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46~56p 발제문

작성자
영수
작성일
2021-10-31 11:17
조회
316
디오니소스는 나타나는 모든 것- 가장 모진 고통조차- 긍정하는 것으로서, 비극의 본질은 다수의 긍정이나 복수적 긍정이다. 여기에는 복수주의 pluralism의 노력과 천재성, 즉 변신transformation의 능력, 디오니소스적 사지 찢음Dionysian laceration이 필연적이다. 니체의 저작 속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불안이나 혐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모든 것이 긍정의 대상, 즉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이 긍정되고,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을 특별한 수단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비극은 그런 불안이나 혐오 속이나,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향수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극을 다수성multiplicity, 즉 긍정 자체의 다양성diversity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비극은 다수성의 기쁨이자 복수적 기쁨plural joy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때의 기쁨은 승화, 정화, 보상, 체념, 화해의 결과가 아니다. 비극은 기쁨에 대한 미적 형식일 뿐, 의학적인 처방도, 고통이나 공포, 연민에 대한 도덕적인 해소도 아니다.
비극적인 것은 기쁨이다. 이는 정신적 승화나 의학적 정화다. 교화하려곤 하는 병적인 청자에게 공포와 연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니체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반-변증법과 반-종교적 꿈은 다수적 긍정의 논리, 그래서 순수 긍정의 논리이며, 이에 상응하는 기쁨의 윤리이다.
비극은 삶과 부정적인 것the negative의 관계 속이 아니라, 기쁨과 다수성, 긍정적인 것the positivity과 다수성, 긍정affirmation과 다수성이라는 본질적 관계에 토대하고 있다. 비극이라는 솔직하고 역동적인 명랑성gaiety.
니체는 <비극의 기원>에서 (바그너로 대표되는) 모순이라는 기독교적 파토스의 비극관을 포기한다. 바그너는 극적인dramatic 음악을 위해서 음악의 긍정적 성격을 포기했다. 이에 반해 니체는 영웅적 표현의 권리, 즉 명랑한 영웅, 경쾌한 영웅, 춤추는 영웅, 놀이하는 영웅을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의 기쁨, 가벼운 우아함buoyant gracefulness, 운동성과 편재성을 인지하기.
변증법 일반은 세계에 대한 비극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극의 죽음이고 이론적 개념에 의한 (소크라테스), 기독교적 개념에 의한(헤겔) 비극적 시간에 대해 대체하는 것이다. 헤겔의 청년기 저작 속에서는 변증법의 최종 진리, 즉 현대의 변증법인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를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는 삶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킨다.
그럼에도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와 비극적 사유 사이에는 존재existence의 의미에 관한 문제의 공통점이 있다. “존재에는 의미가 있는가?"라는 문제, 존재의 의미 문제는 해석과 평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가장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철학의 가장 높은 차원의 물음이다.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미이고, 니체의 전 저작은 이 물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러한 물음을 잘못 이해하면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존재를 잘못되거나 유죄인 것,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사람들은 신이 필요하게 되고, 삶을 속죄하기 위해 신을 비난하거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속죄해야만 한다. 쇼펜하우어는 존재에는 성스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하는 무신론자였는데, 그런 그마저 기독교의 금욕적 진실인 도덕적 관점의 그물망 속에 사로잡혀 순수한 타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가 존재를 고통에 의해서 정당화하는, 즉 숭상하고 신성화하는 대신, 고통을 포함해 긍정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진실된 비극적 방식은 무엇인가?

9. 존재의 문제
존재의 의미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적 기원에서 연원하는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고통을 이용해서 존재의 부정의injustice를 입증하려고 했고, 동시에 존재에 대해 고상하고 신성하게 정당화하려고 했다. (존재는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죄인이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속죄되고 대속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를 과잉/과도함excess으로 해석하고 평가했다(과도함démesure으로서의 현존, 즉 넘쳐남hybris으로서의 현존, 죄로서의 현존). 존재는 가장 먼저 거인족Titanic 이미지를 부여받았다. 인간은 존재에 대해 과도하게 부정의를 부여했고, 동시에 정당화하는 속죄의 본성을 부여했다. 죄를 통해 존재를 거인으로 만들고, 속죄를 통해 존재를 신으로 만든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존재들은 시간의 질서를 따라서 자신들의 부정의의 고통과 사죄를 서로에게 갚는다."라고 말했다.
(1) 생성은 부정의addikia이고, 존재하게 되는 것들의 복수성은 부정의 총합이다.
(2) 그것들은 서로 투쟁하고, 자신들의 부정의를 프토라phtora를 통해 서로에게 속죄한다.
(3) 그것들 모두는 원초적 존재original being/"Apeiron"에서 파생하는데, 자신들을 파괴하면서 영원히 자신들의 부정의를 속죄하는 생성으로, 복수성으로, 생식generation으로 전락한다. 쇼펜하우어는 현대판 아낙시만드로스이다.
기독교에 비해 그리스인들은 존재를 죄를 범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죄인으로 만들지만, 과실이 있는 것,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거인족들조차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놀랄 만한 발명인 가책, 잘못, 책임을 알지 못한다.
니체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았다. 니체에게 아드리아네는 최초의 비밀이고, 여성의 최초의 힘이며, 영혼the anima이고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서 분리할 수 없는 약혼녀이다. 그것은 극성스럽고 부정적이며 훈계하길 좋아하는 여성의 힘, 끔찍스러운 어머니, 선과 악의 어머니, 삶을 비하하고 부정하는 어머니와 완전히 다르다. 잘못과 책임의 전가, 가시돋힌 힐난, 원한resentment은 존재에 대한 경건한 해석이다. 니체는 인간의 역사에서 “복수의 본능”을 보았고, 원한 속에서, 가책 속에서, 공통의 결실 속에서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사유의 근본적 범주, 즉 존재를 사유하고 해석하는 일반적 방식을 보았다.
니체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상, 새로운 해석, 다른 사유 방식이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무책임성에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완전한 무책임성을 쟁취하길 원했고, 칭찬과 비난에서, 현재와 과거에서 나를 독립시키킬 원했다."
그리스인들이 존재에 죄가 있다고 판단해 죄를 지은 존재, 지나친/오만한 현존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신이 인간들을 미치광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죄인이지만, 그들에게 잘못의 책임을 지게 한 것은 신들이다! 이것이 최crime에 대한 그리스적 해석과 죄악sin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큰 차이이다. 죄에는 죄인의 책임성이 함축되어있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의 변화, 즉 타이탄 대신 이브이고, 관람하는 신들과 "올림픽의 판관들"을 대신해 신들 속에서의 변화, 정의를 행하고 사랑하는 유일신이다.
존재가 유죄인데 그에 책임이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존재가 유죄냐 아니냐가 문제가 된다. 이때 디오니소스는 결백innocence, 복수성의 결백, 생성의 결백, 존재하는 모든 것의 결백이라는 다수의 진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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