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 민주주의의 절대성 / 이정섭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10
조회
1263
민주주의의 절대성

조정환의 『절대민주주의』(갈무리, 2017)


이정섭 (수의사)


* 이 서평은 『울산저널』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CtSRr6


글자가 된 기호, 욕망은 더 이상 감히 욕망하지 않으며,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이 되었다. 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글자를 마신다. 눈은 더 이상 보지 않고, 읽는다. 몸은 더 이상 토지처럼 새겨지게 하지 않으며, 토지 밖에 있는 자요 새로운 충만한 몸인 전제군주의 복제 그림들 앞에서 조아린다. - <안티 오이디푸스> p 354
1.
여전히 군주제와 귀족정, 심지어 노예제도가 문제인가?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이 질문은 낯설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공화국과 자본주의에서 군주제와 귀족정, 노예제 등을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나 신보수주의 등 새로운 개념들이 우리 상황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이라 믿었다.

이 믿음은 혼란에 빠졌다. 박근혜와 최순실 또 그 아래 권력 군상들의 언행, 소위 박사모라는 군중들의 시위 양상 그리고 세월호와 구의역 사건 등에서 드러난 권력의 알살 등 이러한 일련의 보도들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도들 속의 인물들은 그간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익숙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개념들과 많은 경우 절연한다. 오히려 왕조시대에나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군주제와 귀족정 그리고 노예제의 개념들이 이 시기의 우리 사회를 더 적확하게 묘사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군주와 귀족들 그리고 노예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민주주의>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를 명확히 군주제와 귀족정의 사회로 설명한다.

“이 귀족집단이 군주와 연합하고 있는 경우에 국민은 군주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수단도 갖지 못한다.”(p15)
이 문장의 맥락은 대통령의 권력이, 집권 여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차지하는 경우 권력 원천인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군주는 혈통적으로 계승되는 왕은 아니다. 시민들이 5년마다 단임제의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권력이다. 하지만 집권 여당과 기득권층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통령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절대권력은 그들의 스펙터클적 조정을 통해 시민들을 재탄생시키려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어느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선견처럼, 1%의 군주와 귀족, 99% 국민이 개 돼지인 신분제 즉 노예제 사회로 고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군주제는 민주주의로 위조되고 귀족들은 국민들을 조정하고 국민들은 필연적으로 부채에 허덕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이 말하더라도, 국민이 단순한 권력 원천일 뿐 권력 행사에 제한을 받고 실제로는 대의권력들의 통치대상으로만 기능한다면 국민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p16)

그러니 저자에게 대한민국 헌법의 민주주의는 허약하기 그지없다. “헌법 속에 정말 ‘민주’가 있는지”조차 의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민들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군주와 권력의 구성에 따라 언제나 반작용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이다. 모든 작동의 키는 절대적으로 군주와 귀족들이 쥐고 있다. 상대적 민주주의 하에서 반작용하는 국민은 군주와 귀족들에게 항상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2.
여기서 저자의 해법은 민주주의의 절대화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본질적으로 기속(羈束)적 대의제(권리의 위임이 권리의 양도로 이어지지 않는 대의제의 속성. 맑스가 ‘파리 코뮌’에서 발견했다.)이어야 할 대의적 위임이 자유대의제적 양도로 나타나는 현행의 대의민주적 법치주의 속에서, 은폐되고 억압되어 결국 소실되고 망각되어 온 절대 민주적 구성력을 재발견하여 그것의 잠재력을 더 완전하게 실현시킬 구도를 어떻게 발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p19)

민주화는 어떤 잠재된 것 즉 은폐되고 억압되어 결국 소실되고 망각되어 온 절대민주적 구성력과 관련이 있다. 그 잠재된 것을 호명해서 민주적 구성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하고, 그 잠재력을 더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구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 절대 민주주의의 해법이다.

3.
무엇이 잠재되어 있고, 무엇이 억압되어 소실되고 망각될 위험에 처해 있는가? 그것은 ‘민’이다.
“민은 그 능력의 현실적 한계 지점에서 주권이 발생하지만 거꾸로 주권의 한계는 민의 잠재력 구성력 그 자체이다. 민의 구성력은 자연/우주의 창조력으로서 존재자들을 도약시키는 생명력이다...민은 매 순간 자신의 욕망, 정동에 따라 서로 다른 이익들과 의지들을 추구하고 표현하는 힘들의 절대적 연합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은 공통되기의 경향 속에 있는 특이성들을 가르키는 다중에 다름 아니다. ...민의 이 절대적 연합은...현실의 한계를 부단히 극복하고 존재를 더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공통되는 운동체, 즉 공통체로 실재한다.”(p18)

