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집안의 노동자] 서평회 발표문 모음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2 21:49
조회
1389
『집안의 노동자』 출간 기념 집단서평회


집안의 노동자


일시 : 2017년 9월 24일 일요일 오후 2시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강의실
사회자 : 이수영 (미술 작가)
서평자
박해민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박재연 (예술사학자, 문화예술교육그룹 Art PicNik)
남승현 (이화여대 여성학과)
한태준 (다지원 여성주의 세미나 길잡이, 『남편도감』 옮긴이, 일본영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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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를 고민하기


박해민 /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에서 뉴딜이 생산 영역뿐 아니라 사회 재생산 영역 기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여기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인다. 남편이 벌어 온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남편이 생산 영역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가정을 관리하며,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일이 이 시기 여성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생산 영역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서기도 했다.

여성에게 부가된 재생산 노동은 생산 영역 재구조화에서 필수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여성은 뉴딜에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 노동을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모두 대공황 시기 투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하는 여성은 실직한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고, 일하지 않는 여성은 남편의 파업을 ‘조력’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여성이 집에 있어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홈스테드 운동Homestead Movement과 한 가족 내 두 명이 동시에 공직에 있을 수 없다는(즉 여성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연방경제법이었다. 보수적 가족 규범은 여성이 수행한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덮어버렸다. 급속도로 퍼진 보수적인 가족 규범은 젠더 분업에 따른 생산/재생산 노동의 가치 위계를 정당화 했다.

코스따는 당시의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의 변화를 면밀하게 살피고 여성의 투쟁과 노동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노동’에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코스따는 당시의 여러 투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재평가하고 뉴딜, 국가, 여성의 관계를 새롭게 쓴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있을 때에만, 뉴딜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코스따가 뉴딜, 국가, 여성의 관계를 확정하여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스따는 ‘보수적 가족 규범이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 평가를 어렵게 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여성의 경험을 드러낸다. 사회보장법은 여성 투쟁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이후 보수적 가족 규범과 만나 여성 투쟁의 성과를 제한하기도 했다. 사회보장법이 ‘어머니의 선행’, 즉 어머니라는 ‘직업’의 성실한 수행을 지급기준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회보장법은 1960년대에 여성이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돈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주장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뉴딜이 대공황 때 ‘상실’한 가족의 위상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잠식당했던 여성의 경험은 1960년대에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채 되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대공황 시기 여성의 투쟁 성과가 또 다른 정치운동의 도화선이 된다는 점은 구조와 행위자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에 주목하게 한다.

뉴딜이후 점차 공고해진 가족주의는 대공황 시절 여성의 투쟁과 여성이 담당했던 재/생산 노동 경험과 불화한다. 코스따는 1930년대는 가족 제도를 강화하는 과정 중이었고, 뉴딜의 기획이 2차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했다. 코스따는 이 과정에서 여성이 겪는 모순에 주목했다. 전쟁 중 여성의 사회 진출은 크게 늘었지만, 전후 여성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여기서 30년대에 겪었던 모순은 배가된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여성에게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30년대부터 경험한 사회적 투쟁과 노동경험은 가정이 여성의 자리라는 보수적 담론과 충돌했다. 그리고 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은 1960년대 여성 투쟁의 동력으로 이어진다.

코스따는 사회보장제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의의를 인정함으로써 구조와 행위자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을 포착해낸다. 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과 주체의 행위자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며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또한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의 변화와 개인/집단이 구조와 협상해나가는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가족, 여성의 의미가 어떻게 채워져 왔는지 혹은 채워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코스따의 통찰은 1930년대의 미국과는 다른 시공간의 가족, 여성, 국가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촉발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 복지 정책과 복지 ‘수혜자’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복지의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등의 문제를 기존 사회 운동의 역사 속에서 고민하는 일 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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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정체성


