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베를린연대기 (155-192)

작성자
naebilato
작성일
2018-12-14 18:34
조회
674
베를린 연대기 (155-192)

베를린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벤야민의 여행가방에는 들여다 볼수록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짐처럼 들어있다.

우선 도시와 교류하는 주체인 '나, 벤야민'이 있다. 세살배기 어린아이부터 서른즈음의 청년운동가까지 베를린과 함께 한 벤야민이다. 기억을 재방문하는 주체로서의 벤야민이다. 그리고 도시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결정적 제안과 안내를 담당한 안내자들이 있다. 벤야민에게 매개체이자 매체가 되어 준 것들이다. 보모로부터 시작되는 안내자 계보는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레옹 도데로의 파리의 경험에서 베를린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프란츠 헤셀의 '파리에서의 산보'와 '베를린에서의 산보'로 이어진다. 이름들을 가진 공간, 장소 그리고 거리들이 사건들과 혹은 사건들과 무관한 듯 나열된다. 역사나 신화의 상징물들이 있고, 그에 따른 이야기도 있다. 그것들 안에는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습관,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있다. 이렇듯 모든 장소들이나 사건들은 기억을 통해 재방문 됨으로써 재현된다. 그 과정에서 빛바랜 과거로 사라진 그림자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떠오른 실체인양 선명한 것들도 있다. 미로와 비밀, 사랑 그리고 고백과 같은 여행자의 관심과 열정 그리고 섬세한 감성이 문자화된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베를린을 전달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써 내려간 글은 이야기의 시작과 마무리가 일맥상통하지 않아 보일 때가 있다.  어린 벤야민의 의식일까 기억을 불러오는 벤야민의 흐름일까? 이 기술 방식 자체가 어린 벤자민의 사고 구조나 기억의 회상 방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또한 도시의 미래에 대한 함축적 비유가 숨어 있다고 읽어본다. 지리와 지명, 지형적 환경, 사물, 특정한 사람, 동화적 비유, 특별한 상황, 일련의 사건 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양한 변화과정을 거쳐 의외의 도달점에 이른다. 그 과정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서 계급성, 목격과 해석, 사건의 진위, 환상 과정, 동화적 비유와 직관 등 독자로 하여금 베를린에서의 벤야민의 개인성과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그 변화를 보다 더 가깝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도구로 삼는 듯 하다.

어린 벤야민의, 베를린
  
'아마도 어떤 일에서든 무력함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일에서 결코 장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러한 무력감이 처음에, 혹은 노력을 시작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와중에 생긴다는 점 또한 이해할 것이다. 유년시절의 끝무렵부터 대학 시절의 초기에 걸친 시기인 내 삶의 중간에 나는 베를린과 그러한 관계에 놓였던 것 같다.' (157)
 
기억 맵핑과 매체로서의 현 시점
 
'나는 내 삶과 생명의 그래픽 공간을 지도 위에 그려보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일종의 파루스 지도가 떠오른 적도 있다. 도시의 내부를 보여주는 참모 지도가 있다면 그 지도를 택하겠지만 미래의 전쟁터로 오인하는 바람에 그러한 참모본부의 지도는 내게 주어질 것 같지 않다. 나는 일종의 기호 시스템을 고안해 냈다. 만약 내 친구들의 집, 청년운동 시절의 '토론실'에서 공산주의 청년회 모임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단체가 모이던 장소들, 하룻밤을 지냈던 호텔 방, 창녀의 방, 티어가르텐의 중요한 벤치들, 통학로, 우리들이 하관을 지켜보았던 무덤들, 이제 그 이름들은 알 길 없지만 당시 우리의 입에 매일 오르내렸던 카페들이 휘황찬란하게 늘어선 장소들, 지금은 텅 빈 임대아파트들이 서 있는 테니스장, 마치 체조실에 있는 것처럼 끔찍하게 느꺼진, 금박과 석고 장식의 무도장, 이 모든 곳들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표시할 수 있다면 회색 바탕의 지도는 다채로웠을 것이다.' (158)
 
'원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쪼개고 펼쳤던 이유는 바로 접혀진 주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고유한 것, 어떤 이미지, 어떤 맛, 어떤 촉감 때문이 아닌가. 이제 기억은 작은 것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미세한 것으로 파고 들어간다. 이와 같은 소우주 안에서 기억에 일어나는 일은 점점 더 대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관여했던 치명적인 유희였다.' (160)
 
'이 글에서 내가 시도하는 조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가 무엇이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이미지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비록 베일에 싸여 있기는 하나 다가올 미래의 윤곽이 마치 산정상처럼 선명하게 부각되는 매체란 다름아닌 글을 쓰는 사람의 현 시점이다. 그 시점에 따라 그는 자신의 과거 경험의 연속체를 다르게 편집한다. 이로써 경험의 연속체 안에서 새롭고 낯선 구성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66)
 
경계 넘기
 
'한길 가에서 창녀에게 말을 걸면서 느낀 (…) 이처럼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는 행동은 처음에는 언제나 지형적 경계의 넘어서기로 나타난다. 그래서 거리의 전체적 면모에서 매춘의 포지를 발견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로 경계 넘기를 한 것일까? (…) 사실 대도시에는 허무로 빠지는 경계 지점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창녀들이란 허무의 숭배를 관장하는 수로신들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임대아파트 단지의 대문 안에, 부드러운 소리가 울리는 승강장 아스팔트 위에 그렇게 서 있다. 이러한 도시의  미로에서 내게 특히 친숙한 것은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행정구역을 갖고 있다. (…)프리드리히 거리 역 등과 같이. '(167)
 
