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재밌게 본 영화가 있어서 올려봅니다

작성자
absinth
작성일
2019-01-15 14:37
조회
508
영화 <카게무샤>를 이제서야 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름은 여러 번 들어봤지만 이 사람 영화를 제대로 본 건 20대 초반에 본 '7인의 사무라이'가 전부였다. 중학교 때였나, 처음으로 일본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돼 들어오면서 '러브레터'와 함께 개봉했던 걸로 기억한다. 외국 블로그에서 종종 맥베스의 일본 버전인 '란'을 극찬하는 걸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 휴가를 맞아 '란'을 한 번 볼까 하고 뒤지던 와중에 '란'보다는 카게무샤의 작품성이 더 높다는 글을 읽게 돼서 계획에 없단 이 영화를 보게 됐다.

카게무샤는 그림자 무사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영화는 16세기 일본의 난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중심을 담당하는 인물은 다케다 신겐이라는 영주로, 그는 실제 역사 속에서도 모두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무공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이런 카게무샤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조선의 이순신이 아군의 사기와 적군의 공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했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장수가 죽고 나서도 카게무샤를 앞세워 사회 내의 상징적 죽음을 유보하는 일이 있었나보다.

신겐의 오른팔 노부카도는 도둑들을 처형하던 처형장에서 신겐과 똑같은 키와 외모를 가진 '도둑'을 발견하고, 훗날의 쓰임을 위해 그에게 훈련을 시킨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적군의 성 앞에 진지를 치고 있던 신겐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생기고, "적어도 3년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그의 유언에 따라 측근들은 이 '도둑'을 신겐의 완전한 대리자로 삼게 된다. 노부카도는 진짜 신겐의 죽음을 최대한 숨기되 신겐의 '자리'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신겐의 가면과 도둑의 가면 사이의 이 아슬아슬한 불일치를 포착하면서 영화 특유의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 속에서 발견하는 '카게'는 비단 '도둑'만이 아니다. 모두가 이 '카게'의 영향력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신겐의 양아들 '카츠요리'는 자신이 순수한 혈통에 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후계자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신겐'이라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카츠요리'는 자신의 아버지의 그늘로서의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버지'는 그를 숨막히게 만드는 하나의 '자리'다. 카츠요리는 말한다. "내가 전투를 할 때면 항상 아버님이 뒤에서 지켜보셨지 ... 이번에 성은 내가 함락시켰지만 그 공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뒤에 있던 아버지의 기치 때문이지"

적군들이 신겐의 영토를 침범하기에 앞서 공격을 개시할지 말지 결정하게 해주는 기준은 언제나 '신겐의 생존 여부'다. 영화는 적군들이 계속해서 염탐꾼을 보내 '진짜 신겐'이 살아 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진짜 신겐'이라는 것은 물론 '실제로 현존하는 신겐'을 지칭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의미를 획득한 '신겐이라는 자리' 또는 '신겐이라는 상징'이다. 적군이 발견하자마자 뒤꽁무니를 빼는 것은 언제나 '신겐의 기치'이고 '신겐의 말'이며 '신겐의 몸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된다. 만약 중요한 것이 '신겐의 상징'이라면, 따라서 그 상징의 내용에 해당하는 '실제 신겐 본인'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왜 영화는 이토록 그 상징을 중심으로 맴맴 돌게 되는 걸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라깡주의자들이 참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상징계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그의 전기 이론에 비춰보자면 말이다. 라깡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나누고 시니피앙이 자기들만의 질서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영화의 예로 보자면 '신겐의 상징'과 '신겐 본인'이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두 계열이다. '신겐의 상징'의 자리에는 '생물학적 신겐'이 올 수도 있지만, '도둑'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서의 그 편지가 바로 '신겐'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아버지의 자리'라는 것은 "너에게도 이런 자리가 하나 필요하단다"라는 결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결여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라는 것이 생기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나'가 생긴다. 노부카다는 '신겐의 상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카츠요리는 '아버지의 상징'을 '자신의 상징'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영화는 분명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우리는 누구든지 이 영화 속에서 하나의 비극을 읽는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라깡주의자라면 상징계의 소외에서 고군분투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시니피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언제나 그 주변부를 장님처럼 더듬고 다닐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라깡은 그렇게 장님 같은 우리, 결여된 우리야 말로 주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선생님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친구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어머니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지만 그 어느 옷도 나 자신과 완전히 동일해질 수 없고, 나는 영화 속의 도둑처럼 다만 그림자에 불과한,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무엇'으로서만 남는다. 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 옷도 아니고 저 옷도 아니야)의 운동에서 간접적으로 밖에 파악되지 않는 바로 그 그림자, 그 결여야 말로 라깡에게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비극의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카게일 수 밖에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해 들뢰즈는 조금 다르게 답한다. 그는 처음에는 언뜻 라깡과 비슷한 말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가면들이 가리는 것은 다른 가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뒤이어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인다. "반복되어야 할 최초의 항이란 것은 없다". 우리는 분명 가면을 바꿔쓰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아버지의 가면을 대체하기 위해 가면을 바꿔쓰는 것은 아니다. 부정의 운동 뒤에서 어렴풋하게 잡히는 라깡 식의 '주체'에 대해서, 들뢰즈는 '바보야, 사실 그 뒤에는 엄청나게 꿈틀거리는 생산의 장으로서의 너 자신이 있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나'는 단순히 부정의 방식으로만 도달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사후 적으로 그것을 부정의 방식으로 '파악'할 수는 있지만, '삶의 원리'가 부정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둑'의 비극, 노부카다의 비극, 카츠요리의 비극은, 그들이 아버지의 상징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대체'라는 개념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도둑'은 '신겐의 상징'과 완전히 동일해지고자 하지만 이에 실패하고, 결국 그 상징에 불일치한다는 사실이 발각되자마자 다케다 가문에서 완전히 추방당한다. 카츠요리는 '도둑'처럼 무조건적 동일시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한 단계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배반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배반은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를 내포하는 배반이고, 따라서 부정을 매개하는 배반이다. 거기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있고, 카츠요리는 그림자의 역할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10대 후반에 들어서는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늘에 불과한 자신을 보며, 아버지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진정한 극복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들은 그런 한에서 자신의 삶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극복의 운명말이다. 그러나 30대에 들어서며 이 아들들은 한없이 초라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이 추구했던 운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버지를 극복하면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신겐의 죽음 이후 노부카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림자는 실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법... 이제 실체가 없으니 카게무샤는 어찌 되는 것인가?" 이 새로운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운명을 짊어지게 만든다. '아버지보다 나은 아들'로서의 나를 너머, '나 자신보다 더 나은 나'로의 도달을 감당해야 하는 것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운명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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