박재연 / 예술사학자, 문화예술교육그룹 Art PicNik


최근 한 트위터리안이 쓴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기업과 국가의 위기일 뿐 개인에겐 전혀 위기가 아니다. 그 아이가 가정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과 국가는 출산율이 낮은 게 우리 모두의 위기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구가 줄어서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작년 여름 십여 년 간의 해외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서울, 전입신고를 하러 찾은 동사무소 (주민센터는 아직 어색하다) 직원은 « 아이가 둘이시네요 !»라며 다둥이 카드 신청서를 내밀었다. 애국하시는 데 도움되시라는 말도 덧붙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출산은 대중담론과 일상언어를 막론하고 ‘애국적 행위’로 승격된다. 어리둥절하고 어안벙벙한 한국식 재사회화를 한 일 년 겪다 보니, 한 가지는 확실해진다. ‘큰 아이만 낳고 귀국했으면 이번 생엔 아이 하나로 끝냈겠구나’. 저출산 대책이 국가주의적 캠페인으로 흐르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하기 시작한다 : 개개인이 반드시 재생산을 할 필요가 있는가 ?

달라 코스따의 ‘집안의 노동자’는, 기존의 여성과 노동 관련 정치 및 정책 연구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누락된 여성과 국가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단순한 가사 노동의 차원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력을 생산/재생산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생산과 재생산은 단지 출산과 양육뿐만 아니라, 변화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관리하고 사회화하는 전략적인 역할을 의미한다. 사회적 공장(p.12)으로 변모한 가정에서, 여성들은 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과업’(p.19)을 수행해야 했으며, 끊임없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가정관리프로젝트의 매니저가 되어야 했다. 달라 코스따는 가사일을 조직하는 동시에 실행하는 여성의 부담을 담보로 형성된 ‘가족 중심 문화’ 프레임을 바탕으로, 뉴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1장 ‘대량 생산과 새로운 도시 가족 질서’에서는, 20세기 초 미국 여성에게 강요된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재생산-다시 말해 ‘훈육과 사회화’-(p.57)의 부담을 분석하고 있는데, 가족 정책이 없는 가족주의, 주택대란, 극심한 경쟁으로 치닫는 노동시장, 대량 실업, 생활 수준의 보편적 하락 등 오늘날 한국 사회와도 접점을 갖는 부분들이 많아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이 시기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달라 코스따의 분석이 지니는 미덕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직관적이면서도 촘촘한 시각이다. 1920년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전자 기기 덕분에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었으나, 가족의 가치를 높이는 사회화 기능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비물질적 과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자식을 키우고 남편의 재생산을 돌보는 일상적인 일은 더 다양하고 복잡해졌으며(p.46), 아내는 ‘좋은 관리자’(p.35)가 되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성과를 내어야 하는 합리적인 노동시장의 일원이 되었다. 달라 코스따는 가정학의 대두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통해 만들어지는 ‘나쁜 엄마와 나쁜 아내’의 프레임을 고발한다. 헌신하는 마음, 헌신하는 노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부담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중요한 문제로, 동등한 가사 노동의 현장에서 ‘여성만 무언가를 더 생각해야 하는’ 이중적인 책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다.