기억과 공유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이 마르크트할레라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 사람들은 '마르크탈레'라고 발음했다. 그런 발음 습관 때문에 '마르크트'와 '할레'라는 단어 모두 원래의 의미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그 의기가 불분명해졌다. 마찬가지로 나의 걸음걸이 때문에 그 시장에서 접하는 어떤 이미지도 더 이상 물건을 사고파는 원래의 시장 개념에 부합하지 않을 정도로 불분명해졌다.' (173)
 
'하이델베르크 시절 나는 서정시의 본질에 대한 한 고찰을 통해 내 친구  프리츠 하인레를 되살려 내려고 사심없이 시도한 적이 있었다. (...) 그는 19세의 나이에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그를 만날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산 삶의 공간을 서정시의 공간에서 불러내고자 한 최초의 시도는 헛수고였다. (...) 강연을 들었던 청중의 몰이해와 속물근성 대문에 아무런 효과도 없이 끝나버렸다. 그 이후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고, '회관의 공간들을 이제는 뚜렷하게 묘사하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죽은 하인레를 위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창작이 전재되는 정신적 공간을 가늠해보는 일보다는 한 때 그가 살았던, 그가 존재했던 외적 공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삶의 중요한 마지막 해에 하인레가 통과해간 공간은 내가 태어난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인레의 베를린은 '회관'의 베를린이었다.'(176)
 
지식인의 무력감과 한계
 
'우리는 도시 베를린에 있는 학교를 개혁하고, 학부모들의 비인간성을 꺾어버리며, 학교 안에 휠덜린이나 게으로게의 어휘들이 자리 잡게 한다는 목표 의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베를린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두어도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 손을 대지 않고 인간의 태도를 고치겠다는 최악의 영웅적 시도였다. (...) 당시 우리 모임의 중심에 '청년의 언어가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한다. 또한 당시 우리에게는 우리 힘과 자만심의 절정으로 보였던 저 언쟁만큼 우리의 무력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도 없었음을 안다. (178)
 
오늘날 지식인들의 '토론실'이 있다면, 이 순간에 감당하고 느껴야 할 '한계'는 어떤 것일까?
 
하지만 한계는 언젠가 통찰력을 얻게 될 때를 위해 나를 성숙시켰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벤야민이 발견한 부르조아 청년 지식인들의 모임과 한계에 대한 인식은 다음으로 묘사되었다.
'우리가 반기를 들었던 부모와 결코 다른 사고를 가지지 않았던 어던 부모의 친절에 감사해 하면서 집회장소를 사용했으며, 시중드는 종업원을 단 한순간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술집에서 문학의 밤을 열었을 때도, 차마 자물쇠로 잠가 둘 생각을 하지 못했던 가구로 장식된 우리의 방에서 여자친구를 맞이하면서도, 토론실의 주인과 건물 관리인 그리고 우리의 친척과 후견인을 상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한계를 느꼈다. 하인레와 여자친구가 죽은 후, 슈투트가르트 광장 근처의 이상야릇한 역전 호텔 외에는 다른 방을 구할 수 없었던 치욕 속에서도 한계를 느꼈다. 묘지조차 우리에게 소중했던 모든 것에 도시가 어떤 한계를 부여했는 지를 증명해 주었다.' (180-181)
 
도시와 공론장 혹은 보헤미안의 사령부 ; 카페
 
도시와 함께 변하고 도시 부르조아의 얼굴이었던 카페는 공론장이자 피난처였으며, 시대상이 여과없이 반영되는 문화 공유 공간이기도 하였다.
 
'독일의 경기가 좋아지자, 보헤미안 집단은 표현주의의 혁명 선언이있던 시대에 그들 주위를 감돌았던 위협적인 분위기를 점차로 상실했다. (…) 예술가들은 무대 뒤로 물러나면서 점점 카페의 소도구의 일부가 된 대신, 증권업자, 경영자, 영화나 연극 매니저, 문학 판매원 등으로 대변되는 부르조아 계층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에 그 카페는 유흥술집이 되었다. (…) 매일매일 자신의 사무실과 가족이라는 사회적 조직 안에 갇혀 있는 대도시 부르조아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필수불가결한 기분전환 중에는 또 다른 세계에 빠져 보는 것도 포함된다. 그 세계는 이국적일수록 더욱 환영받는다.'
 
도시와 구원
 
원시민족들이 먼 훗날을 예견하는 힘을 준다고 믿는 식물들이 있듯이,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주는 장소들이 존재함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찾지 않는 산책길일 수도, 나무 꼭대기, 특히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도시의 나무 꼭대기일 수도, 기차역의 사물함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도시의 구역을 은밀히 구획짓는 문지방이 그러한 장소일 수 있다. (...) 무도회가 있는 날 밤이면 독수리 홀의 정문 앞에서 몇 해 동안은 볼 수 있었던 화려한 행렬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평상시의 이러한 쓸쓸함이 더욱 민감하게 느껴진다. 그 행렬은 이미 오래 전에 닫히 그 정문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188)
 
기억과 매체
 
'언어'는 우리에게 기억의 저장이 과거를 탐색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가르쳐준다. 죽은 도시들이 묻혀있는 매체가 땅인 것처럼, 기억의 저장은 체험된 것의 매체이다. 묻혀있는 자신의 고유한 과거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땅을 파헤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억의 어조와 태도를 규정한다. 진정한 기억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된다. 흙을 뿌리듯이 기억의 내용을 뿌리고, 땅을 파듯이 그 내용을  파헤치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억의 내용은 내부에 진짜 귀중품들이 묻혀있는 성층이나 지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짜 귀중품들은 아주 꼼꼼한 탐사를 통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 따라서 기억은 이야기 하듯이 진행해서는 안 되고, 사건을 보도하듯이 진행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은 서사적이고 광상곡과도 같은 리듬으로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서 삽질을 시도해야 한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점점 더 깊은 층으로 파헤쳐 가야 한다.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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