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고원 발제(~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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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or
작성일
2019-02-16 13:55
조회
740
어느 신학자의 회상---- 신학의 입장이다. <본질적 형상의 변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본질적 형상은 서로가 침해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는 단지 유비관계만을 갖는다고 말한다. 곧 늑대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입장과 달리, 악마와 마녀 그리고 이들 간의 계약이 분명 실재한다. 악마적인 국지적 운동이라는 현실이 실재로 있다.

신학이 제시하는 종교재판의 두 경우이다. ① 오뒤세우스의 동료들의 경우. 이는 상상적인 환영이다. 주체가 자신이 돼지, 소, 늑대 등 짐승으로 변형됐다고 믿고, 이것을 관찰하는 자들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감각적 이미지들을 상상 속으로 가져가서 그것들을 외부 감각 위에서 튀어 오르게 하는 내적인 국지적 운동만이 존재한다. ②디오메테스의 동료들의 경우이다. 이것은 마법이다. 여기서는 악마가 실재하는 동물들의 몸체를 받아 들이고, 이들에게는 이른 <우발적 사고들과 변용태들>을 다른 몸체들에게로 옮긴다. 인간이 실제로 동물이 되지는 않지만 <인간의 동물-되기>라는 악마적 현실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악마는 온갖 종류의 국지적 운송을 함은 분명하다. 체질, 변용태, 몸체까지도 운송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송은 본질적 형상의 장벽은 넘지 못하며 실체나 주체의 장벽도 넘지 못한다.

악마학보다는 차라리 연금술, 특히 물리학과 관계되는 <우발적 형상>의 문제가 자연 법칙에는 있다. 이 <우발적 형상>은 더 or 덜을 허락한다. 가령 더 뜨겁거나 덜 뜨거운 것처럼. 자연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실체나 주체와 혼돈되지 않는 완벽하게 개체화된, 제 3의 개체성을 가진다. 열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실체나 주체와 혼동되지 않는 완벽하게 개체화된 것이다. 열이나 색은 고유한 정도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연장extension이 아니라 연장에 고유한 정도degree이다. 따라서 <우발적 형상>은 합성될 수 있는 얼마간의 개체화들로 구성된, <위도>를 갖는다. 하나의 정도나 하나의 강도는 <다른 정도들, 다른 강도들>과 합성되어 또 다른 개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개체, 즉 <이것임Thisness>이다.

<우발적 형상>에 주체가 참여함에는 그 참여 정도에 따라 형상 자체 안에는 주체들의 성질들로 환원되지 않는 흔들림이나 떨림이 들어 있다. 열의 강도들은 열을 첨가한다고 합성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체들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전체의 열이 증가하는 것을 차라리 막는다. 우발적 형상이 합성되었을 때 비로소 강도의 배분을 행하고, 기형적으로 왜곡된 위도들, 빠름들과 느림들, 그리고 경도로서 취해진 하나의 몸체나 몸체들의 집합에 대응하는 온갖 종류의 정도들을 수립한다. 이렇게 위도와 경도가 만들어지면서 지도가 제작된다.

요컨데 실체적 형상(우발적 형상)들과 한정된 주체들 사이에는 악마적인 국지적 운송의 수행과, <이것임>들, 정도들, 강도들, 사건들, 우발적 사고들의 자연적인 놀이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잘 형상화된 주체들의 개체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개체화들>을 조성해 낸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1 ----본질적 형상 또는 실체적 형상에 대해 스피노자는 비판한다. 그는 형상도 기능도 갖지 않는, 추상적이지만 완벽하게 실재적인 그런 요소들에 도달하려 했다. 그것은 오직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서로 구분된다. 그것은 원자처럼 형상을 지닌 유한한 요소가 아니다. 이것들은 <현실적 무한의 무한히 작은 궁극적인 부분들>로서, 고른판이나 조성의 판 같은 동일한 판 위에 펼쳐져 있다. 이것들이 겪게 되는 <속도의 정도>와 <운동과 정지의 관계> 에 따라 특정한 <개체>에 귀속되는데, 이 <개체>자신은 더 복잡한 또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는데 이러한 일은 무한대로 계속된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는 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무한들의 여러 부분들이 겪게 되는 <관계의 조성>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각 개체는 하나의 무한한 다양체이며 , 전체 <자연>은 다양체들의 <완전히 개체화된 다양체>이다.~ P482