2장 ‘1929년 대공황과 가족 붕괴’와 3장 ‘투쟁 방식과 실업자 결집’에서 달라 코스따는, 성별 문제에 인종 문제를 결합하여 1929년 대공황과 노동운동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노동운동 관련 활동가로서 달라 코스따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대공황으로 인한 가족 해체, 위축된 가족 형성과 출산 (p.77)에 맞서 국가가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백인 가족이었음을 꾸준히 강조한다. 흑인 공동체에 대한 차별, 궁극적으로 가사노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상정된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면서, 달라 코스따는 빈민가 흑인 공동체가 보여준 매우 흥미로운 양상에 주목한다. 해당 공동체에서 여성은 가난 때문에 남성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고, 무료 가사 노동을 무제한으로 연장하지도 않았거니와, 성적인 통제도 받지 않았다 (p.83). 남녀는 완전히 개별화되어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남녀 상대방에 대해서도 아주 ‘합리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물론 위생상태, 사망률, 사생아 출산, 낙태율 등 달라 코스따가 이 공동체의 모든 모습을 이상적으로 보는 것을 아니지만, 친족구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 물리적, 정치적 재생산을 위한 독특한 협력에서 살아있는 저항 세력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제목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물론 이 저작의 원제는 ‘가족, 복지와 국가’다) 인종과 계급 문제에 집중한 분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라 코스따가 주목하는 것은 집단 전체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변화(p.124)다. 1932년 시위를 통해 흑인 조직 활동이 변화되었고, 국가에 대한 투쟁의 요구사항이 이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롭고 강력한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p.110). 흑인 노동 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게 언급된 여성의 투쟁이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못한 점은 아쉽게 여겨지는데, 당시 전형적인 여성은 ‘한때 가장이었던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한편 뒤에서 일을 처리해야 했고, 동시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p.97-98) IMF 사태 혹은 오늘날 남편 은퇴 후의 여성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당시의 상황 묘사를 보며, 투쟁의 진지함 정도나 규모, 의의를 논할 만큼의 여성들의 투쟁은 양적으로 적었다는 달라 코스따의 분석에, 이것은 투쟁 불가능의 문제 (경제구조적이고 사회심리적인 이유에서)이지 여성의 투쟁과 연대에의 의지가 박약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첨언한다.

4장 ‘후버와 루즈벨트’, 5장 ‘여성과 가족, 복지, 유급노동’은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을 통해 국가가 노동력 재생산 과정을 담당하는 주요 주체로 나아가는 과정과, 이에 맞서 투쟁한 실업자, 노동자, 여성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효율성과 기업, 기회와 개인주의, 실질적 자유방임주의와 같은 미국적 가치가 공고해진 시기에 닥친 대공황에 맞서 국가는 가족 모형의 기초를 기둥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기존 사회 질서가 가족의 안정을 기반으로 성립되고 가족이 남성이 벌어오는 임금으로 유지되는 한, 소득을 마련하는 남성과 이를 바탕으로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의 모델은 하나의 레퍼런스로 자리잡아야 했던 것이다. 주택소유주대부법 등은 가족이 거처할 곳을 국가가 마련해줌으로써 노동력을 재건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뉴딜 정책의 대표 실업 타개 정책이었던 대규모 토목사업에서, 대다수 여성은 배제되었고, 흑인은 심각하게 받았다.

달라 코스따는 뉴딜 복지정책과 어머니 투쟁, 사회보장법 통과 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데, 이 부분에서 뛰어난 사회사학자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과 계급 사이의 갈등은 투쟁 분야를 객관적으로 확장하면서 갈등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국가 활동을 위한 기초를 다졌(p.176)고,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여성은 정부로부터 받는 돈에 지원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 돈이 자녀 양육이라는 노동에 대한 임금임을 주장(p.174)하게 되고, 1970년대 여성은 자녀 양육 분야에서 모성이 가족제도에 속박되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집안의 노동자>라는 제목을 <집안에서도 노동하는 자>로 읽히게 하는 ‘집 밖에서 일했던 여성들’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통해, 달라 코스따는 고용 범위의 차이, 임금 격차 등의 지표를 기반으로 당시 여성의 유급노동 상황을 섬세하게 비판한다.

대공황이 붕괴시킨 가족을 가능한 한 빨리 재건하고 안정시키려 했던 뉴딜 정책 지지자들은 여성의 일자리로 가정 또는 집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였고 (p.204), 부엌에 중점을 두어 설계된 단독 주택 건설을 장려하였다. 가사 노동의 육체적인 업무를 간소화 시키고 개별 과제를 수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단축시켜줌으로써 여성을 ‘자유롭게’ 하여, 심리적, 정서적 노동력 재생산에 더욱 전념하게 만든 것이다(p.209). 한층 복잡해진 아내 및 어머니 상은 주로 중산층 여성을 겨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성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게 (p.206)되었다. 여성 고용을 장려하는 것은 뉴딜의 합리화 과정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달라 코스따는 정부 차원과 학계 차원을 함께 고려하며 정책과 연구 이면의 욕망을 고발한다.

