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82 발제문.

작성자
영수
작성일
2021-12-19 11:28
조회
384
10. 결론은 관점에서 본 니체와 칸트
칸트적 입장과 니체적 입장의 대립 지점.
1) 사실들을 위한 단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들, 해석들, 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생성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
2)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만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기 때문. “합리적 존재는 항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비합리주의는 소여의 권리들, 마음, 감정, 변덕, 정념의 권리들이 이성에 대립하기 때문위 아니다. 비합리주의 속에는 사유와 다른 것, 사유하는 것과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대립적인 것이 바로 사유 자체이며, 합리적 존재에 대립적인 것이 바로 사유자 자신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3) 칸트적 입법자가 영역들의 배분과 동시에 기존 가치들의 할당을 감시하는 중재자, 평화의 법관이라면, 니체는 계보학자이다. 계보학자는 예언자이며, 미래의 철학자이다. 계보학자에게사유하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지만, 판단하는 것은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이며,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판단의 문제는 정의와 서열의 문제가 된다.
4) 합리적 존재, 형행 가치들의 공무원, 사제이면서 신도이고, 입법자이면서 신민, 정복자인동시에 정복당하는 이가 아닌 자기 자신에 봉사하는 반응적 인간의 지점.
5) 비판의 목적은 인간이나 이성의 목적이 아니라. 결국 초인, 극복하는 것, 추월당하는 인간에 있다. 비판의 지점은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다.

11. 진리의 개념.
칸트 역시 진리의 가치도, 진리에 우리가 복종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인간의 오류보다 인간의 관심들과 어리석음이 우리를 진리에서 더욱 떼어놓는다. 철학자들은 사유가 진리를 추구하고, 사유가 “권리상/당연히by right" 진리를 사랑하고 원할 것will이라고 주장한다. 사유와 진리의 권리 관계를 설정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순수 사유자의 의지를 진리에 관계시킬 때 철학은 진리를 철학자 자신의 구체적 의지에. 힘들의 어떤 유형에, 권력의지의 특정 성질에 관계시키길 회피한다. 니체는 개념으로서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개념이 '권리상' 어떤 힘들과 성질이 부여된 어떤 의지를 전제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허위의 열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그리고 이상으로서의 진리에 대해 비판하는 것.
진리라는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과학조차 현상들의 진리는 현상들의 세계와 구별되는 어떤 “세계”를 형성한다. 참된 세계는 참된 인간을 그것의 중심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누가 참된 인간이며, 참된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여기에] 첫 번째 전제: 참된 인간은 속고 싶지 않으며, 자신이 속임을 당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제는 세계 자체가 이미 참되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두 번째 전제: 내가 진리를 원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속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

[그러나] 만약 누군가 진리를 원한다는 것이 세계라는 것의 존재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바의 이름으로라면? "삶은 길을 잃게 하고, 속이며 감추고 현혹시키며 눈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진리를 원하는 자는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에 인식을 대립시키고, 세계의 또 다른 세계, 저 세계, 소위 참된 세계를 대립시킨다. 참된 세계는 그 의지, 즉 '이 세계this world'를 외관으로 다루려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그 때문에 인식과 삶의 대립, 세계들의 구분은 그것들의 참된 특성을 드러내보인다. 그 특성이란 바로 도덕적 기원의 구분, 도덕적 기원의 대립이다. 속이기를 원하지 않는 인간은 보다 나은 세계와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 모든 속이지 않으려는 이유는 도덕적 이유이다. 우리는 항상 진리를 원하는 자의 덕성주의와 부딪힌다. 덕성주의자의 최고의 관심사는 잘못의 배분이다. 그는 책임지고, 결백을 부정하며,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외관을 고발한다. “나는 모든 철학 속에 [비]도덕적 의도들이, 그로부터 완전한 하나의 식물로 탄생하는 씨앗을 형성함을 알아보았다. 나는 철학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어떤 인식에 대한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도덕적 대립 자체가 하나의 징후일 뿐이다.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원하는 자는 보다 심오한 어떤 것, 즉 “삶에 반대하는 삶"을 원한다. 그는 삶이 고결하게 되기를, 그것이 자신과 외관을 수정하기를, 그것이 다른 세계로의 이행의 구실을 하기를 바란다. 삶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길 원한다. 도덕적 대립 뒤에 드러나는 또 다른 모순, 즉 종교적이거나 금욕적인 모순의 윤곽.

