자리를 부숴버렸다. 마그리트는 칼리그람의 공통의 자리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확언적 담론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면서 조작을 시작한다. 칼리그람 뒤에 숨어 있던 목소리는 하나의 이미지와 하나의 낱말이 서로를 감시하며 동일한 의미를 반복하게 했던 지시어 "이것은" 이다.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배반>에서 했던 조작을 <연인>에서도 한다. <연인>에서의 조작은 광고나 상업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일반적인 연인의 이미지에 가해진다. 마그리트는 이 이미지 뒤에 교묘하게 숨어 있던 확언적 담론의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목소리가 행하는 위계화의 술수를 전면에 드러낸다. 숨어있던 목소리는 인물들의 고유성을 삭제하는 하얀 천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미지의 배반>과 <연인>에서 조작을 시작할 때, 마그리트의 목적은 같다. 바로, 우리의 관계를 위계적인 재현의 체계로 편성하고자 하는 음험한 목소리를 고발하는 것이다. 아주 깔끔하고 완전해 보이는 칼리그람의 뒤에는 "이것이(이 그림이/이 글자가) 바로 이것(이 글자/이 그림)이다."라는 지배적인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꾸며진 일반적인 연인의 이미지 뒤에도 숨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연인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다.", "정상적인 남자와 여자 오로지 그것뿐이다."

하얀 천에 의해 자신의 고유성이 삭제된 두 인물에게 남은 것은, 혹은 덧씌워진 것은 '남자' 와 '여자'라는 표식들뿐이다. 연인은 서로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얼굴을 둘러싼 하얀 천이 그들의 눈, 코, 입을 더욱 팽팽하게 압박한다. 질식할 것 같다. 화면 가득 불길한 징후들이 넘쳐 난다.

<연인>은 그림이 순수 상사체의 놀이가 되게 하는 작동 절차의 끝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마그리트는 일단, 재현의 체계를 파괴하고자 했다. -어떤 면에서 <연인>이 만들어낸 파괴의 효과는 너무나 강렬했다.- 그런데 재현을 파괴하고자 했던 이 그림이 어느 지점에선가, 되려 무언가를 재현하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연인>에서 마그리트는 정상적인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폭압을 드러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그려낸 이 화면 위에서 실상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참담한 풍경을 목격한다.
음험한 목소리는 한 손에는 당근을 다른 한 손에는 채찍을 든다. 장려하고 동시에 금지한다. 제현의 체계 내에서 우리는 과잉되거나 혹은 경직된다. 사실, 문제는 '무엇을' 장려하고, '무엇을' 금지하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그것이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행사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숨겨져 있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음험한 목소리는 잠시 정체를 드러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빈방은 언제든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침전물의 색깔은 변하지 않았다. <연인>에서의 조작은 상사체들이 탄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마그리트는 연인을 그렸다. 그리고 연인을 그리고서 파이프를 그렸다. 그리고 파이프를 그리고 파이프를 그리고 파이프를 그리고 파이프들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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