<집안의 노동자>는 제목과는 달리 가사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가사 노동에 대한 재정의와 가치 평가 작업의 선봉에 섰던 작가의 입체적이고 꼼꼼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목소리의 당위를 거세당한 중산층 백인 여성에 대한 포커스와 투쟁을 해야 했고 실제로 투쟁을 했던 노동자 계층 여성에 대한 포커스가 엇갈리며 서술되어, 여성의 노동을 지나치게 거칠게 분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업과 워킹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여성 노동력에 대한 복합적인 접근과 더불어, 노동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발화의 필요성을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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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을 중심으로 뉴딜 정책 다시 보기 ― 복지국가가 기획한 가족과 여성


남승현 / 이화여대 여성학과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맑스주의 페미니즘에서 ‘자연’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노동력의 재생산에 많은 관심을 두어왔다. 여기서의 노동력 재생산이란 한 노동자가 다시 노동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만드는 것부터 출산·양육과 같이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물론 전통적인 맑스주의 내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 양식의 역사적 변화에 대해 논한 『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과 같은 고전적인 텍스트가 있지만, 이 역시 생산력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형태의 변화에 대해 분석했을 뿐,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차원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기존 맑스주의적 분석에서는 재생산은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상품 경제가 작동하는 기반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이 가부장적 구성물임을 문제제기 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노동과 자본, 혹은 노동과 국가와의 관계로서 조망되는 뉴딜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부분인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영역을 통해 뉴딜 시기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계급관계의 안정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이라는 해석에서 간과되어 온 새로운 지점들을 드러낸다. 사람에게 재화·임금·물질이 제공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삶과 세대의 재생산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 사이의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된 듯하지만, 그 사이에는 재화,임금,물질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노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재생산 영역에 주목하여 본 뉴딜 정책은 국가가 사회보장이라는 것을 통해 직접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개입하게 된 사건으로 한 편으로는 직접적 소득의 보장이라는 사회보장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는 기본적 경제 단위로서의 가족을 강화하고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주부’로서 재정의 함으로써, 여성의 보이지 않는, 무급 노동 위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개인을 가족으로 흡수, 재생산 하고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며, 경제활동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등 뉴딜 정책에서 여성의 역할을 보여준다.

대량생산의 시대와 국가의 가족 강화

이 책은 20세기 초반, 대공황 직전까지의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으로는 포드의 1일 5달러 정책과 가족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짚어낼 수 있다. 포드의 1일 5달러 정책은 자본이 노동계급 가족의 재생산을 고려해야 한다는, 그리고 이를 통해 대량생산에 따른 수요를 부양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족부양임금을 받는 ‘남편’과 합리적인 소비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주부’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는 생산주체와 소비주체를 성별화된 방식으로 위치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효율성을 중심으로 한 접근이 여성에게 교육된다. 그러나 이는 노동이라기보다는 중산층 주부에 대한 상상 속에서 ‘사랑으로 하는 노동’, ‘어머니 훈련’ 등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는 여성의 돌봄과 가사노동을 자연스러운 여성의 역할로서 위치시키고, ‘모성 강화’와 ‘가족 강화’를 꾀했다. 이 책은 대공황 시기, 가족이 와해되자 국가가 이러한 가족의 재건을 통해 뉴딜 정책을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뉴딜이 강화한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렇다면 뉴딜이 강화하려고 했던 기본적 경제단위로서의 ‘가족’은 도대체 누구의, 어떤 가족을 의미했는가? 달라 코스따는 뉴딜 정책이 사회적 노동력 재생산에 있어서 어떠한 표준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러한 ‘표준’이 아닌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29년 대공황 이후, 전반적인 가족 해체 속에서 백인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달라 코스따의 분석에는 이러한 대공황의 영향 역시 매우 성별화·인종화되어 있었음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가족을 재건하기 위한 국가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자본은 백인 가족을 재건하는데 집중했다. 이는 “백인 가족이 노동계급의 생산을 대규모로 지탱하고 사회의 질서나 무질서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73)이었다. 이는 한 편으로는 그 당시 노동계급에서 백인의 양적 비율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표준’적인 미국의 가족이 어떻게 상상되는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자본의 차원에서는 다른 인종보다 백인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이성애적 핵가족을 재건하는 것에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국’의 ‘안정적인’ 사회 질서가 누구를 통해, 어떤 관계를 통해 대표되는지, 그리고 경제적 정책이 인종적, 젠더 담론과 어떤 방식으로 절합되는지에 대한 사례를 제공한다.

