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기호와 기계] 서평회 발표문 모음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34
조회
1715
『기호와 기계』 출간 기념 집단서평회

기호와 기계


일시 :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오후 2시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강의실
사회자 : 심성보 (『기호와 기계』 옮긴이)
서평자
- 오영진 (수유너머104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 문화평론가)
- 이준형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 정한별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운영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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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오영진 / 수유너머104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 문화평론가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신작 『기호와 기계』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우선 복종과 예속을 구분하면서 우리의 삶이 기술적 대상과 언제나 배치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인간과 제도의 관계를 맺으며 어떤 구조 속에 ‘복종’하지만 동시에 기술적 대상과 결합함으로써 광범위한 사이버네틱스의 흐름 속에 빨려들어가 ‘예속’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복종이 닫힌 회로에 대한 은유에 가깝다면 예속은 신경계에 대한 은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시스템을 변경하면서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단독의 기계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배치된 방식으로, ‘접속된 기계들’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전등을 켠다. 나는 전력망을 “켜는” 촉매가 된다. 만일 우리가 거대한 전력망을 따라 전류를 쫓아간다면, 결국에는 핵발전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일련의 기계를 작동시킨다(레인지, 냉장고 등),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것들이 가사노동을 벗어나게 해준다. 적어도 가사노동의 효율이 좋아진다.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라디오 스위치를 올린다. 라디오는 말과 음성을 “기계적”변환에 완전히 종속시킨다. 그 결과 소리의 일상적인 시공간 차원이 중단된다. 소리 지각의 중추를 이루는 인간의 감각-운동 도식이 무력화된다. 말, 음성, 소리는 탈영토화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체, 장소, 영토, 상황과의 모든 관계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PP. 131-132

이렇게 우리들은 기계적 환경에 예속되어 전지구적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매개하는 주체성을 획득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안에서 주체성은 전 지구적 대량생산의 산물이다.”(P. 81) 기계와 예속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 이 책은 푸코의 장치론에 대한 랏자라또의 보강된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는 고유성과 잉여성이 존재한다.(크립키) 하지만 우리들의 언어는 이러한 언어의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콜센터의 매뉴얼에는 사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콜센터 직원과 고객이 대화 속에는 수화기를 타고 넘어가는 기계적 음성, 과도하게 친절한 음성, 가상적 인격의 플레이만이 존재할 뿐이고 응답의 매뉴얼 속에 깔금하게 교환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극대화한 체제가 아니라 책임을 극대화한 체제다. 끊임없는 자기관리는 돌봄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증을 체험케 한다. 1인 기업가의 세계. 끝없이 자기관리하는 기계같은 것이며 시스템 속의 노드로서 역할을 분주히 해내게 만든다. 우리는 항구적인 자본의 흐름 속 그것을 매개하는 존재가 된다. 내가 돈을 사용하는게 아니라 화폐의 흐름 속에 내가 있을 뿐이다.

푸코는 시장의 진실체계가 곧 통치성의 근거가 되며 이를 통해 우리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모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월스트리트의 금융봇 체계는 우리를 흥분에 휩싸인 신경노동자로 만들고, 거대한 금융시스템에 예속시킨다. 마치 포르노가 더 이상 욕망의 해방도, 섹스의 대용도 아닌 오로지 도파민 분비체계의 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욕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흐름 속에 놓여있다. 우리의 주체성은 이러한 곤경 속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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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이준형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기호와 기계』를 통해 랏자라또가 전개하는 논의의 핵심은 '예속'에 대한 인식과 전유라고 하겠다. 이전의 비판이론들의 논의는 주체 되기의 문제(주체화), 언어의 문제(구조주의 언어학, 분석철학), 심지어는 의식적 주체의 근간(무의식, 정신분석)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체 중심적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랏자라또는 그러한 논의들이 주체를 포획하는 방식을 '복종'으로 명명하고, 그것과 조응하는 것으로서 주체를 우회하는 '예속'의 개념을 꺼내든다. 기계적인 흐름들이 형성되면, 개체들은 단단해 보이는 주체, 개체로부터 탈구되어 흐름의 일부로, 기계의 부속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배치는 인식되는, 혹은 인식되지 않는 다이어그램으로서 전개체적인 것, 전의식적인 부분들에 정동적으로 직접 작용하고, 효과를 발휘한다.

