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절대민주주의적 '애국'이 어떻게 가능할까?/조정환

시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7:51
조회
700
절대민주주의적 '애국'이 어떻게 가능할까?


1. '나라다운 나라'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국민-다중의 명령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로 그 명령을 이행하는 나라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나라다운 나라'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국민-다중의 의지들을 정치적 평면에서 결집하고 실행하는 정치적 공동체로서만 존속할 수 있다.

2. '애국심'은 그러한 나라에 대해 국민-다중이 갖는 사랑 이외의 것이 아니다. 애국심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는 국민-다중의 마음이며 '나라 다운 나라'에 대해 국민-다중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정동이다.

3. 국민-다중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만큼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상상과 의지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 다양성은 계급적 성적 인종적 지적 차이와 같은 거시적 차이에서 연유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의 생물적 취향적 차이와 같은 미시적 차이에서도 연유한다.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이 이질적 상상과 의지는 결코 나라됨의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라다운 나라의 생산력이며 그 나라의 건강함을 보장하는 조건이다.

4. 지금까지의 많은 국가들은 국민-다중의 이 다양성과 이질성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억누르고 특정 분파의 이익만을 국가의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국민-다중의 의지와 대립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대개 자본가라고 불리는 작은 분파의 이해관계가 국가를 지배하면서 국가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다중의 의지와 적대하는 위치에 놓였다.

5. '애국(심)'이 위로부터 강요되는 심성/태도로서 하나의 억압 기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에 대한 사랑을 강제하는 것은 폭력이며 범죄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애국을 이처럼 범죄적으로 강제하는 나라일 수 없다. 국민-다중과 적대하기는커녕 국민-다중의 생각, 감정, 의지를 존중하고 그것들이 자유롭게 다채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통장을 만들어가는 나라만이 나라다운 나라일 것이다.

6.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797656.html)는 국민-다중과 국가의 적대를 완화시키려는 지적 정신적 노력을 담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애국의 통념을 독점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국가밖으로 추방되었던 사람들, 그래서 국가와 적대하는 입장에 섰던 다중들과 그들의 삶의 노력들을 '애국'의 노력으로 이해하고, 당시 국가에 대한 그들의 적의을 애국심으로 포괄하려는 해석적 실천을 통해서 표현된다.

7. 항일의병부터 광복군까지의 독립운동은 나라답지 못한 일본국에 대한 적대감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5.18과 6월항쟁은 국민-다중의 헌법의지에 반해 국가를 탈취하고 국민에 대해 폭압을 행사한 전두환군사정권에 대한 적대감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국민-다중을 섬기기보다 억압하는 국가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투쟁이 둘 사이의 공통점이다.이것들을 애국행위라고 단언함으로써 추념사는 현존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거부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애국행동일 수 있는 정치적 개념공간을 연다.

8. 추념사는 정치적 행동만이 아니라 경제적 행동과 일상적 삶을 애국적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공간도 연다. 파독광부나 파독간호사,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의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적 삶과 노동이 애국행동이라고 말함으로써다.

9.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삶의 공간을 모두 애국의 장으로 설명한 후 추념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로 애국의 힘과 실재성을 "국민"에게 돌린다.

10.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위험하다. "국가를 위한 헌신"이라는 말만큼 억압적이었던 말은 없다. 애국의 실재적 힘인 국민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갈 뿐 국가를 위해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헌신해야지 국민이 국가를 위해 헌신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국민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는 어떤 경우에도 나라다운 나라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반역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국민은 국가가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때 국가를 수호하게 되고 국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할 때 반역하게 된다. 추념사도 인정하고 있듯이 국가수호와 국가에 대한 반역이 모두 애국일 수 있다. 심판 되어야 할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지 국가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11.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한 다양한 노선의 투쟁들이 애국투쟁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상해를 거점으로 했던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우파 독립투쟁만이 아니라 박헌영, 김두봉, 김일성으로 상징되는 국내, 연안, 만주 등에서의 반일 좌파 독립투쟁들, 그리고 당대의 불의한 지배권력에 맞섰던 노동자들 농민들 학생들 등의 여타의 다양한 형태의 투쟁들도 애국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2. 다른 국민들의 삶과 행복을 짓밟는 것도 우리 국민의 애국일 수 있을까? 2002년 대한민국을 연호한 붉은 악마들은 다른 나라 팀들을 응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나라사랑도 공감할 능력을 갖는다. 애국의 실재적 힘이 국민에게 있는 한에서 애국은 다른 국민들이 사랑하는 나라, 그들의 삶과 행복을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방어전쟁은 애국의 형식일 수 있지만 침략전쟁은 나라다운 나라를 파괴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침략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에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강대해진 국가에 복종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그러한 나라는 더 이상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게 된다.

