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 생명성에 대한 시몽동의 사유를 정신질환에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작성자
absinth
작성일
2018-08-30 20:38
조회
584
시몽동을 공부하면서 ㅡ 사고실험 : 그의 사유를 정신질환에 적용해본다면?

전통적 사유는 언제나 '완성된 개체'를 중심으로 사유해왔다. 그리고 완성된 개체는 부지불식 간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부동의 것', 혹은 그리스적 사유의 관점을 따르자면 '운동하지 않는 것'은 '운동하는 것'에 비해 언제나 상위의 존재자적 등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질베르 시몽동의 사유 속에서 두 가지는 역전되고 만다. 부동의 안정성이 '완성된 개체'에 상응한다면 불안정성은 오히려 '개체화'에 상응한다. 그의 사유 속에서 중심이 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완성된 개체를 생각하기 전에 일단 그것의 개체화를 생각해 볼 것. 시몽동은 생명적인 것과 비생명적인 것을 다루면서, 생명적인 것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에 이른다. 우리는 완전한 생명에 대해 사유할 때 부지불식 간에 완벽하게 경계를 가지고 외부와 구분되는 하나의 닫힌 계로서의 개체를 상정하곤 한다. 그러나 시몽동에 따르면 생명이란, 열린 계로서 자신의 안에(이것은 '내부'의 동의어는 아니다) 최대한으로 불안정성을 양립하고 있는 무엇이다. 그것의 안에 많은 불안정성이 양립해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생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안정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정성들의 양립에서 오는 동적인 안정성과 그러한 양립의 실패에서 오는 부동의 안정성을.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개념적 실험을 '정신질환'의 범주로 끌어온다면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데,) 정신질환을 '불안정성'으로, '정상성'을 '안정성'으로 연결지어 사유하는 습관이 있다. 말 그대로의 '습관'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태는 전도되어 있는 건 아닐까? 건강한 정신이란, 사실 수많은 불안정성을 양립할 수 있는 역능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질환이란 사실은 이러한 불안정성에 대한 Tolerance가 부족한, 그러한 역능의 부족으로 사유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주관적인 느낌으로서의 '안정감'과 실재 그 자체 내에서의 '부동적 안정성' 사이에서 개념의 혼동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재의 부동적 안정성'은 '주관적 불안정감'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실재의 불안정성'은 '주관적 안정감'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체계 속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령 '주관적 불안정감'이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얼굴을 띠고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만난 어떤 환자 A는 자기 스스로 어떠한 결단을 내릴 수도 없다면서, 자기 안에 어떤 '주체성의 결여'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면담 내내 그는 특정한 관점과 시점을 가지고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라든지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라고 확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우습게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라면서 권위자의 조언을 요청하곤 했다. 그는 '불안정감'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그의 심적 상태는 지나치게 안정적,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직돼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 '결정과 판단의 유보'를 감당할 역능을 지녔다면 그는 그러한 유보를 단 1분도 못견뎌했던 것이다. '의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구'는 그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가령 그는 종교에 망상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내부에서 '주체성의 결여'를 느끼고 있었고, 언제나 '외부의 힘 있는 의견'을 필요로 했으며, 그러한 필요는 의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의견, '신의 의견'에의 추구를 야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혹자는 그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바람에 경직성이 유발되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불안정성의 양립이 실패의 지점으로 돌아가면서 야기되는 경직성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불안정감과 다양한 불안정성의 양립에서 오는 동적 안정성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안정감을 구별해야만 한다.

유사한 예를 여기 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성격장애'를 가졌다고 보이는 수많은 환자들은 많은 경우 약물이나 알코올에의 의존을 보이곤 한다. 정신분석학은 대부분 이러한 의존성을 과거 부모와의 관계로 역추적해 해석하곤 하는데, 쉽게 말해 그들이 어린 시절 자신들을 지지하고 보듬어 줄 양육자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을 물질에의 의존으로 보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건강한 사람들이 그러한 '보듬어주는 존재'를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반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를 외부에서 탐색한다고 말한다.

성격장애 계에서 불안정의 화신이라고도 불리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예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은 하나의 대상 안에서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양립시키지 못하고 'good object'와 'bad object'를 분열시키는 그들의 정신역동을 다루면서 이를 '불안정성'의 개념으로 다룬다. 그러나 사실 사태는 정반대다. 그들은 두 가지 대립이 하나의 대상 안에서 양립되는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하나의 안정적 상태로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애인에게 무한한 애정만을 보이다가도 그가 단 하나의 실수라도 보이면 그를 사정없이 공격하고 증오하기 시작하며,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혹은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외부의 타자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말을 정리해보자.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한계만 가지고서도 불안정성의 양립을 견뎌낼 역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질환의 범주에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한계만으로는 그러한 역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를 확장해 다른 존재자들에게 과하게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즉, 그들은 불안정성의 영역을 벗어나 안정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타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자기 자신만으로는 너무나도 쉽게 안정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불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시몽동의 말처럼 최대한 많은 퍼텐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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