랏자라또의 비판이 집중되는 곳은 언어학, 그 중에서도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언어는 버틀러와 지젝에 의해 주체에 선행하는 것, 주체를 초월하는 "기원적이고 근본적인 예속(p.86)"이라는 지위를 얻지만, 가타리를 경유한 라자라토에 의해 기호계의 양항 중 하나, 즉 기표적 기호계의 장치로 격하된다. 기표적 기호계, 즉 언어학적으로만 사유하는 경향들은,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상징들, 언어들에 의해서만 가닿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야기한 비기표적 기호계, 재현과 의미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작동할 뿐인 다이어그램이 새로이 설정된다. 비기표적 기호계의 '힘-기호'들은 의미가 아닌 잉여를, 의미론적 선택이 아닌 '선택의 영역'을 창출한다. 그것은 영역을 제한함으로써 우리의 실존을 창출한다. 그리고 실재에 직접 닿는다. 실재가 바뀐다.

발화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버틀러가 고수하고 있는 수행문에 대한 논의는 제도화된 문법 규칙, 역할의 분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전히 선행하는 언어 구조에 대한 것인 셈이다. 랏자라또는 이번엔 바흐친의 갈등적 화행론을 끌어온다. 바흐친은 언표행위가 대화적인 것이며,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경제학적 게임이론처럼, 말의 참여자들은 대화자를 참조하면서 일종의 게임을 벌인다. 이때의 화행적 행위는 단지 제도를 재현하고 반복하는 언어적 효과를 넘어서서 가치론적 지향을 갖는다. 물활론적 들썩임을 갖는다.

푸코의 파르헤지아적 진실-말하기는 이때에 등장한다. 현실을 지적하는 용기있는 말하기를 통해 실존은 변화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랏자라또가 기획하고 있는 정치적인 운동이라고 하겠다. 수행적이고 제도적인 담론을 우회하여 실존에 직접 가닿는 말하기의 방식인 것이다. 결국 실존에 닿아야 한다.

다시 주체화의 문제로 돌아오자. 랏자라또는 비판이론들이 '복종적 주체화'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을 전복하고 주체화의 '예속적' 과정들, 역으로 실존적인 과정들을 들추어내고 그것에 대한 분석을 요청했다. 우리의 실존에 직접 작용하는 배치들, 자연스러운 위계들보다 더 자연스러운 다이어그램들에 대한 분석말이다. 랏자라또는 저서에서 두 가지 미디어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영화와 TV가 그것이다. TV는 담론적인 언표행위들, 담론의 배치들을 통해 기표적이고 비기표적인 기호계에 작용한다. 그것은 제도적이고 언어적이다. 그러나 빠졸리니를 인용하는 영화론은 다르다. 영화는 기호보다는 사물들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사물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응시한다. 영화의 이미지들은 있는 그대로 실존에 작용한다. 영화산업이 그것을 전유하여 새로운 기계적 배치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하다고 하겠다.

미디어를 통한 주체화에의 접속, 단절 전략을 꾸민다면 어떨까? 게임을 넘어 4D, VR에 이르기까지 미디어 기술들은 기호가 경유되는 지점들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다. 영화가 말들을 넘어 실재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처럼 미디어들은 실재에 점점 가까워지려고 한다. 실재에 작용하는 미디어들을 자본의 배치가 아닌 또다른 배치의 도구들로 전유할 수 있다면, 주체화의 양상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

과학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정한별 /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운영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과학은 시대에 맞추어 정체성을 부여 받고,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그를 토대로 업적을 달성해왔다. 언젠가는 돈 많은 귀족들의 전유물, 취미활동이었고, 언젠가는 부유한 이들의 집안 뽐내기 수단이었으며, 언젠가는 종교와 신학의 도구였고, 언젠가는 제국의 구축을 위한 이념적이고 실천적인 수단이었다가 언젠가는 근대화의 화신이었고 곧 전쟁의 총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과학은 국가와 상호 계약을 맺었고 비로소 우리가 아는 바로 그 ‘과학’이 되었다. 과학이 변하는 동안 과학자들은 어떠했는가. 이들은 본질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 애썼다. 생물학적인 생존이 보장된 이후에는 지식적 이상을 추구했다. 오늘날 ‘자아실현’이라고 부르는 행동과 얼마나 같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들은 과학자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그리 해왔고,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와 계약을 하며 “과학자”라는 사회적 업을 부여 받았다.