이 ‘민’은 분자적이다. 이 분자적인 것의 한계로서 초월적 주권의 정치적 소비자로의 변질이 탄생하고, 이 그램분자적 소비자의 한계가 역으로 민의 잠재적 구성력, 정동, 생명력을 낳는다. 이 힘들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운동이며 그 운동의 경향은 공통되기이며 그 안에 다양한 특이성들의 생성이다. 그러므로 이 ‘민’은 특정 시대의 정치 사회적 해방운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운동들은 이 민의 현실화의 계기들이다. 이때, 이러한 민의 현실화는 어떤 우회일 수밖에 없다. 지속하는 생명체의 현실화는 진공 속에서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현실화의 우회를 통해 민은 항상 시대와 호흡하며 그 시대의 다중으로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군주제와 귀족제 또한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반복은 어떤 허구의 반복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파괴될 운명을 지녔다. 민의 잠재된 고유한 생명력을 드러낼 때 군주제와 귀족제는 아래로부터 파괴된다. 어떻게 분자적 ‘민’의 욕망을 현실에서 흐르게 할 것인가가? 그 모색은 저자의 절대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다름아니다. “죽음은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이되 밖에서 오는 것이어야 했으리라.” 들뢰즈의 이 문장에서 이 ‘밖’은 모든 상대주의적 민주주의의 죽음을 가져오는 바로 저자의 절대 민주주의이리라. 우리는 그것을 안에서 경험해야 한다.

4.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이 책의 절대 민주주의는 어떤 현실적 양태를 함의하고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탈자본주의 혹은 새로운 탈국가(아나키즘) 사회 혹은 그 사회를 향한 사회 운동 등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

“1968혁명은 국가를 중심에 놓지 않은 새로운 국제주의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아래로부터 다중의 이 투쟁은 노동의 새로운 질에 근거한 것이었다. (중략) 다시 국가에 의지하고, 그것을 핵심수단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은 보수적이고 패배주의적 노력이다. 그것은 절망에 기초한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오늘날 노동의 전 지구적 재구성과 그 인류적 공통화에 상응하는 정치적 요구를, 국가체를 넘는 공동체의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다.”(p146)

여기에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질곡으로 국가와 자본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절대민주주의에서 탈자본주의나 탈국가을 지향한다는 것은, 역의 경우 즉 탈자본주의와 탈국가 같은, 새로운 사회 경제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구축한다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만일 이때에도 현실의 새로운 계기에서 민주주의를 고민한다면 이때의 민주주의는 지금의 절대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절대민주주의의 완전체가 실현될 미래의 어느 날은 있는 것일까?

상대와 절대는 이런 의미에서 권력의 분배 양태나 어떤 형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작동시키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며, 그들이 작용시키는 새로운 민주주의 ‘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절대 민주주의란 탈자본과 탈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 다름 아니다. 절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를 희망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주체를 세우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다. 바로 그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반(反)인간이면서 새로운 인간일 그들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절대 민주주의는 비록 탈자본주의나 탈국가를 배제하진 않겠지만 그것들은 궁극의 답이 아니다. 새로운 인류를 위한 부단한 실험이다.

5.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좀 더 절대 민주주의를 가깝게 경험할 수 있다. 절대 민주주의는 어떤 기원이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공동체)을 아래로부터의 삶정치라고 부를 때 그것은 우리들의 노력을 집중시켜 제거해야 할 집약적 표적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매순간 우리의 지각의 양식, 정동의 양식, 행위의 양식 등 이른바 삶의 양식 자체를 능동적으로 혁신하고 그것들을 연결시키려는 개별적이고 집단적 노력이어야 한다. (중략) 인류의 삶의 근원적 공통성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우리의 삶에 대한 면밀한 조사는 인류인주의적 삶정치의 긴급한 요청이다.”(p146)

절대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삶 정치이다. 지금 구체적인 삶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의 관점에서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새로운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학교, 삶의 공동체 위에 새워진 새로운 경제 공동체로서의 협동조합,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학습공동체들,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과 공생하는 무역, 공정한 여행을 위한 여행사, 등 등 절대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가지 수 만큼이나 공통되기와 특이성들의 생성에 따라 그 구체적 양태들을 뻗어나갈 수 있다.

저자는 핵에서도 절대민주주의를 상상한다. 핵이 절대민주주의의 논제가 될 때 자본주의적 상대 민주주의의 이윤 논리는 사라진다. 거기서는 앞으로와 미래세대를 아우르는 자연과 인류의 공존이 1차적이기 때문이다. 반핵은 따라서 절대민주주의를 따라온다.
삶정치의 와중에 생산되는 주체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다음 시대를 예고하는 새로운 인류와 그들 공동체의 전조라 할 수 있으리라. 혁명은 그렇게 일상성의 혁명이다.

6.
마치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제와 귀족정은 우리 삶에서 근본적이다. 혈연 체계로서 왕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유연하고 강력한 군주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귀족들은 이 군주들을 해바라기하며 온갖 영역에서 우리 삶을 짓누르고 거기서 생산되는 고혈로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축적하고 있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반작용하며 때로는 조금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위로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가책하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누군가가 죽어도 내가 아니라 다행이고, 그들은 단지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을 뿐이다. 초라한 자기 영토를 위해 굴종하고 이기적이 되는 삶들, 바로 그런 삶이 노예적 삶의 전형이다. 민주주의를 상대적으로 만들어 국민을 민주주의에 대해 반응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모든 민주주의의 수식어들은 민주주의의 본래적 가치를 역전시키고 그 외형만 보전한 채 우리 사회의 군주와 귀족정의 실체를 위장한다. 노예의 삶을 거부한다면 저 수식어를 갈아치워라. 아니 민주주의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마라. 그 민주주의의 의미만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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