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낯설고도 익숙한 생각들의 지도ㅣ지방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5-06 17:17
조회
418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낯설고도 익숙한 생각들의 지도


글쓴이 : 지방 (지방에서 자율성과 정체성에 관해 공부하고 있다)


황수영의 새 책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하면서 각각의 특이점을 짚어주고, 이들 사이의 접선을 그려낸다. 본 책에서 장마다 제목을 차지한 철학자들은 데까르뜨, 영국 경험론과 프랑스 계몽주의, 멘 드 비랑, 라베쏭, 베르그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의 사유의 발생과 변주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이기 위해 철학사 전반을 경유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소개하는 모든 내용들과 그 행간을 이해하는 것은 한번의 독서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3세기에 이르는 방대한 철학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은 우리가 흔히 근대철학을 접할 때 간과하는 고대와 중세 철학의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너무나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학적 개념들이 낯선 독자를 위한 배려와 친절에만 헌신하는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각 철학자들이 각자의 고유한 사유체계를 구성하는 질문들을 알려주고, 그 질문들이 어떤 지평에서 피어났는지 그 발생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이 질문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다음 철학자가 이를 어떻게 이어받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철학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지도로서 개념들이 점유하는 범위와 분기점을 제시하고 있다. 철학사에서 켜켜이 쌓인 질문들은 연속적인 동시에 단절되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시차와 경험에 근거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이 사유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이 점에서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을 우리가 동시대에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가지는 회로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습관과 생명에 대한 각각의 부분을 읽으면서 아직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한 지속과 변화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다. 이 질문들을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들, 그리고 저자가 주목하는 논점에 미처 연결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습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문턱>


“결론적으로 말하면 헥시스로서의 습관hexis의 형성은 생명체와 같은 능동적 주체가 어떤 행위를 자신의 본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연속시키거나 반복할 때 가능하다. 헥시스는 자연적 본성이 갖는 항구성과 고정성을 모방하지만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토스에 의해서 얻어지므로 본래적으로 자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216)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성적인 것은 습관에 의해 다른 것으로 될 수 없을뿐더러 습관hexis의 형성도 이미 자연적 경향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230)

“한마디로 습관은 존재자의 변화와 생성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자연은 존재자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변화를 겪게 하고 어떤 변화는 존재자에게 새로운 상태, 새로운 존재방식을 새겨 넣게 된다.” (235)


아리스토텔레스의 헥사스와 에토스로서의 ‘습관’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존재자의 능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습관은 주체가 자처해서 특정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구성되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습관은 본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습관을 본성에 대체가능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편, 라베쏭에 이르러 습관은 이미 실존하는 것들에 대해 그 실존의 단단한 토대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도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실현을 약속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나는 습관에 대한 주목이 한 개체의 구성과 발생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 시도는 한 개체의 구성과 발생에 참여하는 주변 사물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한 존재를 탐구할 때 그 주변을 동시에 고려하는 작업이다. 또한 습관에 대한 고찰은 본성의 심급을 재고하면서, 변화를 논의의 무대로 가져온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세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일상 속의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무수한 자극에 노출되지만 우리가 반응하는 자극은 한정되어 있으며 때로는 선택적이다. 또, 어떤 다짐과 결심을 되새겨도,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하기까지 하는 우리 자신을 마주한다.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 내가 더 큰 행복에 이를 수 있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구성된 습관의 항상성과 무수한 자극에 대한 수용성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변화는 실재하지만, 그 발생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초월적인 순간이나 행위자에 변화의 발생을 맡겨 버리기 쉽고,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특정한 내용을 가진 무엇으로 한정해 버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생명: 차이를 허용하는 지속>


“새로움의 창조는 자족적인 과정이 아니다. 무한한 자기지시적 과정은 같은 것의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외적 조건들이 있고 이를 통해 현재는 부단히 새로워진다.” (316)

“생명체에 있어서 시간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자신의 과거를 현재로 소환할 뿐만 아니라 또한 끊임없이 갱신되는 현재를 통해 미래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317)