국가의 소득보장요구와 자율적 재생산의 조직화

이 책의 3장은 대공황 시기,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실업자들과 퇴역군인, 노인 등을 중심으로 국가에 소득보장을 요구하는 흐름이었다. 예를 들어 기아행진, 워싱턴 재향 군인 시위, 전국의 주요 실업자 시위에서 노동자의 요구는 국가가 직접 화폐와 생필품으로 소득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개별 업주가 아닌 국가가 직접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갈래는 국가에 대한 소득보장 요구와 함께 자립 및 교환 협동 조합 운동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지점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을 구조화하려던 시도로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달라 코스따가 “소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의 문제의식을 넘어 ‘재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주목했기에 포착할 수 있었던 지점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소득에 대한 요구로 환원되지 않는 자본주의적 경제 외부의 재생산에 대한 상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재생산에의 개입으로서의 뉴딜정책

위와 같이 재생산을 둘러싼 다양한 노동계급의 요구 및 실천이 존재할 때, 뉴딜정책은 사실상 국가가 자본주의적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재생산을 재조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뉴딜정책은 다양한 방식의 자율 조직과 (비교적 시장논리로부터 자율적인)자체적 재생산의 방식을 한편으로는 소득의 보장이라는 방식으로 포섭하고, 이와 동시에 이성애적 핵가족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를 재개하려는 정책적 개입으로 작동하였다. 가족은 이러한 재생산에 따르는 노동을 바탕으로 실업자가 ‘예비 인력’으로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단위이자, 경제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못하는 존재를 부양하는 단위였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여성의 역할로서 재생산에 따르는 무급노동의 자리를 부여받았고, ‘주부’로서 그 과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이는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단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재생산 방식에 대한 개입이기도 했다. 페데리치는 이 책의 서문에서 노동자들이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여 주도적으로 자율조직을 만들고 자체 재생산의 방법을 강구한 점에 주목한다. 즉, 재생산의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복지국가를 부활시키거나 강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자율적인 재생산 방식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뉴딜정책은 그 중에서 복지국가를 통해 전 사회적 소비능력을 유지, 재건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동시에 이는 국가가 특정한 재생산 방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입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삶의 재생산을 상상할 수 있는가?

노동력의 재생산 측면에서 바라본 달라 코스따의 뉴딜정책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의 사회 운동의 전략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복지의 확대 및 축소에 대한 논의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아래의 두 가지 질문을 떠올려보게 한다. (1)현재 복지 시스템이 어떠한 재생산 구조에 기반하고 있는가? 즉, 재생산은 어떠한 단위를 기본으로, 어떠한 구성원들을 ‘시민’으로 간주하고 또 생산해내면서, 누구의 노동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성별분업과 이성애적 핵가족을 기본 단위로 이뤄지고 있는, 아직 많은 부분이 여성의 무급노동으로 이뤄지는 한국사회에서 복지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요청하는 것이다. 또한 (2)사회구성원에 대한 재생산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국가에게 재생산을 보장하라는 방식으로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율적이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공간들을 확장시켜나갈 것인가?

