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꼽추 난쟁이와 유리구슬

작성자
bomi
작성일
2018-12-07 19:19
조회
1309
삶과예술 세미나 ∥ 2018년 12월 7일 금요일 ∥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어린시절』,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7

역사의 과잉 - 꼽추 난쟁이
비역사적인 것 - 유리구슬(스노우볼)

[역사의 과잉]
삶은 수많은 질병에 병들어 있으며, 자신의 사슬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 삶은 역사 병에 괴로워하고 있다. 역사의 과잉은 삶의 조형력을 공격했고, 삶은 과거를 마치 영양이 풍부한 식량처럼 사용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비역사적인 것]
역사적인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약은 -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이다.
"비역사적인 것"이란 잊을 수 있고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을 말한다.
>> 출처: 「반시대적 고찰3」, 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 책세상, p383~384

인간은 기억하는 동물이다. 기억은 인간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무한한 슬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한다'는 것이 병이 되게 하는 기억의 집합, 니체는 그것을 역사라 부르며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질병을 '역사의 과잉'이라 이름 붙인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책 「반시대적 고찰」은 '기억하는 인간'에 관한 고찰이기도 하다. '기억하는 인간'에 관한 고찰이 벤야민에게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벤야민이 그리는 '꼽추 난쟁이'는 니체가 말한 '역사의 과잉'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꼽추 난쟁이는 우리의 술 항아리를 낚아챈다.(186) 그는 나의 기억을 통제하려는 '음침한 감독관'(188)이다. 난쟁이는 모든 걸 깨트려 버리고 또 축소 시켜버리고는 그것들을 모조리 하지만 절반씩만 거둬들인다. 꼽추 난쟁이는 이렇게 나를 압도한다. 항상 나를 지켜보면서... (188)
'역사의 과잉'이 질병이 되는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 삶의 조형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린 인간은 과거를(기억을)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풍부한 자원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 질병에 니체는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약을 처방했다.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약은 (축소되고 박제된 역사를) 잊을 수 있는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이다.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약은 벤야민의 유리구슬(스노우볼, 피난처, 예방주사)을 떠올리게 한다. 니체가 시대의 질병을 진단하고 거기에 약을 처방했듯, 벤야민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꼽추 난쟁이를 발견하고 또 그에 대항하기 위한 피난처(유리구슬)를 만들었다. 대항공간을 만들고 있는 벤야민의 모습은 단편 <사면 책상>에서 잘 드러난다.

"사면 책상에는 학교 책상과 비슷한 부분이 있기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또 학교 책상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좋았다. 사면 책상과 나, 우리는 학교 책상에 맞서 단결했다. (...) 바로 이 아지트에서 나는 <대변과 차변>과 <두 도시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을, 모든 장소 중 가장 외딴 곳을 이곳에서 찾아냈다. 그런 다음 나는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과 같은 엄숙한 기분으로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 온갖 고문도구 - 단어장 컴퍼스, 사전 등 - 에 포위되어 있지만 그러한 도구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것도 없었다." (사면책상, p236)

니체의 구도는 (비교적) 명쾌하다. 질병이 있고 그에 대항하는 약이 있다. 벤야민의 구도도 비슷지만,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엔 어쩐지 그 경계가 모호한 구석들이 있다. 사면 책상은 학교 책상과 비슷하고 그곳 또한 온갖 고문 도구에 포위되어 있다. 어느 한쪽을 명확히 '질병'이라고 또 다른 한쪽을 명확히 '약'이라고 이름 붙이기 힘들다. 모든 장소는, 혹은 모든 사물은 꼽추 난쟁이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숨는 곳에 있는 자를, 수달 우리 앞에 있는 자를, 겨울 아침의 나를, 식료품실로 향하는 복도에 놓여 있던 전화기 앞의 나를, 나비를 쫓던 브로이 하우르베르크나 취주악단에 맞춰 얼음을 지치던 스케이트장의 나를 보았다." (꼽추 난쟁이, p189)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 특유의 긍정성이 빛을 발한다. 학교 책상과 사면 책상은 전혀 다른 책상이 아니다. 관건은 나와 결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나는 학교 '책상'에서 금지된 것을 사면 '책상'에서 한다. 바로 그 점이 좋은 것이다. 이 좋은 행위가 학교 '책상'에 대항해 사면 '책상'과 나를 단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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