“생명의 과정이 폭발적인 힘의 전개라고 하더라도 유기체는 또한 물질과의 ‘타협안’이기도 하다. 유기체는 주변의 무기물을 동화하여 조직을 구성하는 활동 외에도 외부의 영향에 항구적으로 노출되어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전유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 이처럼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자기로 돌아오는 회귀작용을 통해 이질적 타자를 자기화하기에 이른다.” (318)

“생명이 진화 속에서 창조해 낸 다양한 형태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생명은 자신의 환경에 우연히 노출되지만 이 환경은 새로운 형태들을 산출하는 조건들 자체를 주조해 낸다. 생명과 그 조건들의 상호작용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 (319)


나는 어떻게 나임을 유지하는가, 이 지속은 나의 변화가능성을 전제하는가?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을 지속하면서 그것이 파괴되지 않는 선에서 변한다. 음식을 섭취하고 사람을 만나서 경험하는, 다시 말해 살아가는 행위는 지속과 변화의 균형 위에 놓여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변화하지만, 이를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는 한 개체와 그 외부사물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한 개체의 인식, 사유, 체험 등의 과정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만남은 매번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만남들이 우리를 변화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가능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전제되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서 변화가 실현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를 인간들에 적용해 보자. 나는 어떻게 다른 사물과 구별된 무엇일수 있는가? 이 구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아닌 것들과 관계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아닌 너와 연대할 수 있는가? 우리 안에서 나는 흡수되지 않고 고유한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지만, 누구나 집단의 수준에서나 개인의 수준에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고자 한다. 경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즉 우리는 서로 공통적이면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꽤나 까다로워 보인다. 공통적이라고 하기에는 각자가 처한 현실과 쌓아온 경험은 너무나 다르다. 공동선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다수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양보를 강요받았던가? 그러나 차이에 집중할 때 우리는 각자의 차이를 구성하고 있는 너무나 많은 요인에 따라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차이의 변화가능성을 간과하기 쉽다. 사물들의 공통성과 이질성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에 해당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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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황수영 지음, 갈무리, 2014)


이 책은 현대 프랑스철학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한 사유의 흐름을 밝은 빛 아래서 조명하는 책이다. 그것은 단순히 각 철학자들에 대한 이론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들을 서로 대면시키고 그들이 전력을 다해 씨름한 문제들을 공통의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베르그손은 생명에 대해 최초의 거대서사를 썼다. 그의 생명철학은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수려한 문체 속에서 생명의 예측불가능한 창조와 인간의 자유를 역설함으로써 많은 독자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바 있다.


인지와 자본』(황수영·조정환 외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 출간 직후인 2011년 5월 19일부터 5월 21일까지 문화공간 <숨도>에서 열린 실험심포지엄 <인지와 자본>은 열띤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책 『인지와 자본』은 이 실험심포지엄의 연속이자 다른 버전이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유를 제시하는 필자 조정환, 황수영, 이정우, 최호영은 심포지엄의 발표주제들을 확장하여 세공할 뿐만 아니라 이 심포지엄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주제를 보강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개념무기들 : 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을 행동학(ethology)으로 읽었듯이 들뢰즈의 철학을 행동학으로 독해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실체가 슬픔으로 정동되는 수동상태를 넘어서 기쁨으로 정동하는 능동상태로 이행함으로써 구원과 지복에 이르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진화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이 행동학적 이행과정을 운동과 역량이라는 두 차원의 교차 속에서 규명하는 철학적 인물로 그려진다.


네트워크의 군주 :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19)


이현대 철학의 ‘사변적 전회’를 선도한 하먼의 ‘객체지향 철학’과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만나는 풍경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브뤼노 라투르를 현대의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설득력 있게 고찰하고 있는 이 책은 ‘자연’과 ‘문화’의 이분화를 넘어서는 ‘실재론적 객체지향 형이상학’을 인류세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철학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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