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호] 세계를 바꾸는 기술 / 손보미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2 23:19
조회
1455
세계를 바꾸는 기술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 (갈무리, 2017)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 이 서평은 2018년 1월 5일 웹진 <문화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7AvfgR


<일상생활의 혁명>의 원제는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흥미로운 제목이다. 책의 주석 부분(후주) 가장 첫 번째 항목을 보면 제목에 관한 재밌는 사실을 더 알 수 있다. 영어권에서 이 책은 각기 다른 번역자에 의해 두 번 출간되었던 것 같다. 첫 출간 때 붙여 졌던 제목이 바로 <일상생활의 혁명>이다. 후에, 저자인 라울 바네겜의 도움을 받아 다시 책을 번역했던 도날드 니콜슨-스미스는 제목을 보다 원제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싶어 했다. 그가 번역한 제목은 '처세술의 기초원리: 최근 세상에 안주한 젊은이들을 위한 안내서'였다. 하지만 이 제목은 결국 포기되었는데, 기존 영어판의 제목 <일상생활의 혁명>이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각과 궁금증이 떠오른다. 이 책이 출간되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돌이켜 보면 더욱 그렇다. 저자 라울 바네겜은 1967년 프랑스에서, 그것도 왜 하필 젊은 세대를 향해 삶의 지침 혹은 처세술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어떤 지침이나 기술을 담은 책은 그것들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직 얻지 못한 자의 손에 닿았을 때 가장 빛난다. 삶의 방향을 일러주거나 처세의 기술을 담고 있는 책도 자연스레 그러한 것들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을 향할 것이다. 이러한 자들을 사회는 '부적응자'라 부른다. 아직 삶의 방향을 뚜렷이 알지 못해서 자신에게 적합한 삶의 기술을 찾기 위해 계속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기존 사회의 시선에는 서툴거나 혹은 불합리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삶의 지침과 처세술의 원리들이 그들의 손에 가 닿길 바랐다. 그리고 어느샌가 '부적응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버렸을지 모를 젊은 세대가 각자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을 꼭 연마할 수 있길 바랐다. 또 그럼으로써 시대가 바뀌기를 바랐다.

수많은 지침서와 처세술 책들이 있다. 그것들을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책'이고, 둘째는 '시대를 바꾸기 위한 책'이다. 이 둘은 모두 '부적응자'라 불리는 자들을 향하지만, 그들에게 도달하는 것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즉 그들이 어떤 방향의 기술을 연마하느냐에 따라 그려지는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서문에서 바네겜은 <일상생활의 혁명>이 시대를 읽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시대를 바꾸는 책이라 말한다. 저자는 시대에 적응하는 기술이 아닌 시대를 바꾸는 기술을 연마할 것을 당부한다.

<장면1> 길이 제멋대로 얽혀있는 길쭉하고 좁은 땅 안으로 가난한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집값이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밀린 화구값을 받으러 온 수금원을 따돌리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도시 안에서 최적의 장소를 발견한 화가들은 그곳에 모여들어 '예술인 마을'을 만들었다.

예술인 마을에 정착한 이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걸작을 그리겠다는 꿈을 품고 도래할 '그날'을 위해 광고나 소설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하지만 아무리 일해도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궁핍한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미로와도 같은 길은 수금원을 따돌리는 데는 유용했지만, 곳곳에서 출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청객들까지 막아 주지는 못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하자, 젊은 화가는 기약 없는 '그날'을 의심하며 병이 들고, 늙은 화가는 살아서는 결국 '그날'을 맞이하지 못한 채 죽는다.

소설가 오 헨리가 보여주는 20세기 초반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모습이다. 가난한 작가로 자신도 그곳의 값싼 아파트에서 글을 썼던 오 헨리는 작품 '마지막 잎새'를 통해 대도시 속 가난한 예술가들의 비참한 겨울 풍경을 기록했다. 하지만 후에 이 이야기는 병든 소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노화가의 숭고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짧고 강렬하게 압축된 '마지막 잎새'의 숭고한 희생 이미지가 발휘하는 효과는 책의 1부에서 바네겜이 자주 언급하는 희생의 변증법과 닮았다.

병든 나약한 소녀(원작에서는 병든 젊은 화가)의 구원이 노화가의 숭고한 희생과 연결되는 순간 우리가 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곳에 놓여있던 근본적으로 비참한 삶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들의 자기희생이 늙은 예술가의 희생이라는 따뜻한 반전의 포장지에 가려져 잊힌다. 이렇게 포장된 아름다운 죽음은 즐거운 축제가 되어야 할 혁명의 장소를 거룩한 장례식장으로 만든다. 혁명은 완수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포장된 이미지는 그 유통기한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숭고한 희생의 이미지가 어느덧 그 힘을 다하면, 곧이어 멋진 자유의 이미지가 바톤을 이어받는다. '마지막 잎새'의 배경이 되었던 그리니치 빌리지는 이제 세련된 관광상품이 되었다. 상품을 구매한 관광객들은 에드워드 호퍼가 걸었던 거리를 걷고, 밥 딜런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지금은 모두 떠나버린 보헤미안의 흉내를 낸다. '예술가의 거룩한 희생'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자유롭고 멋진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권력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그리니치 빌리지를 뒤덮는 겉모습의 망을 조직한다.

