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 이런 젠장, 『기린은 왜 목이 길까?』 / 유채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1:45
조회
1289
이런 젠장,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유디트 샬란스키의 『기린은 왜 목이 길까?』 (갈무리, 2017)


유채림 (손님들이 좌파식당으로 부르는 「두리반」 주인의 남편, 소설가)


* 이 서평은 2017.4.2.(일) 저녁 7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리는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서평회에서 발표될 예정입니다.
* 이 서평은 『작은책』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4f4Nmx


기린은 왜 목이 길까? 구동독 포어포메른 주에 위치한 찰스다윈 김나지움 학생들은 그 물음에 별 관심 없다. 그들은 황혼이 내리는 탄자니아 세링게티 초원을 걸어본 적 없다. 기린과 입 맞춘 적도 없고 기린과 풀 뜯어먹기 시합을 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기린의 모가지가 긴 이유를 알면 대학입학 자격이 주어지나, 아니면 초기 비틀스의 원정공연으로 유명한 함부르크로 이사를 갈 수 있나, 그들은 별 관심 없다.

로마르크는 그 관심 없는 아이들에게 생물을 가르치는 교사다. 난감한 아이들에게 로마르크는 설명한다. 기린의 모가지는 일곱 개의 뼈로 돼 있다, 그 길이는 1미터에 이른다, 모가지가 긴 탓에 심장에서 머리까지 길이는 2미터에 이른다, 강력한 펌프질로 뇌까지 피를 공급해야 하기에 심장은 강철만큼 튼튼하다. 그걸 누가 모르나? 아이들은 모르지만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알고 싶어 하는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 그게 문제다. 그런데도 로마르크는 강의에 온전히 집중한다. 단 한 명만 건져도 족하다. 어차피 부적응자는 도태된다. 이 세상은 함께 가는 세상이 아니다. 진화하지 못하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 그게 자연법칙이다.

그러니 진화론자인 로마르크는 원칙적이고 냉소적이다. 외동딸 클라우디아가 김나지움 학생일 때였다. 로마르크는 외동딸의 담임이었다. 학급친구들에게 왕따인 외동딸이 하필이면 로마르크의 수업시간에 바닥에 쓰러진 채 울고 있다. 로마르크는 딸의 울음에 신경이 쓰였으나 이유를 묻지 않고 수업을 진행한다. 그 순간 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던 외동딸은 교탁 앞으로 다가가 세 차례나 로마르크를 부르면서 운다. “엄마, 엄마, 엄마!”

로마르크는 그 외동딸을 외면한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로마르크는 엄마이기 전에 진화론자였고, 수업을 최우선에 둬야 함을 교사의 본분으로 아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엄마에게 뭔 정이 있겠는가?

훗날 외동딸 클라우디아는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엄마와는 남도 그런 남이 없을 만큼 데면데면한 사이가 돼버렸다.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보낸 적 없다. 로마르크는 그런 딸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 회한에 잠기거나, 엄마한테 그럴 순 없는 거라고 따지지 않는다. 그건 아직 로마르크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때문이지만, 그 같은 반전이 없다면 그게 어디 인생이고 소설이겠는가.

로마르크는 자신을 돌아본다. 수업 중인데도 교장인 카트너가 교실 문을 열고 로마르크를 부른 때였다. 로마르크는 교장실로 불려간다. 교장실 소파엔 로마르크가 담임하고 있는 엘렌이 눈물범벅인 채 앉아 있다. 교장은 엘렌을 다독여 내보낸 뒤 로마르크와 담판을 짓는다. 도대체 얼마나 무심했으면 엘렌이 몇 달 동안이나 같은 반 아이들한테 시달려왔는데도 그걸 모를 수 있나? 당신, 정말 엘렌의 담임선생 맞아? 판서 위주로 수업하고 사교 능력이 부족한 고루한 선생이라는 보고서를 봤지만 적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로마르크는 짐을 싸들고 학교를 떠나야 할 처지로 전락한다. 졸지에 맞이한 절벽 앞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절대적으로 신뢰해온 진화론에 대해서도 새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살아남은 자가 승리한 건가? 아니, 천만에! 살아남은 자는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게 다다. 오늘 예외인 것이 내일 보편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진화라는 건 없다. 진화, 그것은 사고의 오류일 뿐이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는 그렇게 끝난다. 하지만 사건 없는 소설이 주는 묘한 여운은 길다. 사건 없는 소설이라니? 주지하듯 생은 사건의 연속이고 소설은 생의 또 다른 기록이니 사건 없는 소설, 그게 가당키나 한가? 당연히 가당찮다.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역시 실인즉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기억할 만한 사건이 없으니 사건 없는 소설로 기억될 뿐이다. 끝없이 사건을 따라가는 상식적 소설의 대척점에 『기린은 왜 목이 길까』가 있다는 얘기다. 사건을 따라가거나 사건에 빠져들지 않는 소설이니 당연히 살 떨림이나 박진감이 있을 리 없다. 한 사건을 두고 농밀하게 파고듦으로써 머릿속을 뻐근하게 하는 묵직함도 없다. 그런데도 『기린은 왜 목이 길까』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중고교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났는데도 그렇다. 근의 공식을 못 외운다고 슬리퍼를 벗어들고 뺨을 치던 중학시절 수학선생은 과거에서 소환된 뒤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로마르크의 냉소가 악할까, 슬리퍼로 뺨을 치던 수학선생의 폭력이 악할까? 『기린은 왜 목이 길까』는 묻어뒀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집요하게 현재의 세계관으로 과거를 묻도록 한다. 그 시절 벌벌 떨면서 외웠던 근의 공식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입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엑스는 이에이분의 마이너스비 프라마이너스 루트비제곱 마이너스 사에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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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피닉스문예 시리즈

『젊은 날의 시인에게』(김명환 지음, 갈무리, 2016)

김명환은 어린 시절부터 ‘시인’을 꿈꿨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되자 ‘시인’이기보다 ‘문예선전활동가’로 살아 왔다. 철도노동자, 삐라작가, 활동가, 시인이다.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 시절, 철도노조민주화투쟁 시절, 철도민영화반대투쟁 시절의 이야기들이 제1부 ‘기차의 추억’과 제2부 ‘삐라의 추억’에 실려 있다. 제3부에는 짧은 소설과 동화가 묶여 있다. 제4부에는 선언, 칼럼, 에세이, 논설, 호소문 등이 묶여 있다. 제5부는 철도노조민주화투쟁 이야기를 무협지로 그렸다.

『산촌』(예쥔젠 지음, 장정렬 옮김, 갈무리, 2015)

1920년대 중국 중부 후베이성 작은 산골 마을의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상과, 혁명으로 인한 그들 삶의 극적 변화를 담은 역사 소설이다. 번역가이자 에스페란티스토, 잡지 편집자, 항일 투사였던 중국 작가 예쥔젠이 서방 세계에 중국 혁명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1947년에 영어로 쓴 책이다. <산촌>은 중국인이 쓴 최초의 영어 소설이었다. 출간 후 20개국 언어로 번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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