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잔존 2, 3장 발제문입니다.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9-09-22 15:08
조회
313
2장 잔존

로슈는 바르트가 『카메라 루슈디』에서 사진이 “스타일”, “자유”, “산발성”의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위베르만은 로슈가 중요하게 보았던 ‘산발성’의 모티프를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의 “단속적인” 특징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시간들이 가시화하는지, 어떻게 역사 자체가 “이미지”라고 명명돼야 할 일시적인 섬광 안에서 우리에게 출현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개념이다. 즉 단속적인 이미지의 산발성은 우리를 반딧불로 인도한다.

반딧불은 정말로 파솔리니의 비관처럼 소멸했는가? 위베르만은 반딧불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소멸한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시야에 대해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반딧불이 “소멸”하는 것은 오로지 관찰자가 그것의 뒤를 쫓기를 포기하는 한에서일 뿐인 것이다. 관찰자가 머물던 장소에서 반딧불이 사라져도, 산발적인 조명을 통해 이미지(사진)를 만드는 사진가들은 빛에 민감한 눈을 뜨고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들은 또 한 무리의 반딧불이며, 동시대의 탈선과 감성과 이성을 개관한다. 위베르만은 이처럼 밤에 눈을 뜨고,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다시금 반딧불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도시의 온갖 오염과 서치라이트로 쇠약해져도 반딧불이 그들의 빛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는 관념의 연상 작용을 통해 『화씨 451도』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도시의 경계를 벗어나 책-인간들의 공동체를 발견하는 대목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반딧불이를 조명등 아래서 죽이고 실험하며 사물처럼 대하는 것은 사악한 행위다. 반딧불이를 알려면 그들이 잔존하는 현재 속에서 보아야 한다. 비록 사나운 서치라이트가 그 밤을 쓸고 다니더라도. 소수적인 문학(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가 프란츠 카프카와 관련하여 잘 보여줬던 것처럼)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수적인 빛’도 존재할 것이다. 그 빛은 소수적인 문학과 동일한 철학적 특징을 소유할 것이다. 말하자면, 똑같이 “강한 탈영토화 계수”를 지니고, “모든 것이 정치적”이고, “모든 것이 집단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민중과 민중의 주변화 자체에 내재한 “혁명적 조건들”을 말할 것이다.

1941년의 파솔리니는 로마 교외의 빈민구역에서 동시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비가시적-주변적, 소수적-이었던 인간성이 발견되는 지역에서 작업했고, “나는 이렇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나날을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75년의 파솔리니는 단일한 방식으로 총체성에 예속된 사회를 상정하게 된다. 그에게 그것은 ‘묵시록적인 전망’이다. 그 시기 그의 「생의 3부작」은 문화적 ‘관용’의 상업적 회로에 편입되었고, 이런 까닭에 불행히도 그의 절망은 확고하게 성적 욕망과 정치적 해방의 욕망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조명된’ 절망에 대립시켜야 할 것은, 반딧불의 살아 있는 춤은 어둠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며,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의 춤’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 파솔리는 절망적으로 오판하고, 그의 고유한 절망을 극단화 했을까? 왜 그는 우리에게 반딧불의 소멸을 창안했던 것일까? 위베르만은 말한다. 파괴된 것은 반딧불이 아니라 오히려 파솔리니의 보고자 하는 욕망-욕망 일반, 그러므로 정치적 희망-의 핵심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편 그의 몰락을 통해 위베르만이 진정 보고자 했던 것은, 파솔리니 자체가 아니라, 그의 흔적을 바탕으로 오늘날 성립되어 우리의 동시대적 상황에 대해 의미를 띠고자 하는 특정한 담론-시적인 또는 철학적인 담론, 예술적인 또는 논쟁적인 담론, 철학적인 또는 역사적인 담론-이다. 더도 덜도 말고 우리의 고유한 “희망의 원리”를 다시금 사유해야 하고, 그 사유는 ‘예전’이 ‘지금’을 만나서 우리의 ‘장래 ’자체를 위한 어떤 형식이 마련되는 하나의 미광, 하나의 섬광, 하나의 별자리를 형성하는 방식을 거쳐 진행되어야 한다. 반딧불이라는 작디작은 사례와 관련해서 이런 사실을 긍정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상상하는 방식’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치하는 방식’을 위한 조건이 놓여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나 아렌트가 칸트 철학에서 길어낸 일반적인 전제들로부터 출발해 전개해낸 방식, 또한 자크 랑시에르가 장기간 수행한 정치에 대한 성찰이 어떤 결정적인 전개의 순간에 이미지, 상상력, “감성계의 분배”에 대한 물음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예전’이 우리의 ‘지금’을 만나서 ‘장래’의 풍부한 별자리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상상력이 우리를 밝혀준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시간들의 만남, 즉 능동적인 현재와 그것이 상기하는 과거 사이의 충돌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파솔리니는 끊임없이 변신하는 이미지의 파괴할 수 없는 특징(잔존)을 알고 있었다. 즉 이미지는 이쪽에서는 전달되고, 저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잠복해 있고, 다른 쪽에서는 다시 나타난다. 이런 특징은 그의 가장 ‘동시대적인’영화들에서도 나타나며, 그것이 파솔리니 내에서 고대와 현대의 보증된 결합을 규정하는 것이고, 「리코타」에서 오슨 웰스로 하여금 “모든 현대인들보다 더욱 현대적인…… 나는 ‘과거’의 힘이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 파솔리니의 이야기 자체가 ‘예전’(컬러 촬영)과 ‘지금’(흑백 촬영)의 충돌로서 구축된다. 그 결과, 비록 가엾은 스트라치는 몹시 잔혹한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그 영화 전체는 역사(예술의 역사)와 현재(이탈리아 사회의 현재)의 관계에 대한 효과적이고, 교란적인 입장 표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1975년 파솔리니는 직전에 만든 세 영화를 폐기했으며, 「살로」의 지옥구렁에서 작업한다. 그는 모든 발칙함과 모든 변증법적인 유쾌함에 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부에서 소멸해버린 것은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것을 보는 능력이었고, 특히 이런 혐오스러운 역사의 현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현하는 것을 ‘순결한’ 새로움으로서 보는 능력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그런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제는 그 안에 머무르고 말았다.




