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호] 여성의 해방은 가사노동 투쟁으로부터ㅣ배은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11-10 12:00
조회
629
 

여성의 해방은 가사노동 투쟁으로부터


배은정 칼럼니스트


날이 부쩍 추워진 10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대구역으로 향했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무궁화호를 타고 가는 긴 여정이라 가방에 책 ‘페미니즘의 투쟁’을 챙겨 길을 나섰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샛노란 벼가 심긴 시골길을 구경하다가 책을 펴들었다. 책이 두꺼워 처음에는 ‘이걸 언제 다 읽지?’라는 마음부터 들었다. 근데 책의 도입부를 읽자마자 그런 생각이 바로 사라졌다.


1부에 서문을 읽고 여성과 공동체 전복을 읽기 시작하는데 공감 가는 문장들이 많아서 모두 다 메모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만약 기술 혁신이 일어나서 반드시 해야 하는 노동량을 줄인다 하더라도, 노동 계급이 산업 안에서 투쟁하여 그러한 기술 혁신을 활용하고 자유 시간을 얻는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에는 그 내용이 적용되지 않는다.(p34) 여성 신체의 온전함을 즉각 축소시킴으로써 여성의 인격을 파괴하는 일이 시작된 것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고부터였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전에도, 여성 섹슈얼리티와 남성 섹슈얼리티는 이미 일련의 체제 및 길들이기 유형을 거쳤다. 과거에도 효과적인 산아 제한 방법들이 있었지만, 이 방법들은 뚜렷한 이유 없이 사라졌다. 자본은 핵가족을 확립했고, 그 안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다.(p35)


책의 시작 도입부분 부터, 지금 현 세태에서 결혼을 왜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하는 제도라고 생각하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문장이 많아서 책을 빠른 호흡으로 읽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은 즉각 메모로 남기는 편인데, 책에 밑줄을 긋거나, 이거지! 하는 명쾌한 문장들이 많아서, 어디에 어떤 문장이 마음에 드는지 페이지만 적어놓고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197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투쟁을 해갔던 여성들과 현 2020년을 사는 여성의 현실이 변화되지 않고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내게 이질적인 마음을 안겨주었다. 타국에서 오래전부터 투쟁해오던 물결들이 한국에까지 흘러와 이제는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내가 있다. 마음 한편에는 다른 세계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 한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살자는 운동이 70년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데도 지금까지도 변한 게 없나 하는 허망한 마음을 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낙담하고 부정적으로 미래를 그릴 때가 아니다.


달라 코스따는 계속해서 가사노동이 왜 부당한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임금 없는 가사노동은 폭력을 동반한 강도 행위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여기서 다른 모든 범죄가 비롯된다. 부불 가사노동은 우리를 남성보다 더 나약한 성으로 낙인찍고, 우리를 무력한 상태로 고용주, 정부 정책 기획자, 국회의원, 의사, 경찰, 감옥 및 정신병원에 넘긴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 평생봉사하고 감금당하도록 한다.(p174-175) 부불 가사노동이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 가사노동은 언제나 여성이 당연히 보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진다. 여성이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통해 남성의 편의를 봐주는 동안 밖에서 사회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다. 불합리한 행태가 계속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계속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긍정적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이 책의 3부 내 몸은 내 것 몸을 탈환하다를 읽으면서 낙태죄 폐지 이슈가 떠올랐다. 여성이 낙태를 했을 때 국가에서 처벌 받는다. 이 문장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너무나 이상하게 들린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이 나라는 개인의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이다. 헌데, 여성의 임신이 국가에서 관여되어 자행 되어야 하는 것인가? 책을 읽으면서 이탈리아 여성들의 상황이 한국과 다르지 않구나.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이슈들이 곧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갈 수록 세상과 연대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게 된다. 달라 고스따가 인간이 자연에게 가하는 착취 행위에 대해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요즘 한국에서 화두 되고 있는 채식주의자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의 인권신장과 지구를 더 이상 오염 시키지 말자는 환경운동까지는 언뜻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개인이 사회에서 느끼는 약자성의 공감대를 확대하여, 결국에는 세상의 다른 문제들과 맞닿게 만든다. 페미니즘을 향한 관심, 여성주의 책들의 계속된 출간 그리고 이 책을 읽음으로 변화되는 나의 사고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더 나은 사회로 가는 발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공평하고 공정하다고 느끼는 세상이 오게 되기까지, 달라 코스따가 세상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과 연대하여 투쟁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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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0년 11월 6일 <한국청년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6i6QJ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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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김현지, 이영주 옮김, 갈무리, 2017)


이 책에서 달라 코스따는 뉴딜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이 투쟁의 흐름 속에서 노동자는 국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회 재생산의 지형을 새롭게 그려나간다. 그렇다면 뉴딜과 복지 국가가 설립한 여러 기관은 노동계급을 구한 구원자였는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자율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망가뜨린 파괴자였는가? 달라 코스따는 여성과 국가가 맺고 있는 관계를 중심으로 복지 체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1986년에 초판이 출간된 후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오늘날 이 책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실감 나게 다가온다. 가부장제를 이용한 자본주의적 착취는 한 세대 동안 더욱더 노골적이 되었으며,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본질을 찾으며, 현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뿌리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갈무리, 2013)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요구했던 1970년대 여성운동에서 출발하여 19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더욱 열악해진 삶의 조건들을 회복하기 위한 공유재 재구축을 위한 운동까지,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몸담아 왔다. 『혁명의 영점』은 이러한 여성투쟁의 본질에 대한 페데리치의 40년간의 연구와 이론 작업을 집대성한 것이다.저자는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방식과 ‘소외된 노동’에 내재한 모순들의 이면에는, 집단적인 재생산과 관련된, 일상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영점(Point Zero)이 있음을 역사와 이론, 현실 운동 사례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 마찰, 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폭력의 진부함 ― 얼굴, 이름, 목소리가 있는 개인을 위하여』(이라영 지음, 갈무리, 2020)


성폭력뿐 아니라 사회의 많은 차별과 폭력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일상적 현상이다. 이처럼 문화화된 폭력은 폭력을 폭력처럼 보이지 않게 만든다. 제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폭로는 이 문화화된 폭력을 보이게 만들려는 피해자 개개인의 분투이며 최후의 구조요청이다. 이 책은 그렇기에 사회구조에 맞서는 개인의 폭로가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러한 발화가 가지는 맥락을 강조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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