사변적 입장에서 도덕적 대립으로, 도덕적 대립에서 금욕적 모순으로...
금욕적 이상의 인간(>삶을 부인하는 자)은 무엇을 원하는가? 축소된 삶, 퇴화하고 축소된 자신의 삶, 자기 유형의 보존, 자기 유형의 권력과 승리, 반응적 힘들의 승리와 그 전염을 원하는 자.
무의 의지는 반응적 형태 아래서만 삶을 견뎌낸다.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을 삶이 모순되고 부인되며, 소멸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무의 의지로 인해 삶보다 ‘우월하다는 가치가 우리에게 생겨난다. 우월한 가치들 속에서 부인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삶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려는 의지와 관계되어 있는 우월한 가치들이다. 부인하려는 그 의지가 우월한 가치들의 '가치'를 정의한다. 우월한 가치들의 무기는 삶을 반응적 힘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전체 삶이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채, 점점 더 작아지면서, '무를 향해서, 그것의 비통한 무의 감정을 향해서 더 나아간다. 금욕적 이상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바로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이다.
해석은 인식, 도덕, 종교의 세 층위를 뚫고 지나가면서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로서 참됨, 선함, 신성함을 발견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서로 얽혀 있다. 금욕적 이상은 누구도 위태롭게만들지 않는 세련됨을 갖추었는데, 이는 모든 영역을 점령하면서 항상 머물러 있다. “정신은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상 없이 지낼 수 없다.

12. 인식. 도덕, 종교진리의 개념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진리에서 금욕적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면, 계보학보다 진화로 관심을 돌려보자. 즉 금욕적 이상이나 종교적 이상에서 진리의지로 내려가 보자. 도덕이 독단인 종교를 대신했고, 과학이 도덕을 점점 더 대체하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종교는 순응된 형태를 생존시키고 수용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사유자가 필요하다. 도덕은 종교의 연속화이지만 다른 수단에 의해서이고, 인식은 도덕과 종교의 연속화지만 다른 수단에 의해서이다.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그것의 수단은 바뀌고, 그것들은 더 이상 동일한 반응적 힘들이 아니다.
진리의지 역시 금욕적 이상에 속하는 것이고 그 방식은 항상 기독교적이다. 니체는 다른 것, 즉 이상의 변화, 다른 이상, '다르게 느끼기'를 한다. 현대 세계 속에서 그러한 변화는 에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이 무엇인지를 묻는 동안, 그 의문을 그 이상 자체에 제기하는 동안, 도덕이나 덕이 그것을 대신해 앞으로 나선다. 진리에서 도덕까지. 도덕에서 종교까지의 계보학적 단계들, 사람들은 우리가 진화라는 변명 아래서 다시 물구나무를 선 채 내려가도록 만들기를 원한다. '연역에서 연역으로’ ‘판결에서 판결로는 하강하는 단계들을 의미한다. 즉 금욕적 이상에서 그것의 도덕적 형태로, 도덕의식에서 그것의 사변적 형태로, 가장 가공할 연역',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은 금욕적 이상이 진리의지 너머에는 더 이상 은신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대답할 그 누구도 데리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때 금욕적 이상은 자기 지위를 상실하며 가면을 잃고 더 이상 자기 역할을 추행하기 위한 인물도 이용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르게 느끼고, 이상을 바꾸는 계기와 같이 재상승을 주재하는 계기에 이르지만, 진리의지를 통해 금욕적 이상, 도덕적 이상을 대체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의지에 대한 검토(와 해석, 평가)는 다른 형태 아래서 다른 이상들에 의해서 금욕적 이상이 자신을 대체하도록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진리의지 속에서 금욕적 이상의 영속성을 고발할 때, 우리는 그 이상에게서 그것의 영속성의 조건이나 최신 가장복을 다시 몰수 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참된 자들 이거나 인식의 추구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금욕적 이상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 자리 자체로부터 아무 것도 살아남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르누진리 개념을, 달리 말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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