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 갑수 찾아 삼만 리 / 유채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09
조회
1423
갑수 찾아 삼만 리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갈무리, 2017)


유채림 (손님들이 좌파식당으로 부르는 「두리반」 주인의 남편, 소설가)


* 이 서평은 웹진 『문화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hAjv66


갑수는 머리가 홀랑 벗겨졌고 얼굴이 새카맣다.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를 읽는 내내 전두환보다 더 머리가 벗겨진 갑수를 찾았다. ‘대한제국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철도건설 과정’을 담은 1장에서 갑수는 안 보인다. 고종황제가 철도건설을 원했다는 얘기는 나온다. 돈 없으면 국으로 있을 일이지 웬 철도? 신하들은 빡세게 반발한다. 철도건설은 결국 가을족제비보다 욕심 사나운 일제가 따먹는다. 일제는 손 안 대고 코풀 듯 철도건설을 해나간다. 땅은 강제수용하고, 노동력은 선로변 조선 민중을 끌어다 채운다. 이런 젠장! 돈 한 푼 안 들이고 철도건설이 가능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가 할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때는 늦으리! 어쨌든 1장에서 갑수는 안 보인다.

패망한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갔을 때 철도노동자는 10만 명을 헤아렸다. 그들의 평균임금은 쌀 두 말 값이다. 한 말이 8kg이니 16kg으로 여덟아홉 식구가 한 달을 버텨내야 한다. 자식들 교육은커녕 밥만 먹기에도 모자라 점심도시락 싸오는 노동자가 105명 중 15명에 불과할 정도다. 이게 사는 건가? 그러니 1946년 9월 23일 자정, 그들은 처우개선,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철도 파업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전국적 파업이었다. 서울에선 용산기관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당연히 미군정이 원치 않는 파업이었다. 조폭두목 김두한이 부하들을 이끌고 용산기관구로 쳐들어가자 미군정은 매우 흡족해했다. 김두한은 일단 열두 발의 실탄을 탕탕탕탕 쏘아댔다. 철도노동자들은 벌벌 떨었다. 벌벌 떠는 철도노동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김두한은 부하들에게 시어터진 목소리로 건물을 빙 돌아가며 휘발유를 뿌려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파업을 주도한 간부들에게 알아서 튀어나오라고 겁박한다. 여덟 명이 치명적으로 떨면서 기어 나오자, 김두한은 부하들에게 그들을 처형시키라고 명한다. 그걸로 철도총파업은 끝난 것으로 보였으나,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투쟁은 계속된다. 철도총파업은 마침내 승리한다. 일급제는 월급제가 되고, 쌀 배급과 급식의 전면 실시도 이뤄진다. 여기까지가 2장, 3장의 얘기지만 갑수는 아직 안 보인다.

하면 갑수는 언제쯤 나오는 걸까.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에 갑수가 정말 나오긴 하는 걸까. 만약 끝까지 안 나온다면 그 실망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두리반」 보쌈을 면전에 두고도 젓가락 들 기분조차 안 드는 건 아닐까. 다행히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는 120년 동안의 철도 발전사가 아니라 철도노동자들의 지난한 삶의 기록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게 꾸준히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1960년 9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 한 예가 되겠다. 당시 철도노동자들은 한 해 동안 무려 1500여 명이나 과실치사상의 혐의로 입건된다. 이유는 선로변에 있었다.

선로변엔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판잣집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철길에서 놀았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그만한 놀이터가 없었다. 철길에선 날마다 장도 섰다. 기적소리 울리며 철마가 달려오면 잽싸게 선로변으로 피했다가 다시 놀고, 다시 장이 서는 식이었다. 장기를 두다가 쌈 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철마가 지나기 전엔 한나라 포에 떨고 있었는데, 철마가 지나고 나니 초나라 차에 당할 판이었다. “씨발, 내 포가 여기 있었잖여?” “염병하네, 내 차가 여기 있었다니까 그러네.” 실인즉 그런 싸움은 별거 아니었다. 문제는 달려오는 철마를 미처 피하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 철로에 올려둔 돌이 튀어 할머니 옆통수에서 피를 쏟게 하고, 개나 돼지가 즉사하는 것, 그게 문제였다. 그 일로 철도노동자들은 번번이 입건되었고 신속하게 해고되었다.

철도노조는 분연히 일어났다. “동포의 죽음을 막고 승무원의 신분보장을 위해” 1960년 9월 30일부터 무기한 안전운행에 들어갔다. 판잣집이 밀집해 있는 선로변은 시속 10km 이하로 운행했다. 선로변에 매놓은 황소가 철길에 누워 있다면 황소가 이동할 때까지 운행을 멈추고 기다렸다. 말이 철마지 거북이 찜 쪄 먹을 판이었다. 서울서 대전까지 다섯 시간 남짓 걸렸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결국 정부는 손들었다. 불가항력적인 사상사고시 무혐의 처리, 기본급 100% 인상안에 합의한 거였다.

승리가 반복되자 철도노조 집행부는 신났다. 그들은 점점 괴물로 변해갔다. 괴물의 정점은 노조위원장이었다. 위원장은 자리의 단맛을 아는 자였기에 허투루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1만 명이 넘는 조합원이 총회소집을 요구하고 직선제를 요구하지만,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나가고 있는데 웬 총회소집? 한번 간선제는 영원한 간선제로!” 한국노총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노조 집행부는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을 걷어차 버렸다. 조합원들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총회소집과 직선제를 요구하며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그게 2000년 2월 27일이었다. 노조 집행부의 대응방식은 치명적으로 단순했다. 그들은 농성장의 전원을 껐다. 그들은 괴한들을 풀었다. 괴한들은 농성 중인 노조원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뒤늦게 연락받고 달려온 노조원들이 괴한들을 포위했다. 괴한들은 끌려나왔고,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때부터 철도노조 집행부와 노조원들 사이에선 끈질긴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다. 노조 집행부 편인 한국노총까지 개입했으나 최종 승리는 노조원들의 몫이었다.

민주적 집행부가 들어섰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노총 탈퇴, 민주노총 가입이었다. 2002년 8월의 일이다. 그사이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는 종착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젠장, 벌써 다 봤네. 갑수는 여태 안 나오네.

남자승무원들은 정규직이 되고, 여자승무원들은 비정규직이 되는 KTX 승무원 얘기를 읽는 동안 잠시 갑수를 잊었다. 분을 참지 못해서였다. 여승무원들 얘기는 이명박근혜 시절로 이어졌다. 덕분에 마지막 철도이야기는 암울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갑수를 잊었다.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는 여승무원 문제와 해고자 복직 문제를 문재인 정부로 넘기고 있다. 간신히 희망을 말하고 있는 거였다. 다시 갑수는? 갑수를 다시 떠올렸을 때 책은 이미 덮은 뒤였다. 이런 젠장, 『만화로 보는 철도이야기』에서 갑수는 끝내 안 나오잖아? 1988년에 철도노동자가 된 갑수는 철도노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갑수는 해고와 복직을 반복해왔다. 내게는 고교후배이자 대학후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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