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호] 공직인사에 관해: 국회의원 전수검사와 공무의 로봇화/조정환

쟁점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8:21
조회
813
공직 인사에 관해: 국회의원 전수검사와 공무의 로봇화


1. "한국당이 어디서 5.18 얘기를 하세요?" 김이수 청문회에서 고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가 자유한국당 이채익에게 한 말이다.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는 우리는 매일 백도라지와 같은 심정에 놓인다. 소도둑이 바늘도둑을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나무라고 있는 것과 비슷한 아이러니한 풍경들 때문에.

2. 이 아이러니는 구조적이다. 헌법이 고위공무원에 대한 청문권력을 국민이 아니라 국회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의 자유대의제 정치구도에서 국회의원과 고위공무원은 모두 귀족계급으로 기능한다. 선출직인가 임명직인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인사청문회는 귀족들 내부의 업무로서 선출직 귀족이 임명직 귀족의 자격을 심사하는 과정으로 된다.

3. "1)병역면탈 2)세금탈루 3)논문표절 4)위장전입 5)부동산투기".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내건 공직 배제 5대비리다. 지금 이것이 문재인 인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인선이 국민 1%에 속하는 관료귀족층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귀족층에게 이 5대 비리 기준은 너무 높다. 아니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 5대 비리야말로 자신들이 귀족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바로 그 조건이기 때문이다.

4. 현대 그림자 신분제의 귀족들은 법적으로는 국민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국민 밖에, 정확하게는 국민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개돼지"이지 인간이 아니고 병역과 세금은 헌법상 국민의 기본의무이지 인간의 기본의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병역을 면탈하고 세금을 탈루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는 바로 귀족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5. 논문표절도 귀족의 조건이다. "개돼지"인 국민들은 논문을 쓸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어쩌다 그 기회를 갖더라도 직접 논문을 작성하는 노역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귀족들에게 논문은 "개돼지들"을 부려 쓰는 것이지 '손수' 쓰는 것이 아니다. 대작과 표절은 엘리뜨 귀족에게 논문작성의 일반준칙이지 예외라고 할 수 없다.

6. 위장전입도 귀족되기의 조건이다. 점점 신분제화하는 학교체제에서 귀족신분의 세습을 위해서는 자녀들이 세습명문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위장전입 기술이 부득이하고 또 필수적이다. 또 부동산투기는 귀족층의 재태크의 핵심영역이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입수한 정보로 지가상승예상지역에 투기하여 돈을 버는 능력이 없다면 귀족으로서는 자격미달이다. 이처럼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인선문화 속에서 귀족되기의 필수요건들을 인선 배제 원칙으로 설정한 것은 모순인 셈이다.

7. 그런데 국민들의 시선에서 공직배제 5대비리 기준은 너무 낮다. 공직자들은 국민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국민들을 '이용'하는 너무 많은 주요 비리 행위들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융화하는 현대자본주의에서 비리의 온상인 금융투기와 주식투기가 주요 비리에서 누락되었다. 국가권력을 사익에 이용하도록 만드는 뇌물수수도 누락되었다. 다중의 성적 능력을 폭력적으로 이용하는 성폭력이 누락되었다. 아마도 이 목록은 좀더 길게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유형의 대자본가들, 즉 경제귀족들은 고용되었거나 고용되지 않은 수많은 타인들의 노동을 사적으로 전유하여 서로 분배하는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8. 국민에게 봉사하기보다 국민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공직에서 배제한다는 원칙의 본질은 "공통적으로 창조된 가치를 사적으로 전유하는 사람들"를 공직 배제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공직 배제의 바로 그 기준이 현대 귀족 신분을 정의하는 기준이기도 하니 어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국민을 위한 통치를 펼치려 하면서 귀족집단에서 공직자를 선출하려는 현대 군주제의 인선원칙은 자가당착적으로 된다.

9. 국회에서 소도둑이 바늘도둑을 도둑질했다고 나무라는 식의 풍경을 끝내려면 먼저 기존 공직자인 국회의원들에 대한 '전수검사'를 해야 한다.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에서는 바늘도둑을 비난하기를 정당하게 계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 전수검사를 담당할 것인가? 국회의원에 대한 (나아가 임명직 공직자에 대한) 전수검사는 "국회청문회"가 아니라 "국민청문회"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 수준에서 정해진 공직 배제 기준에 입각하여 공직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국회에서 배제한 후 국회에 신임공직자에 대한 청문역할을 맡길 것인지 아닌지를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

1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무원 관료집단의 사회적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날 '공통적으로 창조된 가치를 사적으로 전유하고 분배하는 사회집단'으로 되어 있는 정치, 경제, 문화의 고위층들이 지금까지의 관료적 관행에서 벗어나 가치의 공통적 창조의 풀무이자 생산된 가치를 공통되게 분배하는 하인으로 역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11. 절대민주주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국민-다중 평의네트워크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공무원, 즉 공적 하인(public servants)집단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자본주의 노예제의 문법구조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이들의 역할 중의 점점 많은 부분들을 로봇에게 맡기는 것은 아마도 불가피한 경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다중 평의 네트워크에 의해 적절하게 통제되는 '알파'-고들, 그러니까 '알파'-의회, '알파'-경영자, '알파'-대통령, '알파'-법관들, 요컨대 로봇 공직자들.

12. 바늘도둑을 나무라고 있는 소도둑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도둑질을 한 적이 없는 국민들조차 어쩔 수 없이 바늘도둑을 옹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감정체험은 실제로는 정치구조와 사회구조의 절대민주주의적 혁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우리 사회의 통증표출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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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책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이 책은 전 세계적 정치상황과 사회운동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진동해온 민주주의 논쟁을 절대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의 발견과 발명을 통해 한 걸음 더 전진시키려는 것으로 이러한 주제의 단행본으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책이다. ‘절대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대선 이후 초미의 관심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사회대개혁’이라는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구체화해 나가야 할지를 사유할 개념적 틀과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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