아직 많은 부분 여성의 무급노동에 기대고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재생산이 상품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삶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이 낮은 가치평가 속에서 여성들의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시야를 확대시키는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득의 보장이라는 틀이 아닌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방향에서 복지국가를 분석할 때, 문제의식은 현재 상황에서 국가에게 특정한 서비스 제공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다른 방식의 관계와 공동체의 구성에 대한 고민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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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노동자』 서평 ― 국가는 가족과 여성을 왜 재편성하였는가?


한태준 / 다지원 여성주의 세미나 길잡이, 『남편도감』 옮긴이, 일본영화연구가


실비아 페데리치의 저서를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마리아 달라 코스따 선생님(이하, 달라 코스따) 의 책이 갈무리를 통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집안의 노동자』란 책을 받았다. 국가가 가족, 여성을 어떻게 재편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과 차별이 이루어졌는지 밝혀내는 책을 받고도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서 가족을 유지하려고 일상에 치여 책 읽는 것을 미루던 내 자신이라니...너무나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란 구성원 안에서 여성은 항상 가사 노동을 전담하던 역할을 해왔다. 뉴딜 (신정책)이 원했던 것처럼 내 가족도 어머니의 가사 노동과 효율적인 임금 관리로 유지되어 왔고, 내가 결혼해서까지 내 아내의 가사 노동과 효율적인 임금 관리로 가족이란 테두리는 유지되고 있다. 여성의 이런 순환되는 착취를 기반으로 남성 노동자는 더욱 강도 높은 작업리듬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바탕으로 한 가족 제도 강화는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달라 코스따가 이야기하는 뉴딜 정책의 허상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있다. ‘어진 아버지’의 모습을 한 뉴딜의 실체를 벗겨내고 과거의 과오를 통해 현재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 이 책은 큰 가치가 있다. 대공황 이후, 고용과 실업 사이의 균형이 깨진 상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루즈벨트는 경제 사회의 재건과 국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뉴딜’을 약속했고 그 전략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나 복지 국가 안에서 모두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달라 코스따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1장의 초반부분에 인용되는 루즈벨트의 경제 자문인 웨슬리 미첼의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게재한 글만 봐도 뉴딜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좋은 아내와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을 숭고한 임무로 여기는 경제자문이라니...요즘 같은 시대에 만약 유명한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글로 게재한다면 그의 지적 능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여성, 여성 노동, 가족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가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가정학이 대학 교육과정으로 도입되었다. 가정 안 여성의 역할을 국가가 관리한 것이다. 1930년대 미국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이다. 여전히 우리는 가정 안의 역할을 젠더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하고 가사노동의 전반을 여성에게 위임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하다고 해도 가사노동의 역할을 전적으로 여성이 맡게 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직장, 가정안의 역할을 다 떠맡게 되는 이중고가 되든가, 재생산 서비스를 맡는 노동자(주로 여성)가 그 역할을 맡게 될 뿐이다. 매스미디어는 기혼 여성에게 슈퍼맘이 되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가차 없는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뉴딜정책은 노동 생산성을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가족을 재편하는 방식을 찾았다. 달라 코스따는 단순히 뉴딜정책의 결과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뉴딜 정책이 나오기까지 그동안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가족 이데올로기를 만들어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곳에서 치밀하게 이루어진 가정 안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전적인 부담이었다. 1장의 가장 큰 클라이맥스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초국가적 고군분투라 할 수 있다. 국가는 노동력 생산으로 연결되는 가족과 노동시장의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하여 이전과 달리 노동 시장도 규제하고 가족도 강화시켜야 했다.

