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호] '있다'와 '없다'의 사이… 군주와 사냥개의 수사학ㅣ신현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11-04 15:31
조회
849

'있다'와 '없다'의 사이… 군주와 사냥개의 수사학


신현진 (예술학 박사)






2008년 2월 5일, 브뤼노 라투르가 형이상학자임을 증명하는 하먼의 논문발표 행사에 브뤼노 라투르가 초대되었다. 이날 런던 정경대에서 발표된 이 논문은 『네트워크의 군주』의 초안이기도 했다. 하먼의 발표가 끝나고 두 사람의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는 초입에서 라투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자리에서) 전문 철학자가 아닌 내가 ‘경험주의적 형이상학’을 논해야 한다면, 나는 형이상학보다 경험주의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나는 사냥감을 쫓는 개와 같다. 그러다가 내 사냥감은 한 무리의 늑대에게 둘러싸이게 되는데 이 늑대들은 전문가 철학자라고 불린다. [모두 웃음] ...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의 먹잇감을 쫓는다. 내가 하려는 것은 이 늑대 무리의 한중간에서 그들이 묻는 질문에 모두 답변을 해줘야 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나의 사냥감을 잡는 일을 게속하는 것이다.”[1]


하먼은 본인을 과학사회학자라 말하는 라투르를 굳이 형이상학자라고 우기고 그런 하먼을 라투르는 다른 철학자들과 함께 싸잡아 폭력적인 늑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하먼은 라투르의 논리를 보완해 객체 지향적 존재론을 정립하는 자신의 책 제목을 영화 '어둠의 군주(Prince of Darkness)'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에서 따와 『네트워크의 군주』라 지었다 말하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이들의 수사학은 여느 철학 텍스트와 달리 특이하기만 하다.[2] 한편, 지금까지 라투르가 이룬 업적이나 그것이 현대철학과 철학자에게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면 늑대에게 먹잇감을 빼앗길 상황에처한 사냥개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마음에 와닿는 수사학이기도하다.


라투르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래 철학자에게는 당연시됐었던 전제 조건인 세계를 인간과 그 나머지로 가르는 이른바 주체철학의 전통을 허물어뜨린 대표적인물 중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인간만이 가진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실재를 만들어낸다는 통념을 뒤엎고 인간만이 가진 무언가가 '없다'고 전제하는 이론을 내놓은 사람이다. 이러한 라투르의 논리는 하먼의 책에서 설명된다. 하먼은 라투르 이론에 대한 정리와 분석에 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그에 의하면,라투르의 세계는 수없이 많은사물, 속을 알 수 '없어' BLACKBOX인 사물로만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세계에는 또한 사물들이 오직 행위자와 행위소의 자격으로 서로맺는 관계만 존재한다. 실재는 (행위자인) 사물이 다른 행위자와 함께 각자가 드러내는 명제를 내용으로 만들어낸 효과를 소급적으로 파악한 결과값이다. 여기서 그의 '사물들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이전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존재자였던 반면 라투르의 이론에서존재는 행위할 때에만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자격이어서 심지어 언제나 소멸되는 상태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인간을 사물로 격하시켜 주체-객체 사이의 서열을 폐기하고 오로지 행위자라는 객체만이 존재한다는라투르 식의 세계의 조건은 철학자에게는 평평한 존재론을 제시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사물간 동맹(관계맺기)의 효과나 관계를 주목할 때, 이는 슈퍼이론처럼 존재하는 방식 전반에 걸친 문제, 즉 우주전체의 실재를 다루는 셈이기도 해서 모든 철학자의 고민과 겹치기도 하고, 포스트모던이라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는 조건에 처한 철학자 늑대가 사냥하는데 실패했던 실재를 건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라투르는 늑대 철학자들이 이미 잡았어야 했던 먹잇감인 대안적 실재를 쫓았기 때문에 사냥개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섰다.


라투르의 이론이 하먼의 철학충동을 자극했던 이유또한 아마도 세계의 작동 메커니즘을 다루면서 제 3의 실재영역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실재론은 세계에 무엇이 있고-없고, 즉 존재하고-존재하지 않는가를 논한다. 사변적 실재론을 거쳐 객체 지향적 존재론에 다다르는 하먼의철학 또한 당연히 무엇이 있고 없는가를 고민한다.인간vs. 세계의 이원적 전통에서 실재란 이성의 주체가 객체를 본질로 환원하고 그것을 통해 실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한 결과값이다. 하지만 하먼에게 이러한 이분법적 전제는 구체적인 경험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폐기처분될만하다. 그래서 라투르가 제시하는 실재영역은 하이데거, 화이트헤드와 함께 하먼의 형이상학의 토대가 된다. 하먼의 객체 지향적 존재론에 의하면 실재에는 세가지 영역이 있다.


