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 나를 노예로 만드는 빚의 지배를 거부하라! / 안태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5-09 22:21
조회
1585
나를 노예로 만드는 빚의 지배를 거부하라!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 통치』 (갈무리, 2018)

안태호(협동조합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 이 서평은 2018년 4월 13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e_text&ps_boid=218

몇 해 전, 함께 일하던 동료는 일이 정말 하기 싫어지면 백화점을 간다고 했다. 거기서 실컷 카드를 긁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 명세서가 날아온다. 그 명세서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웃픈’ 농담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책 <부채통치>에서 놀랍도록 똑같은 상황을 발견한다.

“신용카드는 소비사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구매를 자극하고 권장하고 간편화함으로써 소비자/채무자를 흥분과 욕구불만의 악순환 속으로 밀어 넣는다. 무한한 부채는 무한히 반복되는 소비 활동이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이자 조건이다...(중략)... 카드 지불 시스템은 이렇게 해서 영원한 부채 구조를 확립한다.”

어떤가,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지금은 신용카드를 넘어 각종 핀테크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신용’을 기본으로 사람들을 부채 구조에 포섭한다는 데서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

부채, 빚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게으름이나 죄, 무능력에 가 닿아 있다. 종교적인 관념에서 연원하는 죄책감은 물론이고, 부채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리스트화하면 세상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든다. 부채는 공공의 재정을 파탄내고, 성장의 가능성을 잘라버리고, 실업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근본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나라 빚이 얼마라느니, 가계부채가 역대 최대라느니 하는 언론기사는 이런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잠 잘 시간마저 쪼개고 편의점에서 빈약한 음식을 섭취하며 장시간 고된 노동을 계속해도 빚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단지 개인의 ‘한심함’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저자는 부채가 개인의 문제, 혹은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있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부채는 무한하고 조절 불가능한 것이어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기제로까지 작동한다. 몇몇 이들은 아마도 그리스나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즉각적으로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 97년 금융위기 당시 국내에서 겪어야 했던 굴욕적인 민주주의의 후퇴양상만을 생각해 봐도 충분하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는 너덜너덜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형편없어졌다. 반면 재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놀라울 만큼 커졌다. 자본의 자유는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확장됐지만,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적, 민주적 모조품만이 허락되고 있는 것이 지금 세계의 모습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하의 부채는 예속과 종속으로 귀결되는 하나의 정치적 관계다. 부채는 사람들을 길들이고 구조개혁을 강요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 즉 자본의 이익을 따르는 '기술적 통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도구라고 본다. 저자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등을 프리즘 삼아 통치성 개념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한국에서는 정치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는 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랏자라또는 국가마저도 사실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 비록 국가가 큰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 비단 하나의 ‘국가 테크놀로지’에 그치지 않는다. 1970년대 이래 우리는 통치성의 사유화(민영화)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목격하고 있다. 통치성의 사유화는 더 이상 국가에 의해서만 수행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중앙은행들, 시장, 평가기관, 연기금, 국제지구 등) 비 국가 제도들의 집합에 의해 수행된다. 이러한 집합에서 국가 행정은 그것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이며, 중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여러 다른 요소들 중 하나 이상이 아니다. 이러한 점은 위기 시(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이라는) ’트로이카‘가 보여준 행위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제학자이자 예술가인 김재준 교수의 해제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어설픈 희망보다 완벽한 절망이 차라리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현재의 절망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인식을 확보할 것을 주문한다.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학자들은 아마도 결코 프랑스 철학자들을 읽지 않을 것이니, 결국 해결책은 경제문제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들이 수학, 통계학, 경제이론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만난 국사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법의 식민지적 기원을 연구하다가, 법학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절망적으로 없었기에, 스스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법학을 알게 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가 들뢰즈를 인용해 하는 말을 되새겨 보자. “걱정하거나 희망할 필요는 없고, 새로운 무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과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상황은 어느 모로 보든 낙관적이지 않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듯 래디컬(radical) 이라는 말은 급진적이라는 뜻과 함께 근원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워낙 압도적인 상황에서 근원적인 사고는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저자의 해법도 어찌 보면 무기력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부채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서 랏자라또는 ‘노동의 거부로부터의 출발’을 제시하며 맑스의 사위로 유명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를 가져와 게으른 행동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게으른 행동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최소한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거부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 속에서 그것에 의해 미리 확정되어 있는 어떤 정체성, 역할, 기능에 대한 거부이다. 결국 노동의 거부는 통치성 기술 일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노동거부의 잠재성을 다양한 영역에서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제안이다.

결국 부채 통치에서의 해방은 경제적 행위(부채상환)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거부)로부터 가능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는 대상의 작동원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랏자라또의 이 책은 부채 통치가 작동하는 양상과 원리를 세심하게 분석해놓았다는 점에서 값진 이론적 축적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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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기호와 기계』(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들뢰즈와 가따리의 기호론으로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빠올로 비르노,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안또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에까지 걸쳐 있는 언어중심적 정치이론을 비판하면서 물질적 흐름과 기계들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기호들을 분석한다. “자본은 기호로 움직인다.”는 가따리의 주장에 근거하여 “오늘날 비판이론은 언어와 재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고 있는가?”, “오늘날 기호들이 정치, 경제, 주체성의 생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묻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비재현적 주체 이론을 전개한다.

『사건의 정치』(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갈무리, 2017)

이 책에서 랏자라또는 현대 사상의 급진적 정치성을 되살리면서 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권력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등의 급진적인 현대사상을 바탕으로 바흐친과 빠졸리니, 라이프니츠와 타르드와 같은 이들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구제’하며 현실화한다. 가능성의 발명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는 『사건의 정치』는, 현대의 저항 정치가 가지고 있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크레디토크라시』(앤드루 로스 지음, 갈무리, 2016)

주택 소유자, 학생, 의료보험 없이 병을 앓는 사람, 신용카드 소지자 모두가 부채 상환에 허덕이며 흡사 빚구덩이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 사이에 대출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몸집을 키우거나 유례없는 고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입법자들은 은행 통제에 관한 한 철저하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앤드루 로스는 이 인상적이고도 괄목할 만한 조사연구에서 우리가 끔찍한 크레디토크라시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고 주장한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빚의 마법 : 화폐지배의 종말과 유대로서의 빚』(리차드 디인스트 지음,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5)

부채를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다루면서, 모두가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는 세계가 지닌 다양한 함의를 분석한다. 저자는 다양한 주제를 횡단하면서 현 채무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러한 채무 체제를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유대로 재구상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한편으로는 억압적인 채무 체제를 단호히 거부할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의존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회적 유대로서의 빚을 발명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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