<자연이라는 고른판>은 하나의 거대한 추상기계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적이고 개체적이다. 이 기계의 부품은 다양한 배치물들 또는 개체들이다. 이것들 각각은 무한히 많은 관계들 속에서 무한히 많은 입자들을 한데 묶어 취합한다. 따라서 자연의 판은 모두 통일성이 존재한다. 생물, 무생물, 인공물이나 자연물 모두 그러하다. 이 판은 형상이나 형태, design 이나 기능과 무관하다. 이것은 진열판으로서, 차라리 온갖 형태들의 단면도 또는 모든 기능을 갖춘 기계와 같다. 이 판의 차원들은 그것이 자르는 다양체들 또는 개체들의 차원과 더불어 증가한다.

고정판은 유비와 대립되는 <내재성 또는 일의성의 판>이다. ① <일자>는 모든 <다자>와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되며, ② <존재>는 모든 <차이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유일한 것들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실체의 통일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이 유일하고 동일한 판> 위에서 서로 부분이 되는 변양들의 무한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①퀴비에에 따르면, 판의 통일성은 유비의 통일성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질적이고 넘기 힘들고 환원 불가능한 조성들에 따라 상이한 분자들 속으로 파편화되면서만 실현되는 초월적인 통일성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 발전과 분화의 유형에 따라 실현된다. 이때 그 판은 구조나 발생 같은 숨겨진 조직의 판이다.
② 이와 달리 조프루아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기관들과 기능을 넘어 <해부학적 요소>라고 불리우는 추상적 요소들 쪽으로, 심지어는 다양한 조합을 이루며 자신의 빠름과 느림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기관을 형성하고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순수한 재료인 미립자들 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 지체와 신속함이 구조의 형태들뿐만 아니라 발전의 유형들까지 휘하에 둔다. 조숙하거나 지체된 운동학적 존재물로서의 종이다. 순수한 내재성의 판, 일의성의 판, 조성의 판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속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되며 서로의 <연결접속과 운동 관계>에 따라 개체화된 특정한 배치물로 들어오는, 형식을 부여 받지 않은 요소들과 재료들이 춤을 춘다.

삶이라는 고정판에서는 더 늦어지거나 빨라지거나 간에 모든 것은 움직인다. 두족류인건 척추동물이건 유일하고 동일한 고른판 또는 구성의 판이 독같이 적용된다. 접기 문제는 기관이나 기능이 결코 아니며, 또한 다양한 유비적 관계와 발전 유형하에서만 그것들의 조직화를 주재할 수 있는 <초원적인 판>도 아니다. ① 문제가 되는 것은 조직화가 아니라 조성이다. ②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이다. ③문제가 되는 것은 요소들과 미립자들로, 이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순수 내재성의 판 위에서 <이행, 생성, 또는 도약>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도착하거나 도착하지 않는다.

배치물들 사이에 <도약과 단층>이 있는 것은 때맞춰 도착하지 않거나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도착하는 요소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체가 <내재성의 판의 일부를 이루는 안개나 공백, 앞섬과 뒤쳐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 운동의 판이라고 불리는 동일한 고정판>이 상대적 속도를 가진 <무형의 요소들>에 의해 횡단되고, 다시 이 요소들이 빠름괴 느림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개체화된 배치물로 들어가는 그런 세계이다. 다양한 연결접속을 행하는 미세한 물질의 무한한 미세 조각들이 서식하는 고른판이다.