"일반화된 겉모습의 망은, 또는 사적 소유(존재의 소유를 통한 사물의 소유) 운동에 의해 처음부터 요구된 본질적 거짓말은, 확고히 희생의 변증법에 속하고 그 유명한 분리의 기반이 된다." (147)

가난한 화가들에게는 동시에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걸작을 그려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이 두 가지 의무는 반드시 함께 기억되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절대 헷갈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들은 화가의 소명이라 여겨지는 첫 번째 의무를 완수하고 완전한 행복과 자유를 얻게 될 그 날을 위해 두 번째 의무에 매진한다. 모든 이가 그날을 꿈꾸며 부지런히 일하는 동안 이 세계는 아주 잘 유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의 책략도 언젠가는 그 바닥이 드러난다.

<장면2>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들을 의심하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자유와 행복을!"이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이들이 모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세계에 균열을 낸다. 도시 곳곳에 처져 있던 가림막들이 무너지고 불타오른다. 격렬한 투쟁의 장소가 만들어진다.

<장면3> 파괴의 축제가 한창이던 이때, 어디선가 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칠고 우렁찬 목소리로 가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자가 어느샌가 저 혼자 뒤돌아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타이르고 있다. 그의 품 안에는 군데군데 털이 그을린 작고 하얀 강아지가 안겨 있다. 그는 구슬픈 목소리로 이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모든 걸 현실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현실적인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하지만 꽤 재밌는 강아지와 고양이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가 문득, 우리의 요구를 재빠르게 실현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 세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권력의 힘은 복지국가라는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균열들을 봉합했다. 봉기를 일으켰던 이들의 구호는 '기본적인 생존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요구로 축소되고, 여기에서의 '인간다운 삶'은 '적정수준의 여가 시간을 보장받을 권리'가 되었다.

바네겜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던 수많은 지배 권력의 공통 기반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늘 모습을 달리하며 저마다 다른 통치술을 사용하지만, 목적은 오직 하나, 주인-노예의 관계로 조직된 위계적인 사회구조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공통기반과 비교하면드러나는 겉모습의 다양함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다. 이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야만 그것이 어떻게 변신하든 그 힘의 추한 본성을 꽤 뚫어 보고 식별해 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이러한 식별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권력은 이제 더는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위세 좋던 주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또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주인-노예의 위계적 구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힘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 세계를 수동의 관계로 완전히 재편하겠다는 의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라져 버린 주인들의 행방도 그리 미스테리하지만은 않다. 이 수동화 프로젝트의 최종 목적지가 '주인 없는 노예들의 사회'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뿐이니 말이다.

<장면4> 젊은 예술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돈을 벌어야 하긴 하지만, 이제는 급여도 꽤 올랐고 법적으로 보장받은 여가 시간도 있었다. 또무엇보다 걸작을 만들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자유를 느꼈다. 하지만, 이 자유의 느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에게는 행복을 누릴 얼마간의 돈과 시간이 있었다. 그는 원한다면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얼마 전에 구매한 최고사양의 카메라를 들고 야외로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게 귀찮아졌다. 왠지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변한 게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세계는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는 과연 자신이 예술가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젊은 예술가의 절망이 심상치 않다. 그는 허무주의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허무주의자란 무엇일까? 바네겜은 러시아 비평가 로자노프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답한다.

"공연은 끝났다. 관객이 일어선다. 외투를 걸치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뒤돌아보니 외투도 집도 없다." (241)

책의 18장(불안정한 거부)에서 바네겜은 초월의 문제와 함께 허무주의자에 관해 쓰고 있다. 허무주의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결과로써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역사를 추동하는 인간의 중요한 본성이기도 하다. 허무주의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소외를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자이며 가능성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여는 자이다.

"허무주의는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무찔렀다."(242)

허무주의자는 원한의 인간과도 닿아있다. 우리는"권력에 대한 거부와 권력이 소유하는 것에 대한 거부"(239)를 쉽게 혼동하는데 이 경우 허무주의자는 원한의 인간이 된다. 원한의 인간은 "질투, 증오, 절망으로 고통받으며, 자신을 학대하는 세상을 질투, 증오, 절망을 통해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인간이다."(237) 원한의 인간은 혁명가의 공식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혁명은 권력의 전면적인 거부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권력에 대한 그의 저항이 증오로 추동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수동성(증오에 사로잡힌 허무주의)은 어설픈 온정주의나 성급한 계량 주의로 흐르기도 쉽다. 혁명은 절대 완수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과도기이다.능동적 허무주의는 '전前혁명적'이지만, 수동적 허무주의는 오히려 '반反혁명적'이다. 그것을 노예적 복종이 아닌 항구적인 봉기, 권력의 전면적인 거부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항과 분해의 힘을 가속하면서, 권력을 고발하려는 욕망을 파괴를 향하는 의식에 합치시켜야 한다. 바네겜은 이를 '초월의 운동'이라 말한다.