고작 한 문단으로 축약해 본 과학자의 생존과 투쟁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복종과 예속을 넘는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주제는 이들의 지난 수세기의 노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랏자라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복종’을 중심으로 한 해석에 상당히 의존해 왔으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기계적 예속’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주체성을 논할 수 없다 말한다. 복종을 통하면 “인격화된 자본”이 되고 개인성을 드러낼 수 있으나, 기계적 예속 상태에서는 경제적 주체도, 시민도 아닌 배치의 일부가 되어 비인간들과 구분되지 않은 채 작동한다. 예속은 복종과 달리 대상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환원적 요소에 관심을 둔다. 저자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가 “그리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고 “장인과 노예의 작업을 “노동자”의 기계적 노동과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 경고한다 (p.51).

예속의 세계에서 기호는 혼합적이다. 주식시장, 미디어, 노동시장은 물리적 실체는 없으나 기호적 배치로 이루어진 “기계’이며, 여기서 작동하는 기호는 완전히 기표적이지도, 비기표적인 것도 아니다. 권력의 다이어그램을 작동시키는 데에—기계를 작동시키는 데에—초점을 맞추는 순간, 인간-비인간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딜러는 기계적 주체성을 스스로 취하고, 상담원은 상담로봇과 다를 바 없으며, 결국 사회민주적 기능은 노동에서 분리된다. 이렇게 기호화된 세계에서는 “인간과 기술적 기계는 구성요소, 또는 부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p.117). 이 때, 전문집단은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비기표적 기호를 통해 남은 이(것)들을 ‘관리’한다. 이 통찰은 다양한 전문성을 이해함에 있어, 혹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이 논지를 받아들임에 있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다. 실제로 과학자 집단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보는지 그렇지 않은지, 과학자들이 상호간 “전문성”을 얼마나 인정하며 누군가를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는지라는 질문을 탐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실이 혼합적 기호계임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결국 기계적 예속과 비기표적 기호를 통해 혼합을 바라본다. 그는 기호와 기계를 분석하며 비기표적 기호계의 대표적 예시로 과학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과학자를 따라가면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주제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과학자라는 직업/집단의 생성(shaping), 과학 지식의 생산(making), 그리고 이 둘과 주변의 재생산(reproduction)으로 이어진다. 사실, 특정 공간에서 생산이라는 코드를 따라가는 민족지적 연구, 특히 과학의 경우 연구실 민족지(lab ethnography)는 랏자라또도 인용한 브루노 라투어가 그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 과학기술학자, 과학철학자들은 연구실이라는 공간과 실험 기구들이 자연으로부터 잡아내는(inscript) 기호, 생산해 내는 지식, 사람과 부산물들, 그리고 2차적 영향이나 또 다른 환경의 영향 등을 공부해왔다. 이들은 과학이라는 것이 자본과 민감하게 연결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체계를 구성한다는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며 이는 랏자라또의 자본에 대한 이해와 궤를 같이하지만, 테크노사이언스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과학의 실체를 비기표적 기호계로서만 바라본다는 것은 과학자의 주체성을 과학이라는 지식 시스템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행위와 다름없다. 만약 그렇다면, 과학자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과학자는 사회에서 전문가로서 존중 받을 수 있을까?

