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_발제] 차이 그 자체 (p.115-124)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9-10-05 16:21
조회
523
1장. 차이 그 자체
4절.
1. 차이와 망아적 재현 : 무한대와 무한소 (p. 115)

‘차이를 만들기’에 본성을 두고 있는 선별은, 유기적 재현의 요구들에 따라 평균적 형상들을 측정하고 할당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의적 존재의 단순한 현전 안에서 극단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각기 자신을 펼쳐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큼과 작음을 극단적 형상들 자체의 특유한 선택지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극단은 큼이나 작음 안의 무한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무한은 심지어 큼과 작음의 상호 동일성, 극단들의 동일성까지 의미한다. {작은 것들 중에 가장 작은? 큰 것들 중에 가장 큰? - ‘가장?’}

자기 자신 안에서 그런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더 이상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즉 재현은 자신 안에서 표면상의 고요함이나 유기적 질서의 한계들 아래 숨 쉬고 있는 소란, 불안, 정념 등을 발견한다. 재현은 다시 괴물과 마주친다.

이제 개념은 전체이다. (...) 따라서 개념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르기까지 온갖 변신을 취하는 규정을 따라다니면서 그 규정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그리고 그 규정을 근거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 이 근거가 중심이 될 때, 상대적 최소나 최대 앞에 있는지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 왜냐하면 양쪽은 모두 근거 안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근거는 하나이면서 언제나 똑같은 ‘총체적’ 계기이다. 근거는 또한 차이가 소멸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 사라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국면이다. (역주24. 들뢰즈는 재현적 사유의 귀착점인 근거 아래에는 강도적 공-간들이 구성하는 바탕fond가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2. 이유로서의 근거 (p. 116)
한계라는 기초개념 자체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역주25. 다시 말해서 한계는 극한이 된다.) 이런 한계는 더 이상 유한한 재현의 마지막 경계선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유한한 규정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태어나는 모태, 규정이 망아적 재현 안으로 부단히 봉인되고 펼쳐지는 모태를 가리킨다.
[극한으로서의] 한계는 더 이상 형상들을 구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거와 근거 위에 놓인 것의 상관관계를 가리킨다.
한계는 더 이상 역량의 정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량이 발휘되고 근거지어지는 요소를 의미한다.
: ‘가장 큰’, ‘가장 작은’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지닌 상관관계와 그들이 지닌 역량

라이프니츠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규정되는 것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가장 큰 것인지 가장 작은 것인지의 여부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한을 고려하게 되면, 규정되는 것은 그런 물음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 ‘작은 것 중에 가장 작은 것’ = ‘가장 작은 것 중에 가장 큰 것’ {역량, 완전, 근거}
어떤 경우든 가장 완전한 것 혹은 가장 잘 근거‘지어진’ 것을 찾아내는 어떤 ‘건축학적’ 요소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망아적 재현은 차이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차이를 선별하지만 이렇게 차이를 근거와 관계 ‘짓는’ 무한을 도입하는 가운데 선별하기 때문이다.

유기적 재현의 원리는 형상에, 그 재현의 요소는 유한에 있다. {크다, 작다}
망아적 재현의 원리는 근거에, 그 재현의 요소는 무한에 있다. {근거에 맞게 잘 지어진}
규정을 사유 가능하고 선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무한이다.
따라서 차이는 이제 규정에 대한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으로 등장한다.

