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 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를 고민하기 / 박해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36
조회
1526
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를 고민하기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


박해민(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 이 서평은 인터넷신문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goo.gl/si3Q2i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에서 뉴딜이 생산 영역뿐 아니라 사회 재생산 영역 기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여기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인다. 남편이 벌어 온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남편이 생산 영역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가정을 관리하며,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일이 이 시기 여성에게 할당된 일이었다.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생산 영역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서기도 했다.

여성에게 부가된 재생산 노동은 생산 영역 재구조화에서 필수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여성은 뉴딜에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 노동을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모두 대공황 시기 투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하는 여성은 실직한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고, 일하지 않는 여성은 남편의 파업을 ‘조력’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여성이 집에 있어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홈스테드 운동Homestead Movement과 한 가족 내 두 명이 동시에 공직에 있을 수 없다는(즉 여성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연방경제법이었다. 보수적 가족 규범은 여성이 수행한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덮어버렸다. 급속도로 퍼진 보수적인 가족 규범은 젠더 분업에 따른 생산/재생산 노동의 가치 위계를 정당화 했다.

코스따는 당시의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의 변화를 면밀하게 살피고 여성의 투쟁과 노동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노동’에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코스따는 당시의 여러 투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재평가하고 뉴딜, 국가, 여성의 관계를 새롭게 쓴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있을 때에만, 뉴딜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코스따가 뉴딜, 국가, 여성의 관계를 확정하여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스따는 ‘보수적 가족 규범이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 평가를 어렵게 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여성의 경험을 드러낸다. 사회보장법은 여성 투쟁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이후 보수적 가족 규범과 만나 여성 투쟁의 성과를 제한하기도 했다. 사회보장법이 ‘어머니의 선행’, 즉 어머니라는 ‘직업’의 성실한 수행을 지급기준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회보장법은 1960년대에 여성이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돈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주장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뉴딜이 대공황 때 ‘상실’한 가족의 위상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잠식당했던 여성의 경험은 1960년대에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채 되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대공황 시기 여성의 투쟁 성과가 또 다른 정치운동의 도화선이 된다는 점은 구조와 행위자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에 주목하게 한다.

뉴딜이후 점차 공고해진 가족주의는 대공황 시절 여성의 투쟁과 여성이 담당했던 재/생산 노동 경험과 불화한다. 코스따는 1930년대는 가족 제도를 강화하는 과정 중이었고, 뉴딜의 기획이 2차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했다. 코스따는 이 과정에서 여성이 겪는 모순에 주목했다. 전쟁 중 여성의 사회 진출은 크게 늘었지만, 전후 여성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여기서 30년대에 겪었던 모순은 배가된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여성에게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30년대부터 경험한 사회적 투쟁과 노동경험은 가정이 여성의 자리라는 보수적 담론과 충돌했다. 그리고 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은 1960년대 여성 투쟁의 동력으로 이어진다.

코스따는 사회보장제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의의를 인정함으로써 구조와 행위자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을 포착해낸다. 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과 주체의 행위자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며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또한 물적 조건과 담론 지형의 변화와 개인/집단이 구조와 협상해나가는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가족, 여성의 의미가 어떻게 채워져 왔는지 혹은 채워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코스따의 통찰은 1930년대의 미국과는 다른 시공간의 가족, 여성, 국가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촉발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재생산 노동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 복지 정책과 복지 ‘수혜자’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복지의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등의 문제를 기존 사회 운동의 역사 속에서 고민하는 일 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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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요구했던 1970년대 여성운동에서 출발하여 19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더욱 열악해진 삶의 조건들을 회복하기 위한 공유재 재구축을 위한 운동까지,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몸담아 왔다. 『혁명의 영점』은 이러한 여성투쟁의 본질에 대한 페데리치의 40년간의 연구와 이론 작업을 집대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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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정보사회, 탈산업사회, 주목경제, 신경제, 포스트 포드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응답을 한 권에 엮은 책. '물질노동이 헤게모니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로의 노동형태 변화를 주요 현상으로 지적하고, 비물질노동의 두 축인 정동노동과 지성노동을 분석한 후,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에 비물질노동이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1부에는 '정동'에 관한 질 들뢰즈의 연속 강의, 2부에는 마우리찌오 랏짜라또와 삐올로 비르노의 글을 실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주체성, 미적 생산, 시간의 재구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비물질노동 개념을 발전시켜 보려는 나름의 이론적 개입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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