3장 묵시록?

위베르만은 파솔리니와 아감벤 사이에서 각자의 사유가 취하는 일반적인 몸짓(gestus)을 보며, 부인할 수 없는 동족성을 예감한다. 그들의 입장은 도발적인 효과와 신랄한 공격을 자주 불러일으키며, 두 사람 모두 “고대와 현대 사이에 어떤 비밀스러운 만남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작업을 통해 악착같이 현재-맹렬히 비판된-를 다른 시간들과 연관시킨다. 그것은 동시대성에 대한 온전하게 정연한 성찰을 위해서는 ‘시간의 몽타주’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파솔리니처럼 아감벤도 ‘신성한’것이라는 합의 아래 인정된 사물들에 대한 위대한 신성모독자이다. ‘사케르'(sacer)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 인류학적 범례를 다시금 사유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게 그 반증이다.

아감벤이 역사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 첫 번째 책은 그 부제에 파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이 단어를 통해 현재적 시간에 관한 어떤 최종적인 진단이 선고된다. “경험에 관한 모든 담론은 오늘날 다음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즉 경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서 제공되지 않는다고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 글은 파솔리니가 반딧불의 소멸에 대한 글을 작성했을 때로부터, 불과 몇 달 지난 후에 동일한 논리로 작성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감벤은 일촉즉발적인 묵시록의 상황을 참조했으며, 역사적 파시즘이 아니라 벤야민이 1차 세계대전의 정신적 풍경을 제기했던 「이야기꾼」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근본적인 결여로 불가피하게 변형된다. 그리고 모든 변형은 파괴로서 사유될 것이다. 아감벤은 1975년의 파솔리니가 작업을 내려놓은 바로 그곳에서 작업에 착수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곳은 정확히 유년기에 대한 찬사-1941년의 편지에서부터 「생의 3부작」까지-가 모든 유년기에 대한 애도로 변형되는 그 지점이다. 여기에서 유년기에 관한 아감벤의 부정적이고 초월적인 정의가 나온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사실 유년기이다. 유년기는 랑그와 파롤의 차이에 관한 초월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물론 하나의 기원적인 경험이지만, 우리의 빈곤한 오늘날의 시대에 파괴되었을 경험이고, 반딧불이처럼 멸종되었을 경험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그가 작업하여 만들어낸 범례를 보면, 한쪽 극단에는 파괴가 있고, 다른 한쪽 극단에는 초월을 통한 일종의 구원이 있다. 예컨대 그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에 관해서 쓴 글을 보면, 아감벤은 “증언할 수 없는 것”과 “보는 것의 불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논의의 종착점에서 “온전한 증인”과 “절대적 이미지”라는 초월적인 조건을 거론한다. 『목적 없는 수단』에선 몸짓의 “절대적이고, 온전한” 차원과 그것의 비트겐슈타인적인 의미에서 “신비한” 가치는 오로지 애초의 파괴와 애도에 그 기반을 두고서만 긍정된다. “19세기 말, 서구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몸짓을 결정적으로 상실했다.” 마치 어떤 사물이든 먼저 우리의 공통 세계에서 소멸되었을-어떤 네오파시즘이나 스펙타클의 사회에 의해 파괴 되었을-경우에만 철학적인 존엄성을 지닐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파솔리니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묵시록적 전망”이 관건이다. 이들이 그것을 예고할 때,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묵시록적인 공간과 시간의 눈부신 빛 아래 놓이게 된다. 묵시록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한 중요한 형상이다. 묵시록은 다른 모든 잔존을 자신의 탐식하는 광명 속으로 흡수해버리는 잔존일 것이다. 