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p.216 - 226

작성자
pyu
작성일
2019-11-03 09:50
조회
807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본 비극, 희극, 역사, 신앙

시간의 마지막 종합 안에서 볼 때, 현재와 과거는 이제 미래에 종속하는 차원들에 불과하다. 즉 과거는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재는 행위자로서 미래에 속한다. 첫 번째 종합, 습관의 종합은 시간을 어떤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했고, 이런 구성은 과거와 현재가 의존하는 어떤 수동적 정초 안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종합, 기억의 종합은 시간을 어떤 순수 과거로 구성했고, 이런 구성은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또 다른 현재가 도래하게 하는 어떤 근거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 번째 종합에서 현재는 제거될 운명에 처한 배우, 저자, 행위자에 불과하다. 과거는 결핍에 의해 작용하는 어떤 조건에 불과하다. 시간의 종합은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어떤 미래를 구성하고, 이 미래는 조건에 대한 생산물의 무제약적 특성을, 저자나 배우에 대한 작품의 독립성을 동시에 천명한다. (...) 현재는 반복을 일으키는 어떤 것에 해당한다. 과거는 반복 자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래는 반복되는 것에 해당한다. (...) 최상의 반복은 미래의 반복이다. 이 미래의 반복을 통해 다른 두 반복은 종속적 지위에 놓이고 따라서 자율성을 상실한다. 사실 첫 번째 종합은 단지 시간의 내용과 정초에만 관련된다. 두 번째 종합은 단지 시간의 근거에만 관련된다. 하지만 그 너머의 세 번째 종합은 시간의 순서, 집합, 계열, 그리고 최종 목표를 마련해준다.

신앙인은 조건을 박탈당한 상태에 놓여 있는 한에서 비극적인 죄인으로 살아가지만, 그 조건 안에서 이분화되고 반조되는 한에서는 또한 희극배우나 광대로, 자기 자신의 허상(시뮬라크르)으로 살아간다. 두 신앙인은 웃음 없이 서로를 쳐다볼 수 없다. 은총은 결여되어 있을 때 못지않게 주어져 있을 때도 배제한다. (...) 어떻게 신앙이 대상으로 삼는 반복 - 역설적이게도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 진행되는 반복 - 이 희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반복 아래에는 또 다른 반복이 포효하고 있다. 거기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은 니체적 반복, 영원회귀의 반복이다. (...) 영원회귀는 어떤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이다. 즉 영원회귀는 분신이나 허상을 고립시켰다. 영원회귀는 희극성을 해방하여 초인의 요소로 만들었다. (...) 영원회기는 어떤 교의라기보다 모든 교의의 허상(지고한 반어)이며, 어떤 믿음이라기보다 모든 믿음의 패러디(지고한 해학)이다. 즉 영원회귀는 영원히 미래로부터 도래하고 있는 믿음이자 교의이다.


4절
반복과 무의식 : “쾌락원칙을 넘어서”

생물심라학적 삶은 어떤 개체화의 장을 함축한다. 이 장 안에서 강도의 차이들은 자극이나 흥분들의 형식을 취하는 가운데 여기저기 분배된다. 이 차이의 해소 과정, 질적인 동시에 양적인 이 해소 과정은 쾌락이라 불린다. 이렇게 강도적 장에서 일어나는 차이들의 유동적 할당과 국소적 해소들이 어떤 총체를 이룬다면, 이 총체가 프로이트가 이드라 불렀던 것, 적어도 이드의 첫 번째 층에 해당한다. (...) 어떻게 쾌락은 과정이기를 멈추고 다시 어떤 원칙이 되는가? 어떻게 쾌락은 국소적 과정이기를 멈추고 이드 안에서 생물심리학적 삶을 조직화하는 경향의 어떤 경험적 원리의 자리에 올라서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쾌락이 쾌락을 낳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는 쾌락이 어떤 체계저인 가치를 띠고 있고, 따라서 ‘원리적으로’ 탐구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 프로이트의 답변에 따르면, 자유로운 차이로서의 흥분은 말하자면 “리비도의 집중이 일어나야 하고” “묶이고” 결박되어야 하며, 그 결과 흥분이 체계적으로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묶기 혹은 리비도 집중을 통해 비로소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결코 쾌락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쾌락이 획득하는 원리적 가치이다. 그래서 여기서 어떤 이행이 일어나는 셈이다. 그것은 분산적인 해소의 상황에서 어떤 통합의 국면으로 옮겨지는 이행이다. 이 통합의 국면을 통해 이드의 두 번째 층 혹은 어떤 조직화의 첫 단계가 구성된다.