"생존과 그것의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의식은 연속적인 포기들에 대한 의식과, 그리고 결과적으로 초월의 운동을 그 운동이 너무 일찍 중단된 시간과 공간 안 곳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진짜 욕망과 융합된다. 초월, 즉 일상행활의 혁명은 포기된 급진성의 핵들을 다시 취해서 원한의 엄청난 폭력과 함께 그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250)

바네겜이 이야기하는 초월. 그것은 가장 급진적인 일상생활의 혁명이며, 권력의 관점을 전복하는 것이고, 또 모든 중단된 혁명들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장면5> 나는 한 달째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 나의 뒤통수에는 '부적응자'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나는 자신을 스스로 좁은 방 안에 숨겼다. 하지만 나는 좁은 방 안에 있으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혹과 명령들이, 마구 뒤섞여 나를 향해 침입해 들어오는 걸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손님들은 어떤 미로도, 어떤 차폐막도 가볍게 통과한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예술가는 자신을 꼭꼭 숨기려 했다. 하지만, 마구 뒤섞여 해독되지 않는 말들이 그의 마지막 도피처였던 좁은 방의 벽을 뚫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 좁은 방이 그 말들을 불러들인 것 같기도 하다. 이곳이 '임자 없는 땅 no man's land' 혹은 과도기(허무주의)에 출현하는 "관점 전복의균형점…….거대한 거부의 절정이자 영원"(246) 이 될 수는 없을까?

예술가는 모든 걸 잃었다. 모든 걸 잃었다면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새로운 삶의 기술을 익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처세의 기술에는 두 가지가 있고, 그중 하나는 비록 겉으로는 매우 새로워 보일지라도 그저 세련되게 기존의 세계에 다시 적응하도록 하는 새로운 봉합기술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다. 진정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기술을 익히려면 이를 잘 식별해야 한다. 책의 2부에 등장하는 '전용détournement'은 처세술의 기본 원리를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조건화는 위계의 사다리를 따라 각자를 위치시키고 이동시키는 기능을 한다. 관점의 전복은 일종의 반反조건화를 내포한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조건화가 아니라 유희의 전술, 즉 전용이다." (256)

'조건화'는 위계적 구조물들에 필수적으로 탑재된 기능이다. 이런 측면에서, 봉합기술이란 예술가 스스로가 새로운 조건화의 방법을 만들도록 하는, 즉 자신의 창조성을 위계 구조에 맞춰 항상 재조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기술이다. 세계를 창조하는 기술은 그 자체가 반조건화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더는 권력의 눈으로 보기를 멈추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예술가가 잃은 것은, 바로 권력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들일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리라. 권력의 관점이 아닌 전용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할 일만 남았다.

전용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매 순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내 창조성이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그것은 구속으로 획득된 그 어떤 지식들보다 확실한 안내인이다.'(256) 전용의 관점에서, 권력을 파괴하는 행위들은 곧 개인의 자유 의지를 건설하는 행위들이 된다. 그러한 행위에서 개인적 창조성과 보편적 창조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노래(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재즈의 즐거움을 나누는 노예 없는 주인들의 세계가 창조된다.
예술가는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가까운 문구점으로 달려가 싸구려 복제 그림을 산 뒤, 그 위에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릴까? 아니면 몇백만 화소를 자랑하는 최고사양의 카메라로 흐릿한 사진들만 몇천 장을 찍어 볼까? 우쿨렐레에 줄을 매달아 함께 산책하거나 혹은 좀 더 과감히 팔, 다리가 문어처럼 달린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성급히 결정할 필요는 없다. 열정적인 놀이를 구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놀이니까 말이다. 즐거운 놀이는 그것을 계획하고 기다리는 시간과 그것을 획득하고 달성하는 시간을 나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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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리듬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2013)

시간, 공간, 도시, 일상성, 미학과 관련해 진행했던 리듬에 대한 그의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르페브르 사후에 친구이자 동료였던 르네 루로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왜 르페브르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맑스주의 사상가들 중 한 명인지를 보여준다. 르페브르는 맑스, 바슐라르, 니체,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등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유들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혼합하여 ‘리듬분석’이라는 새로운 과학,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정초하려 한다.

『플럭서스 예술혁명』(조정환, 전선자, 김진호 지음, 갈무리, 2011)

플럭서스 예술운동에 대한 한국 최초의 본격연구서이다. 2011년은 플럭서스 예술가 백남준(1932~2006) 사후 5주기, 플럭서스 예술운동 50년, <플럭서스 선언문> 작성자 조지 마키우나스 탄생 70년이었다. 플럭서스는 전통적이고 경직된 재현적 예술체제를 타파하고 예술을 삶과 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실험하고 실천하였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예술적인 것에 대한 제도적, 전통적 통념을 넘어, 예술과 삶 그리고 존재와 생명의 통일을 실천했던 플럭서스 총체예술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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