2장은 대공황 시기와 그로 인한 가족 붕괴에 대해서 다룬다. 중요한 것은 실업 위기는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그리고 흑인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현실로 다가왔지만 국가가 우선시했던 것은 백인 남성 노동자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늘 가사 노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였다. 뉴딜정책이 들어서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미국의 대공황 시기 이후 가족 붕괴는 백인 가족, 흑인 가족 모두에게 일어났지만 달라 코스따는 흑인 가족으로 대변되는 대도시 흑인 공동체의 흑인 여성 잠재력을 통해서 가정 내 남녀 역할 강화를 통해 가족 제도의 강화를 꾀했던 뉴딜에 일침을 가한다.

3장은 대규모 실업자 결집과 그로 인한 국가 정책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정부기관을 향한 시위와 공격은 국가에게 실직자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강제하였다.실업자들의 투쟁은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실직 노동 계급의 가족 붕괴는 여성, 남성, 청년들에게 가족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달라 코스따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성의 환경과 위치에 대해서 주목한다.

4장은 대공황과 노동계급 위기에 대한 국가가 취한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대응을 후버와 루즈벨트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면서 대량의 실업사태와 가족의 붕괴 그리고 두 개의 다른 정책이란 점에서 MB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떠올랐다. 후버의 강압적인 진압과 표피적인 미봉책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루즈벨트는 뉴딜:최초의 복지 정책을 꺼내들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뉴딜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경제개혁”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지만 그건 차치하고 달라 코스따가 비판하는 뉴딜정책과는 달리 루즈벨트는 사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목록에 단골로 들어가는 인물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동명 주제곡이 유명한 영화 <추억 The Way We Are>만 봐도 루즈벨트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외의 여러 배경이 작용해서인지 나에게는 두 인물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뉴딜 프로젝트의 과정을 그리는 4장은 국가가 2차 뉴딜 기간 동안 사회보장 체계로 들어서면서 여성을 어떻게 배제해왔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5장에서 여성들이 그에 대한 반발로 어떻게 투쟁하고 저항했는지를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5장처럼 여성의 투쟁과 저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 기대하고 읽었던 나는 4장까지 읽는 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연방 정부가 뉴딜 정책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 보편적인 수준의 임금과 그에 따른 임금인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임금 상승에 대한 실질적인 역량을 확보할 책임을 위임 받았고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정 내 주부 역할과 가사노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족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에서 핵심이었다. 뉴딜 정책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뉴딜’은 국가가 주도해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비가시화하였고, 부불노동화한 사례 중 하나다.

달라 코스따는 뉴딜 정책의 이러한 이면을 따져보고 과거의 역사를 통해 보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권리는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해서 얻는 것임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경제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되는 이 시점에 다시금 가족이란 테두리에 대해서 새롭게 사고해봐야 한다. 우리는 이전 세대의 투쟁과 희생으로 지금이란 시간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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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책

『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요구했던 1970년대 여성운동에서 출발하여 19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더욱 열악해진 삶의 조건들을 회복하기 위한 공유재 재구축을 위한 운동까지,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몸담아 왔다. 『혁명의 영점』은 이러한 여성투쟁의 본질에 대한 페데리치의 40년간의 연구와 이론 작업을 집대성한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 지음, 갈무리, 2014)

『에코페미니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로 알려진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고전적 저작.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4, 5백년 동안 여성, 자연, 식민지는 문명사회 외부로 축출되고, 가려져 왔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왜 가려졌는지, 이 부분의 가치와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안또니오 네그리, 질 들뢰즈 외 지음, 갈무리, 2005)

'신자유주의, 정보사회, 탈산업사회, 주목경제, 신경제, 포스트 포드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응답을 한 권에 엮은 책. '물질노동이 헤게모니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로의 노동형태 변화를 주요 현상으로 지적하고, 비물질노동의 두 축인 정동노동과 지성노동을 분석한 후,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에 비물질노동이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1부에는 '정동'에 관한 질 들뢰즈의 연속 강의, 2부에는 마우리찌오 랏짜라또와 삐올로 비르노의 글을 실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주체성, 미적 생산, 시간의 재구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비물질노동 개념을 발전시켜 보려는 나름의 이론적 개입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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