첫 번째 종합과 묶기 : 하비투스

그런데 이 묶기는 진정한 재생의 종합, 다시 말해서 어떤 하비투스이다. 동물이 스스로 눈을 형성해낸다면, 이는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빛의 자극들을 자기 신체의 특권적인 한 표면 위에서 재생되도록 규정하기 때문이다. 눈은 빛을 묶는다. 눈은 그 자체가 어떤 묶인 빛이다. (...) 리비도 집중들, 묶기나 통합들, 이것들은 수동적 종합들이자 이차적 등급의 응시-수축들이다. 충동들은 묶인 흥분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각각의 묶기가 일어나는 수준마다 어떤 하나의 자아가 이드 안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이 자아는 수동적이고 부분적이며 애벌레 같은 자아, 응시하고 수축하는 자아이다. 이드는 국소적 자아들이 서식하는 장소이다. 이 국소적 자아들을 통해 비로소 이드에 고유한 시간, 살아 있는 현재의 시간이 구성된다. 묶기에 상응하는 통합은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 이 자아들은 그 자체로 나르키소스적이다. 이때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의 응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물을 응시할 때 충만하게 차오르는 어떤 자기 이미지이다. 가령 눈, 바라보는 자아는 자신이 묶는 흥분을 응시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된다. 이 자아는 자신이 응시하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산출하거나 ‘훔쳐낸다’. 그렇기 때문에 묶기에서 생기는 만족감은 불가피하게 자아 스스로의 ‘환각적’ 만족감이다. (...) 이런 모든 의미에서 묶기는 어떤 순수한 수동적 종합을 대변한다. 그것이 대변하는 것은 곧 어떤 하비투스, 정확히 말해서 만족감 일반을 설명하는 원리의 자격을 쾌락에 부여하는 하비투스이다. 이드의 조직화, 그것은 바로 습관의 조직화이다. (...) 쾌락원칙은 묶기의 효과로서 출현한다. 이 원칙을 전제하는 그 어떤 것도 묶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쾌락이 원칙의 지위에 오를 때, 오로지 그때에만 쾌락의 관념은 어떤 회상이나 기획 안에서 그 원칙에 포섭된 것으로 작용한다. 이때 쾌락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성을 넘어서서 어떤 만족감 일반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 흥분의 반복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 진정한 목적은 수동적 종합을 쾌락원칙과 그것의 미래 적용이나 과거 적용이 모두 유래하는 어떤 역량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있다. 그러므로 습관 안의 반복 혹은 묶기의 수동적 종합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 이 최초의 ‘넘어서’는 이미 일종의 초월론적 감성론을 구성하고 있다. (...) 앞의 분석들에 힘입어 우리는 수용성이 국소적 자아들의 형성을 통해, 응시나 수축의 수동적 종합들을 통해 정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수동적 종합들은 감각 체험(검사)들의 가능성은 물론 감각들을 재생하는 역량, 그리고 쾌락이 장악한 원리의 지위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수동적 종합에서 시작하는 이중의 발전 과정이, 그것도 아주 다른 두 방향에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수동적 종합들의 정초 위에 어떤 능동적 종합이 확립된다. 여기서 능동적 종합의 본성은 묶인 흥분을 하나의 정립된 대상 - 현실적인 것으로, 행위들의 종착점으로 정립된 대상 - 에 관계시키는 데 있다. (재생의 수동적 종합에 의존하는 재인의 종합) 능동적 종합을 정의하는 것은 이른바 ‘대상적 주-객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현실 검사이다. (...) 수동적 자아들은 이미 어떤 통합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국소적 적분들에 불과하다. 반면 능동적 자아는 총괄적 적분을 시도한다. (...) 현실 검사는 자아의 모든 능동성을 동원하고 부추기며 고취한다. (...) 당장의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은 쾌락 자체가 끌어안게 되는 원칙의 역할 안에, 다시 말해서 쾌락의 관념이 과거와 미래에 대해 취하는 역할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사태이다. 의무가 없는 원칙은 없는 법이다. 현실과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체념들은 쾌락원칙이 장악한 여백이나 범위에서 서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실원칙은 단지 선행의 수동적 종합들에 정초를 두고 있는 한에서의 어떤 능동적 종합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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