{망아적 재현의 이원성}
(큼과 작음, 최대와 최소라는 두 사태는 무한 안에서 서로 차이가 없거나 동일하게 되었고, 차이는 근거 안에서 그 두 사태와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되었는데도)
하지만 왜 망아적 재현에는 여전히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선택지가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한이 유한한 규정이 사라져버린 장소가 아니라는 데 있다. 망아적 재현이 자기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한다면, 단지 유한한 규정을 존속하도록 내버려둘 때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망아적 재현은 게다가 이 유한한 규정 자체를 통해 무한을 언명할 때만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수 있다. → 망아적 재현은 유한한 규정을 소멸했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다만 소멸 중에 있으며 막 사라질 찰나에 있는 것으로, 따라서 또한 무한 안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과거, 미래} 이 재현 안에서는 본성상 무한과 유한이 서로 같은 ‘불안’을 겪게 되며, 정확히 이 불안에 의해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재현의 조건들 아래 무한이 유한 자체를 통해 언명될 때, 이 언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무한은 무한하게 작은 것으로 언명되거나 무한하게 큰 것으로 언명된다. 이 두 가지 방식, 이 두 ‘차이’는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 다만 무한하고 지정 불가능한 두 과정 사이에서 성립하는 양자택일의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다. (...)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각기 큼과 작음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한하게 작은 것과 무한하게 큰 것 사이의 양자택일에 다시 부딪힌다. 그렇기 때문에 망아적 재현은 어떤 이원성을 향해 열려 있다. 망아적 재현의 불안을 이중화하는 이 이원성은 그 불안의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3. 헤겔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p.120)
헤겔에 따르면 ‘모순’은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즉 모순은 스스로 해소된다. 그리고 스스로 해소되는 모순은 차이를 근거와 관계 짓는 가운데 해소해버린다. 차이가 유일한 문제인 것이다. “차이 일반은 이미 모순 그 자체이다. ... 오로지 모순의 정점까지 이끌려갈 때만 비로소 이형이나 다형은 잠에서 깨어나고 활력을 얻는다. 또 그럴 때만 이 변화의 부분을 이루는 사물들이 부정성을 취하게 된다. 이 부정성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이며 살아 있는 운동의 내재적 충동이다. ... 실재성들 간의 차이를 충분하게 멀리 밀고 나아갈 때, 상이성은 대립으로 생성하고 그 결과 모순이 되며, 마침내 모든 실재성들 전체가 이번에는 절대적 모순 그 자체로 생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단적이거나 상반적인 것들의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한다. 그러나 무한으로 나아가지 않을 경우, 대립은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또 무한은 유한한 대립들의 바깥에 위치한다면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머물게 된다. → 즉 무한이 도입됨에 따라 여기서 상반적인 것들의 상호 동일성이 귀결되거나, 타자의 상반성이 자기의 상반성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상반성이 오로지 무한 안에서만 내면성의 운동을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하지만 내면성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어떤 무차별이나 무관심의 상태가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규정은 타자를 포함하되, 타자와는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규정은 외면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각각의 상반자는 자신의 타자를 배제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배제하며, 자신이 배제하는 그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모순이다. 모순은 외면성의 운동이거나 실재적 객체화의 운동이며, 무한의 참된 충동을 형성한다. 따라서 이 모순에는 실증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상호 동일성과 마찬가지로 상반자들의 단순한 상호 동일성이 극복되어 있다. 실증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같음의 사태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생성이면서 (긍정적인 것이 부정될 때) 동시에 긍정적인 것의 회귀이다. (긍정적인 것이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배제할 때). 물론 실증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 각각의 상반자는 이미 모순성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실증적인 것은 오로지 즉자적인 모순인 반면, 부정은 정립된 모순이다.” 차이가 자신의 고유한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정립된 모순 안에서이다. 이 모순 안에서 차이는 부정성으로 규정된다. 차이는 여기에 이르러 내생적, 본질적, 질적, 종합적, 생산적인 순수한 차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무차별성과 무관심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모순을 견뎌내고 지양한다는 것은 차이(사실적 실재와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현상 간의 차이)를 ‘만드는’ 선별적 시험이다. 이런 식으로 차이는 마지막까지, 다시 말해서 근거로까지 이끌려간다. 이 근거 안에서 차이는 무화되는가 하면 다시 돌아오거나 다시 생산된다.

이런 헤겔적 의미의 무한은 대립이나 유한한 규정을 통해 언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신학이 말하는 무한하게 큰 것, 자신보다 더 큰 것이 없는 실재라 할 때의 무한하게 큰 것이다.
칸트는 한 사물을 그것이 아닌 모든 것과 구별하는 실재적 모순의 본성을 처음으로 정식화했다. 이 정식화에서 실재적 모순은 “완결된 규정”이라는 이름을 얻고, 최고 실재에 해당하는 어떤 총체적 실재성의 정립에 의존한다. (이상) 따라서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이 무한한 크기, 이 숭고한 크기를 수학적으로 다룰 가능성을 기대할 여지는 없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유한 속에 무한을 끌어들이지만 이는 피조물들이 지켜야 할 겸양의 미덕을 위해, 신과 피조물들을 혼동할 모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오로지 무한하게 작은 것의 형태로만 무한을 유한 안으로 도입한다. (...) 비록 다른 길을 통해서일지언정 라이프니츠도 역시 유기적 재현을 극복하고 망아적 재현으로 나아가고 있다.

헤겔은 평온한 재현 안에서 무한하게 큰 것의 도취와 불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유한하고 명석한 관념 안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의 불안을, 도취, 현기증, 소실, 심지어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안을 발견한다. 따라서 헤겔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차이는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두 가지 방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자와 다자
동등한 것과 동등하지 않는 것
동일성을 띤 것과 차이나는 것
∴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그러나 헤겔의 출발점은 유라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무한은 유 안에 분열을 낳고 종 안에서 분열을 제거하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는 자기 자신이면서 종이고, 전체는 자기 자신이면서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은 본질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타자를 본질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현상들에 관한 한 비본질적인 것-운동, 동등하지 않은 것, 차이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제 비본질적인 것이 무한하게 작은 것에 힘입어 종으로, 유로 정립되고, 이런 자격에서 “대립해 있는 유사 종”이 되기에 이른다. 이는 본질적인 것이 타자를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수적 속성 안에, 개별적인 경우 안에 포함하고 있을 뿐임을 의미한다.

무한소의 분석(미적분학)은 본질들의 언어인가, 아니면 편의를 위한 허구인가? 이런 양자택일적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다. 왜냐하면 ‘ 경우’에 의한 포섭이나 부수적 속성들의 언어는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성을 갖기 때문이다. 본질들의 구별을 유지하는(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비본질적인 것의 역할을 맞고 있는 한에서 그 구별을 유지하는) 이런 무한소의 절차는 모순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그것은 “부차모순”이라는 특수한 이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무한하게 큰 것 안에서는 동등한 것은 동등하지 않은 것과 모순을 이루지만, 동등하지 않은 것을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또 동등한 것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이루지만 동등하지 않은 것을 부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헤겔) 그러나 무한하게 작은 것 안에서는 동등하지 않은 것은 동등한 것과 부차모순을 이루고 자기 자신과 부차모순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본질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자신의 경우 안에 포함한다. (라이프니츠, 들뢰즈) 본질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 안에 담고 있는 반면, 비본질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을 자신의 경우 안에 포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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