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9/1 스크린의 추방자들 (미술관은 공장인가)

작성자
lynggaard
작성일
2021-09-01 11:29
조회
423
미술관은 공장인가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와 같은 정치영화의 상영은 금지 처분을 피하기 위해 공장에서 상영되었지만 이제 정치영화는 공장이 아닌 각종 화이트큐브에서 상영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포드주의적 공장이 사라지고 다른 한편 영화가 급속히 상업화되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정치영화를 보는 인파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는 영화가 현실에서 고립되어 부르주아적인 고급 문화에 억류됨을 의미하는가? 사실 화이트큐브의 텅빈 공포와 공허야말로 이 시대의 현실이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이동한 적이 없는데 이 화이트큐브는 구 공장 건물들에서 변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전시–투기–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공간은 “거리감을 뺀 아우라. 열성껏 무급노동하는 인턴 직원들, 문화 산업의 공식 대리점”으로서 다른 방식의 공장이 되었다. … 여전히 생산과 착취의 공간이면서 정치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생산적 전환]
‘사회적 공장 (social factory)’ 이란 1960년대 맑스주의적 연구자들이 어떻게 포드주의적 공장시스템이 사회 전반의 독점적인 지배 기제가 되었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 이 맥락에서 앤디 워홀의 팩토리는 미술관의 새로운 본보기가 되었다. 사회적 공장에서는 사적, 공적 영역 모두가 초생산(hyperproduction)의 지대로 들어가게 된다.

미술관에서는 관객조차 노동자로 변모하는데 영화 및 미디어 비평가인 Jonathan Beller에 의하면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관람하기는 곧 노동하기이다. 그 이유는 감각이 생산에 동원되고, 매체는 관객의 미적 능력과 상상적 수행을 자본화하기 때문이다.

정치 영화의 역사에서 공장이 영화관이 된 이후, 영화는 이제 미술관 공간을 공장으로 다시 되돌린다. (76)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에서 보여진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독일계 영화 감독인 Harun Faroki가 새로운 설치작업으로 보여주는데 여기서 노동자들은 작업이 설치된 미술공간으로 입장한다. 실제 뤼미에르의 영화가 촬영되었던 공장은 영화관이자 행사장이 되었다. 공장 밖으로 나간 노동자가 입장하는 장소는 감정과 주목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및 문화 산업의 장소이다.

[영화관과 공장]
영화관과 포드주의 공장 모두 감금, 구속, 시간적 통제의 공간으로 조직되었다. 그런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이 대중(mass)이라면 미술관이 조직하는 사람들은 원자화되고 시공간 속으로 흩어지는 다중(multitude)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영화 작업의 단채널 작업과 달리 근대의 다채널 스크린은 다초점적 공간을 창출하며 산만함, 분리, 무관심을 통해서야 공통점을 갖는 다중에 피력한다. 이는 공공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공공 공간]
전통적인 공장, 오늘날의 미술관 모두 가시성을 극단적으로 통제하고 스스로의 비가시성을 중요시한다 (비싼 작품의 외부 공개 여부 등). 이러한 비가시성은 특히 영화적 작업을 포함하고 있는 현대미술관이라는 공공 공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게 만든다.

Thomas Elsaesser는 미술관 내 영화관이 부르주아적 공공 영역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최후 사례일지 반문한다. … 실상 동시대 미술관은 불협화음에 가깝다. 설치 영상을 제대로 관람하지 않고 공간을 순회하는 관객의 행동은 능동적 편집자이자 전시의 공동 기획자 일 수 있다.

[주권적 주체]
Elsaesser는 미술관의 덜 민주적인 차원에서 대해 “보호 감찰” (예외적 상태, 적법성의 일시적 중지)이라는 상태로 표현한다. 여기서 그 주체는 설치 형식으로 공간을 구석함으로써 폭력적으로 자신의 법을 입법하는 소시민적 독재자로서의 미술가를 상정한다. 그러나 미술관 안의 다중인 큐레이터, 관객, 작가, 비평가가 모두 경쟁 속의 주권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미술관에서 영화적 시간의 장악 자체의 어려움이 보여주듯 전시의 의미를 장악하려는 부르주아 주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공공 영역은 ‘결핍’을 공공화하고 공공이라는 다중은 상품화라는 부분적인 비가시성, 불완전한 접근성, 분산된 현실을 전제로 작동한다.

[균열]
정치 영화의 문제는 미술관안 정치 영화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되어 공장 안 영화적 정치학의 문제가 된다. 과거의 정치 영화가 현실 변화, 재현을 위한 도구로서 평가되었다면, 오늘날 영화 정치학은 탈재현적, 군중의 생산(교도가 아닌), 분산, 이동, 재구성을 조종한다. … 공장으로서의 미술관과 그 영화적 정치학은 누락된 다중적 주체를 청원한다. 그 부재와 결핍을 노출시킴으로써 이 주체를 향한 열망을 동시에 촉진시킨다.

[영화적 정치학]
관습적인 영화적 작업은 선재하는 것들을 반복하려 들지만, 정치적인 영화의 발화는 다른 형식을 제시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장에 부족한 것은 출구다. 정치적 영화야말로 사람들이 미술관이라는 사회적 공장을 떠날 스크린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로서는 누락된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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