랏자라또가 제시하는 혼합적 기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는 혼합적 기호계의 특징을 ‘언어’에 대입함으로써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대립구도를 설명하고자 한다. 과정들의 조직과 통제를 다루는 혼합적 기호계는 전문가의 전유물이며, 전문가들은 이를 베타적으로 활용하며 자신들의 일을 노동으로부터 분리한다. 미디어라는 기계는 특정한 혼합적 기호계의 유통을 유도하며 자신들의 언어로 상대방을 끌어들여 “’무식쟁이’를 효과적으로 침묵시켰다” (p.229).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저 언어의 기술적 성격이 주체성 생산의 모든 것이라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다. 발화장르의 표준화가 정치적 관계를 재생산 하듯이, “쓰레기” 발언이 교외 단지의 이주민들을 향해 위치를 정하라는 명령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생산과 흐름을 비기표적 기호의 관리로 해석하는 것은 랏자릿또만의 통찰은 아니다. 책에서 수 차례 언급하듯이 그는 자본에 대해서는 가따리의 주장을 빌려오고 있고 기계(machines)는 루이스 멈포드로부터, 권력, 감시, 통제, 규율에 대해서는 푸코와 들뢰즈 등의 학자들로부터 큰 생각들을 빌려온다. 문제는, 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생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권력, 규율과 통제에 대한 통시적 이해를 시도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많은 요소들을 어느 시점 이전에 묶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지식과 노동의 원천, 기술(technology) 그 자체의 속성과 이것이 사회와 맺어온 관계의 변화에 대한 취사선택이다.

멈포드의 ‘기계’는 수사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현실의 ‘기계’는 랏자리또가 지적하는 자본주의 권력기계의 일부이자 그 모든 특성을 물리적 실체로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공장에 대한 사유에서 이를 잘 드러내지만, 기술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춘 듯 하다. “기계에는 “가시적이고 공시적인” 차원들(구성요소, 도면, 방정식의 집합)이 존재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잠재적이고 통시적인 차원도 존재한다”고 스스로 선언했지만 (p.117), 랏자리또의 기계는 공장에서 멈추었다. 복종과 예속이 다르듯이, 공장과 지금의 기계 또한 다르다. 주체성 생산과 해방을 논하는 주체가 그 어떤 논증도 없이 인간으로 한정되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랏자리또가 제시하는 주체성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윤리적 주체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 그가 꿈꾸는 이상향이 과연 현실에 실재하는 것인지 또한 의문스럽기도 하다. “기계 중심적 세계에서 말하고, 보고, 냄새 맡고,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계들과 같은 편이 되어야 하며 비기표적 기호계와 같은 종류가 되어야 한다”(p.128)는 그의 생각은 실재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처럼 “네트는 광대해”라는 소회와 함께 물리적 허물을 벗어내는 모습이 그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주체성의 획득일지도 모른다.

과거, 황우석 박사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문구를 유명하게 만든 적이 있다. 이 또한, 랏자릿또를 따르자면 그저 복종만을 중심으로 한 해석에 불과하다. 기계적 예속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이 해방을 바란다면, 사실 자신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 하의 (비)인간으로 바라보고 권력 다이어그램을 조망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속을 벗어난 과학자가 과학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지, 그렇게 생산해 낸 지식이 정말로 ‘과학적’인지, 과학자들이 정말로 해방을 원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복종에 기반한 해석이 과학과 과학자를 서술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저, “과학에는 대출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빚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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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전 세계적 정치상황과 사회운동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진동해온 민주주의 논쟁을 절대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의 발견과 발명을 통해 한 걸음 더 전진시키려는 것으로 이러한 주제의 단행본으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책이다. ‘절대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대선 이후 초미의 관심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사회대개혁’이라는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구체화해 나가야 할지를 사유할 개념적 틀과 근거를 제공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비물질노동과 다중』(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외 지음, 갈무리, 2005)

'신자유주의, 정보사회, 탈산업사회, 주목경제, 신경제, 포스트 포드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응답을 한 권에 엮은 책. '물질노동이 헤게모니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로의 노동형태 변화를 주요 현상으로 지적하고, 비물질노동의 두 축인 정동노동과 지성노동을 분석한 후,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에 비물질노동이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1부에는 '정동'에 관한 질 들뢰즈의 연속 강의, 2부에는 마우리찌오 랏짜라또와 삐올로 비르노의 글을 실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주체성, 미적 생산, 시간의 재구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비물질노동 개념을 발전시켜 보려는 우리 나름의 이론적 개입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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