13. 그러므로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라는 말은 이기적이다. 베트남의 국민-다중들은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침공한 적이 없다. 조국경제(돈벌이)를 이유로 다른 나라 국민들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나라다운 나라'의 국민들이 할 일이 아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다른 국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고 나라를 나라답지 못하게 실추시키는 것이다. 나라답지 못한 나라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하는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원하는 국민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애국 행동으로 볼 수 없다. 베트남 참전은 국가가 국민을 경제발전과 이념에 이용한 경우인 만큼, 참전했던 국민들에게 국가가 사죄하고 피해보상을 해주어야 할 사례이다.

14. 애국의 개념을 통해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애국의 특정한 방식과 노선을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나라는 더욱 첨예하게 분열되어 나갈 것이고 나라는 나라로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애국의 방식, 노선을 광범위하게 넓히려는 추념사의 방향은 옳다. 하지만 추념사는 고 권정생 작가로 하여금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애국애족자가 없다면/세상을 평화로울 것이다"(<애국자가 없는 세상>)라고 노래하도록 만들었던 지금까지의 애국 개념의 저 어두운 그림자를 충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애국의 특정한 이미지를 국민에게 요청하고 심지어 부과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것의 효과는 국민의 통합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라답지 않은 나라들이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항상 먹이감으로 노려온) 국민의 분할과 분열일 것이다. 국민은 특정한 경향, 특정한 노선 속에서 통합될 수 없다. 국민의 통합은 국민들을 어떤 동일성으로 묶어냄으로써가 아니라, 국민들이 완전한 이질성과 다양성 속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열어놓고도 그 자유로운 차이들이 상생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놀이공간(즉 공통체)으로서의 나라를 구축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다.
전체 0

전체 484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444
[77호] 『건축과 객체』에 대하여 / 그레이엄 하먼 『건축과 객체』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ludante | 2023.08.19 | 추천 0 | 조회 646
ludante 2023.08.19 0 646
443
[77호] '실재론적 마술'을 읽고ㅣ탁선경
자율평론 | 2023.07.24 | 추천 0 | 조회 406
자율평론 2023.07.24 0 406
442
[76호] 이름 없는 독립영화만이 가진 가치가 있다ㅣ채희숙
자율평론 | 2023.06.14 | 추천 0 | 조회 617
자율평론 2023.06.14 0 617
441
[76호] 이름 없는 영화들의 장소ㅣ박동수
자율평론 | 2023.06.14 | 추천 0 | 조회 400
자율평론 2023.06.14 0 400
440
[76호]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ㅣ박소연
자율평론 | 2023.06.14 | 추천 0 | 조회 480
자율평론 2023.06.14 0 480
439
[76호] 『카메라 소메티카』, 영화라는 존재를 성찰하다ㅣ이준엽
자율평론 | 2023.06.14 | 추천 0 | 조회 410
자율평론 2023.06.14 0 410
438
[76호] 인류가 사라진다면, 지구는 인간을 그리워할까ㅣ박범순
자율평론 | 2023.06.14 | 추천 0 | 조회 446
자율평론 2023.06.14 0 446
437
[76호] 저항하고, 나를 지키고, 주변을 돌보는 우리는, 마녀의 후손이다ㅣ지혜
자율평론 | 2023.06.13 | 추천 0 | 조회 476
자율평론 2023.06.13 0 476
436
[76호]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ㅣ오온
자율평론 | 2023.06.13 | 추천 0 | 조회 392
자율평론 2023.06.13 0 392
435
[76호] 페미사이드, 경제구조적 맥락을 간과하지 말라ㅣ김미선
자율평론 | 2023.06.13 | 추천 0 | 조회 338
자율평론 2023.06.13 0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