유화를 예로 들자면 첫째, 유화는 사각형의 나무 프레임에 천을 씌우고 그 위에 안료와 기름이 섞인 다양한 색상의 물감이 얹힌 것이라는 물리적 실재가 있다. 둘째, 유화는 작가의 메시지가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으로 인간의 정서를 고양한다는 등의 관념적 실재가 있다. 셋째, 이 유화는 전시장에 놓여 개별 관람자들의 번역을 통해 정치적 선동을 하거나, 화랑에서 고가에 팔려 투자 대상이 되는 방식으로 동맹을 맺는 관계적 실재를 구성한다. 첫째가 물리적 실재이고 둘째가 관념의 영역이라면 라투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세번째 영역이다. 그리고 하먼이 주목하는 영역 또한 이전에는 물리적 영역과 관념적 영역이 뭉뚱그려진 상태로 있거나 혹은 '없었던' 영역이었다가 이제 비로소 '있는' 영역이 된 바로 이 제3의 영역이다. 여기서는 유화나, 화가, 미술관, 관객, 화랑, 돈이 모두가 동등한 사물(객체)이며 이들은 행위자의 자격으로 그것의 명제에따라, 예를 들어 이 화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 개념과 같은 행위소적 특징에 따라 동맹을 이루어 전시에 포함되거나 투자 대상으로 인정되거나 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행위소로 세계의 작동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존재조건을 제시했다고 해서 라투르의 이론이 형이상학의 요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라투르는 철학이라면 해결해야하는 인과율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이 지점이 바로 라투르와 하먼이 입장을 달리하는 지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군주』가 가진 독특함의 기저이기도 하다.하먼은 이 책을 통해 라투르의 이론에서 배제된 인과율의 문제를 시간으로 해결하면서 라투르를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킨다.하먼은 라투르의 먹잇감을 철학의 영역으로 몰아가기 위해 우리가 존재함을 스스로 의식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모델에서는 존재와 행위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라투르의 실재에서는 행위하는 동안 제시되는 특정 명제만 있을 뿐, 의식은 물론 자아도 '없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잠을 자는 동안의 화가가 가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역량은라투르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전제로는 다른 행위자와의 접촉이나 그 접촉으로 야기되는 실재가 설명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재에 존재하게되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하먼은 우리가 다른 행위자의 의식이 BLACKBOX여서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추상화라는 의식작용을 통해야만 세계 안의 행위들을 추정할 수 있음을 호소한다. 즉, 하먼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에게 진보나 혹은 무엇이라도 변화가 가능하려면, 라투르 식의 명제 너머에 행위자에게서 아직 파악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야'한다는 점이다.


행위자와 행위자 사이의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전제해야 (발전이 아니라) 현재와는 다른 변화와 창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들뢰즈의 잠재태로, 혹은 화이트헤드의 가능태로 명명되든 간에 이러한 의식 작용이 '있음'은하먼이 사변적 실재론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단초가 된다. 하먼이 행위자에게 '있는' 의식작용이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바를 고려하면 그가 말하는 바는 단 하나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명제만으로 실재를 고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행위자가 다른 시점에서, 그리고 다른 '시간'에 접촉함으로써 의식된 복수의 명제를 통해 실재를 만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하먼이 라투르에 시간의 문제를 적용해 인과율을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먼이 다각도에서 다른 시간의 경험이 서술하는 사변의 축적으로 자신의 객체지향적 존재론의 시간과 우주를 출발시킨다고 해석했다.