그것은 강한 잔존이며 다른 모든 잔존은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 진리를 위해서는 현실이 파괴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묵시록적 어조’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묵시록적 어조’를 비판하며, 그것은 계시된 진리라기보다 오히려 계시의 진리이며, 이런 신비를 벗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임무는 종결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묵시록적 계략의 과잉-규정들과 미-규정들을 고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계략들의 윤리-정치적인 동기나 동기부여가 결코 단순한 것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전수자들’의 사유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광신적인 멘토부터 전체주의 지도자까지 모든 종류의 파국이나 구원을 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는 묵시록적 문장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인정하고자 하는데, 그 목소리(voix)는 니체나 모리스 블랑쇼의 경우처럼 발송(envoi)일 것이며, ‘오너라’(viens)와 같은 유형의 언표를 통해 가리킬 것이다. 그러므로 그 비판은 마침내 어떤 예고의 담론으로 해소되어버린다. 그 담론은 결정할 수 없는 방식의 “묵시록 없는 묵시록” 또는 “전망 없고, 진리 없고, 계시 없는” 진리일 것이다.

위베르만은 아감벤이 사로잡혔던 여러 이론적 난점을 우회해서 해명하려 한다. 예컨대 아도르노는 어떤 형이상학적 사유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어떤 신학적 세계에서 가져오는 경우, 그 신학적 세계를 다시 취하는 것이 전혀 신성모독이 아니라면, 그 형이상학적 사유는 세속화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사유되지 못한 부활’에 대해 비판한 맥락을 살펴보자. 예컨대 하이데거는 삶의 경험이 죽음과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특징, 실증종교가 결정적으로 퇴조하면서 우리에게 드러난 이런 특징을 제거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경험의 구조들을 구해내려 한다. 그렇지만 그가 기술하는 이런 구조들은 오직 신학의 실증적인 세계 내에서 부활에 대한 실증적인 소망의 명목 아래에서만 실존한다.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의 저작에서 암암리에 수용한 이런 구조를 세속화하게 되면 단순히 학적 내용들이 붕괴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신학적 내용들 없이는 죽음에 대한 경험 자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직 종교적 전통만이 인간적 사태의 모든 묵시록과 파괴를 넘어서는 구원을 약속하는 법이라면, 잔존은 단지 내재적인 역사적 시간에만 관련된다. 잔존은 어떠한 구원의 가치도 지니지 않으며, ‘잔존의 정치’는 종말의 시간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잔존의 역량에 관한 인류학적 성찰은 전통의 권력에 대한 철학적 가정으로 모호하게 이행한다. 아감벤이 사도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대해 해석할 때가 그러하다. 그의 해석은 벤야민적인 이미지의 시간을 “읽을 수 있”고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지금”으로서 소중하게 참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신학적 지평을 재전유하며 그것을 하나의 정치적 범례로 만든다. 이런 특징은 아감벤의 근래 저작 『왕국과 영광』에서 드러난다. 벤야민의 독자로서 아감벤은 이미지의 철학자이고, 여기에서 도출되는 문헌학적 방식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몸짓, 문자, 얼굴, 미광 속에 감추어진 역량을 감탄하며 발견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독자로서 아감벤은 각각의 이미지 배후에서 지평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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