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잔존 6장 이미지 발제문입니다.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9-10-20 11:47
조회
837
반딧불의 잔존 6장 이미지

제3제국 치하에 살았던 샤를로테 베라트는 ‘이야기꾼’이 되어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가 수집한 꿈들은 현실을 변형시키면서 받아들였고, 어떤 은밀한 인식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전체주의 역사에 대한 내밀한 ‘지진 관측’을 제공해주었다. 위베르만은 이런 꿈의 투시력을 두고, 벤야민이 모든 전달된 경험의 궁극적인 범례로 삼았던 ‘죽어가는 자의 권위’에 귀속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죽어가는 자는 단발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자도, 말문이 막혀버린 자도, 아감벤이 말한 ‘무젤만’도 아니다. 매 순간 삶의 ‘미광’이 지닌 극단적으로 취약한 시간적 조건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자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조르주 바타유였다.

바타유는 전쟁이 시작될 무렵 『죄인』을 집필하며, 첫 번째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집필을 시작한 날짜(1939년 9월 5일)는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나는 사건들을 고려하면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사건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비지(非知)의 균열이며, 모든 군림과 동떨어진 주권이다. 그는 사건들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건들에 더욱 잘 대답하고, 사건들에 그의 욕망(밤의 미광)을 더욱 잘 대립시킨다. 또 다른 작품 『내적 경험』에선 인간이 전쟁과 파괴의 왕국으로 인도된다 해도, “인간의 가능성의 끝까지 떠나는 여행”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의 경험은 왕국과 그 영광에 관련하여 전형적인 무능력(impouvoir)이다. 그렇지만 경험은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역량(puissance)이다. 바타유는 그것을 ‘반박의 역량’이라고 일컫는다. “나는 반박의 이름으로 반박한다. 반박이란 경험 그 자체(가능성의 끝까지 가려는 의지)이다. 경험, 경험의 권위, 경험의 방법은 반박과 구별되지 않는다. 바타유가 제공하는 역량의 여러 사례는 벤야민이 이미지에 대해 희망하던 것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것은 밤을 통과하는 발광체이다.(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에 대한 설명 167-170p)

위베르만은 안달루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이 ‘내밀한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바타이유의 글을 인용하며, 역사의 그 어떤 순간에도 경험이 ‘파괴되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잔존은 왕국과 그 영광의 역량도 상관없고, ‘스펙타클의 사회’의 보편적 효력에도 상관없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아감벤은 언급하는데, 『도래하는 공동체』는 어떤 방책의 영역을 개방하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보이며, 윤리학의 공간을 마련하는 인간의 얼굴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하이데거적인 것과 “메시아적 왕국”에 대한 물음을 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이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역시 민중을 환원하거나 예속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설령 집단학살의 결정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라 해도 이런 환원은 거의 언제나 나머지를 수반하고, 그 나머지는 거의 언제나 움직임을 수반한다. 도주하고, 숨고, 증언을 간직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위기를 모면한다……. 이런 모든 은밀한 경험은 언젠가 그것들을 들을 수 있을, 또는 듣기를 원할 민중에게 보내진다. 이것은 ‘남아 있는 공동체’에 토대를 둔 정치적 행위다. 벤야민은 어떤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한 ‘역설적인 방책’은 왕국의 검열과 영광의 눈부신 빛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출현하게 만드는 자유’를 만들어낸다.

로라 워딩턴은 난민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절망스러운 시도에서 반딧불-이미지를 끌어낸다. 그것은 소멸에 임박한 이미지들이고, 긴급히 도주해야 하는 까닭에 언제나 움직이는 이미지들이다. 그들의 잔존에서 ‘대각선의 힘’을 담아내는 데 분명히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기재는 반드시 가벼워야 하고, 셔터는 최대한 열어야 하고, 이미지는 불균질하고, 초점은 맞추기 어렵고, 입자는 거치적거리고, 리듬은 단속적이다. 그런 탓에 어떤 고속 촬영 효과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공포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미광-이미지이다. 「경계」는 이런 시도를 통해 ‘일말의 인간성’을 출현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비록 그 출현이 아무리 미약하고 순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수용소의 임박한 폐쇄에 반대하는 난민들의 시위현장 안에서 동시녹음으로 촬영된 시퀀스가 갑자기 폭발한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미광이 아니라 오히려 폭발이며 섬광이다. 또한 그것은 온 힘을 다해 울부짖는 외침이다. 카메라 자체가 시위하고 발버둥을 친다. 그 이미지는 매 쇼트마다 자신을 구출하려 애쓴다. 나중에는 다시금 침묵이 형성될 것이다. 그들은 국외 탈출을 돕는 안내인을 따라서 어슴푸레 빛나는 지평선을 향해 어둠 속으로 멀어질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저기에, 저편에, 지평선 뒤편에 있다. 비록 우리는 ‘저기’가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영화는 마치 눈부신 빛에 의해 멈춰버린 것처럼 끝난다. 반딧불이는 지평선 저편으로 떠났고, 다른 곳에서 그들의 공동체, 소수성, 공유된 욕망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워딩턴의 이미지와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다. 그 영화의 단편들은 유포될 수 있고, 그 단편들이 다른 단편들, 즉 반딧불-이미지들을 야기할 것이다.
전체 0

전체 21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새책 공지] 요나하 준, 『헤이세이사』 첫 세미나 참가자 모집! ― 12월 09일 토요일 오전 10:00 시작!
deepeye | 2023.11.18 | 추천 0 | 조회 1000
deepeye 2023.11.18 0 1000
공지사항
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정원 | 2022.01.11 | 추천 0 | 조회 1539
다중지성의정원 2022.01.11 0 1539
공지사항
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님들께 요청드립니다.
다중지성의정원 | 2019.11.03 | 추천 0 | 조회 2670
다중지성의정원 2019.11.03 0 2670
공지사항
[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3164
ludante 2019.02.10 0 3164
공지사항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2888
ludante 2019.01.27 0 2888
175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11강 - '덕육의 과신과 종교적 열광에 대하여' 발제문
deepeye | 2023.05.29 | 추천 0 | 조회 457
deepeye 2023.05.29 0 457
174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8강 - '문명사의 방법론' 발제문
deepeye | 2023.05.12 | 추천 0 | 조회 480
deepeye 2023.05.12 0 480
173
[공지] 05/13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세미나 공지
deepeye | 2023.05.12 | 추천 0 | 조회 374
deepeye 2023.05.12 0 374
172
[공지] 05/06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세미나 공지
deepeye | 2023.04.29 | 추천 0 | 조회 382
deepeye 2023.04.29 0 382
171
[공지] 04/15 『문명론 개략』 세미나 공지
sook | 2023.04.02 | 추천 0 | 조회 298
sook 2023.04.02 0 298
170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3강 - '서양 문명의 진보란 무엇인가' 발제문
deepeye | 2023.04.02 | 추천 0 | 조회 314
deepeye 2023.04.02 0 314
169
[공지] 04/01 『문명론 개략』 세미나 공지
deepeye | 2023.03.20 | 추천 0 | 조회 251
deepeye 2023.03.20 0 251
168
03/17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 마루야마 마사오 『문명론 개략을 읽는다』 세미나 공지
sook | 2023.03.12 | 추천 0 | 조회 291
sook 2023.03.12 0 291
167
[공지] 03/11 『문명론 개략』 새책 세미나 공지
deepeye | 2023.03.04 | 추천 0 | 조회 267
deepeye 2023.03.04 0 267
166
『학문의 권장』 제5편~제9편 발제문
deepeye | 2023.03.04 | 추천 0 | 조회 228
deepeye 2023.03.04 0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