라투르는 런던 정경대학 행사 이후 4년이 지난 2013년『존재의 양식탐구』를 출판했다.[3] 이 책을 목차와 서문 정도만 읽은 필자로서는 이 책이 라투르가 세계에서 행위자와 행위소가 동맹을 맺는 양식들을 분류하면서 자신의 전작을 정리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추상화를 피하기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결국 하먼이 대신 성취하려고 했던 라투르 이론의 철학적 완성을 결국 라투르도 원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이 책을 출판한 하버드 출판사는 이 책을 과학사회학도 아니고 인류학도 아닌 철학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제이 포스터는 『네트워크의 군주』를 리뷰한 글에서 형이상학으로 이론을 완성시키는 것이 라투르가 원했던 것이 맞느냐고 묻는다.[4] 존재 양식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을 늑대에게먹잇감을 빼앗길 상황에 처한 사냥개인 라투르가 자신의 인류학적 접근방식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인터넷을 통해 여러 사람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서 얻은 결과물이라는 점도 라투르가 경험에 근거한 민속지학적 서술방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행위자와 존재자를 동일시 하면서 현상을 과거로 소급해서만 설명해야 하는 이유를늑대가 원하는인과율의 결핍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투르의 시간이 소급만 가능하기 때문에 진화론자라는 생각도 들지만 좀더 유용한 화두로 나는 이 두사람의 수사학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 둘 모두는 명제를 선험적 본질의 위치에 놓지 않고 경험을 서술할 수 있는 유물론적 수사학을 추구한다. 하지만 라투르에게는 의식이 '없고' 하먼에게는 의식이 '있다'는 점은 이 둘이 사용하는 수사학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라투르의 경우 그는 사물의 동맹의 관계를 서술하려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드러나는 수사학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앞서 나의 방식으로 서술한 "사물들에는 인간도 포함된다"는 문장은 어쩌면 라투르를 오해하는, 늑대의 시각으로 서술된 수사학일 듯하다. 이런 방식의 표현은 라투르의 연구가 존재론적 논리구조에서 인간의 위치 설정만 바꾸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그가 노력하는 바는 행위자의 명제 그 자체에서 논의되지 않은 관계를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투르의 수사학은 무엇이라도 가져다 써서 시계(視界)와 구별되는 영역을 가시화하는 예술적 실천과 명료한 구분이 어렵다는 연구가 발표되기도 하였다.[5]


하먼의 경우도 다양한 시점에서의 경험적 서술을 추구한다. 동시에 그는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사물이 서로 만나고 힘겨루기를 하며 동맹을 이루는 정치적 행위자임을 인정하기 때문에각 사물의 사변은 서로 경쟁관계를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수사학은 정언 명령은 아니지만 설득하는 방식으로 다른 행위자와 접촉하며 그래서 심지어 매혹적이야만 한다. 그렇다면 주목을 받기위해 책 제목을 『네트워크의 군주』라 지었다는 그의 답변이 이해가 간다. 한편 제목에서 사용된 단어인 '군주'는 라투르보다는 마키아벨리에 상대적으로 근접한, 행위자가 행위소 사이의 강력한 동맹을 위해 충성심을 유혹해야하는 하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있다 와 없다 사이에서 하먼이나 라투르나 이들이 선택한 입장은 이들의 수사학이 지금의 모양새를 가질 수밖에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나의 시점에서는 하먼의 논리는 인간의 인지가 컴퓨터와 다름이 없음이 널리 상식이 되고 뇌용량이 인공지능과 맞먹어서 인간의 의식작용에 추정과 추상화가 필요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논리는 인간의 의식이 생성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연산하는 날이 오기 이전까지만 유효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때까지는 인간의 형이상학 충동이하먼의 주장대로 인간의 진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들의 상상에 입각한 실재의 서술인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은 무척 유용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을 대신해 나는 이책이 라투르를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형이상학적 충동을 가진 두가지의 인간의식 작동이 충돌하지 않고도 진보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내게 주었음을 밝히고싶다. 또한 라투르의 작업을 형이상학으로 완성한 하먼의 원대한 성취가 라투르를 보완하는 것인가 아니면 늑대 철학자의 불가피한 결론인가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은 스릴 넘치는! 글이기도 했다. 이책을 읽는 독자도 이에 대한 답을 어쩌면 나와 다르게 선택해 보시길 바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위의 인용문은을 포함한 이 행사의 녹취록은 다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Bruno Latour, Graham Harman, Peter Erdelyi, The Prince and the Wolf: Latour and Harman at the LSE, John Hunt Publishing ISBN: 1846944228, p. 41.

[2] 이날 발표된 하먼의 논문인 “The Harman Review: Bruno Latour's Empirical Metaphysics"나 이들의 논쟁은 호의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듯 하다. 이 둘은 10여 년이 넘게 교류해 왔으며 다른 학자들과 함께 이 둘이 물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https://anthem.wordpress.com/2007/12/22/the-harman-review-bruno-latours-empirical-metaphysics-5-feb-08/

[3] Bruno Latour,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trans. Catherine Porte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4] Jay Foster, “Ontologies Without Metaphysics: Latour, Harman, and the Philosophy of Things,” Analecta Hermeneutica, vol. 3 (2011) pp. 1-26

[5] Francis Halsall, “Actor-Network Aesthetics: The Conceptual Rhymes of Bruno Latour and Contemporary Art,” New Literary History, Volume 47, Numbers 2 & 3, Spring & Summer (2016) pp. 439-461 DOI: 10.1353/nlh.2016.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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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9년 10월 30일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bit.ly/2JKkd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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