아이들은 스피노자주의자이다. 여자아이들이 자신도 고추가 있다고 말할 때 여기서 고추는 기관적 기능보다는 기계적 작동 형태를 뜻한다. 물론 <연결접속이나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서 다르다. 곧 둘의 고추는 다른 배치물이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기관은 “천 가지 변전을 겪으며, 위치를 정하기도 어렵고, 식별하기도 어려우며, 때에 따라 뼈, 엔진, 배설물, 애기, 손, 아빠의 심장 등”이 되기도 한다. <기관>이란 무엇인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또 이 관계가 이웃 요소들의 관계와 합성되거나 분해되는 방식에 따라 기관의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기관이다. 즉 기관이란 무한한 배치물들을 지닌 거대한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점유된 하나의 고른판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철학자의 아이-되기이다. <몸체의 경도>라고 불리는 것은 특정한 관계 속에서 몸체에 속하는 <입자들의 집합들>이며, 이 집합들 자체는 이 몸체의 개체화된 배치물들을 규정하는 관계의 조성에 따라 서로 상대의 일부분을 이룬다. ~p486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2----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한데 모으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 각각에 역량의 정도가 대응한다는 또 다른 측면을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하나의 <개체를 조성하고 분해하고 변양시키는 관계>들에는 개체를 변용시키는 <강렬함들>이 대응한다. 이 강렬함들은 외부서 오기도 하고 개체 자신의 부분에서 오기도 한다. 결국 변용태는 생성이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몸체의 위도란, 몸체의 역량의 특정한 정도에 따라, 또는 차라리 이 정도의 한계들에 따라 몸체가 취할 수 있는 변용태들이다. 경도는 특정한 관계 아래서 외연적 부분인 반면, 위도는 특정한 능력 아래서 내포적(=강렬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몸체의 변용태들을 고려해야 하고 그래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형태학>인 셈이다. 예를 들어 경주말과 짐발이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는가? 이처럼 동물의 세계를 규정하면서도 그것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화된 배치물> 속에서 능동적 변용태들과 수동적 변용태들을 찾아내려 했다. 세계는 변용태, 이것이 전부이다. 에티카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관의 특성>들은 경도와 그 관계들로부터, 또 위도와 그 정도들로부터 나온다. ~488

아이들은 동물에 대해 동물들의 변용태를 작성한다. 꼬마 한스의 말도 재현적인 것이 아닌 변용태적이다. 그것은 <수레를 끄는 말-승합마차-거리>라는 기계적 배치물 속에 있는 하나의 요소 또는 하나의 개체이다. 이 변용태들은 말 역량의 정점에 이르는 최상의 극한을 갖지만 동시에 최악의 문턱도 갖는다. 즉 말이 길에서 쓰러지다! (…) 말이 죽게 되다! 니체, 도스트에프스키도 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한스의 말되기는 무엇인가? 한스는 <엄마의 침대, 부계적 요소, 집, 건너편 카페, 이웃한 창고, 거리, 거릴 갈 수 있는 권리, 이 권리의 획득, 긍지,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 획득에 따르는 위험들, 떨어짐, 창피>등의 배치물 속에 잡혀 있다. 꼬마 한스가 형태나 주체와는 무관하게, <자신을 말이 되게 해주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변용태들을 자기 자신의 요소들에 부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 더 문제이다. 한스의 배치물도 아니고 말의 배치물도 아니고 <한스의 말되기의 배치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출구가 열릴 것이다.~ P489

호프만슈탈이 쥐의 임종을 가만히 바라볼 때, 바로 그의 안에서 그 동물이 “괴물 같은 운명에게 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호프만슈탈도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듯이 연민의 감정이 아니다. 동일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개체들 사이에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조성하는 일이며, 일종의 공생이다. 그렇게 해서 쥐는 인간 안에서 하나의 사유가, 열광적인 사유가 되며, 이와 동시에 인간은 쥐가, 이빨을 갈며 죽어가는 쥐가 된다. 쥐와 인간은 결코 같지 않지만 단어들의 언어가 아닌 언어 속에서, 형식들의 질료가 아닌 질료 속에서, 주체들의 변용 능력이 아닌 하나의 변용 능력 속에서 쥐와 안간은 하나가 된다. 이것은 반자연적인 관여이다. 그러나 바로 구성의 판, <자연>의 판은 온갖 책략을 이용해 자신의 배치물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해체하는 이러한 관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판은 무한하다. 당신은 천 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시작할 수 있다. ① 당신은 언제나 너무 늦거나 너무 빨리 도착하는 어떤 것을, ② 당신의 빠름과 느림의 모든 관계들을, ③ 당신의 모든 변용태들을 재조성하게 하고 배치물 전체에 수정을 가하게 하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판은 그것의 실패가 판 자체의 일부인 그런 방식도 존재한다. 다른 판이 더 힘이 늘어 동물-되기를 파괴하고, 동물을 동물로 인간을 인간으로 다시 접어 넣고, 요소들 간의 유사성과 관계들 간의 유비만을 인지하기 때문에, 이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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