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인간의 조건>, 42~44절(400~434쪽)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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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the
작성일
2019-03-3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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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20190330 정치철학 고전 세미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400~434쪽, 발제자: 홍원기

제6장 활동적 삶과 근대

42. 활동적 삶 내에서의 전도와 호모 파베르의 승리
1. 활동적 삶 내의 활동 가운데 이전에 관조가 차지하던 지위로 제일 먼저 상승한 것은 만들고 제작하는 활동: 호모 파베르가 특권을 갖게 됨.
1.1 근대의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도구와 도구를 만드는 자로서의 인간, 이후 모든 과학적 진보는 이전보다 더욱 세련된 새로운 도구의 제작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됨.
1.2 더 중요한 것은 실험 자체에 존재하는 생산과 제작의 요소. 실험은 관찰해야 할 현상을 스스로 생산하며, 애초부터 인간의 생산능력에 의존.(400)

2. 생산성과 창조성에 관한 근대적 견해에서 눈에 띄는 보다 중요한 또 다른 요소가 있음: ‘본질’과 ‘이유’에서 ‘방법’으로 강조점이 이동.
2.1 이제 사물이나 영원한 운동이 아니라, 과정이 지식(401)의 실질적 대상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과학의 대상은 더 이상 자연이나 우주가 아니라, 역사, 즉 자연이나 생명 또는 우주가 존재하게 된 역사여야 한다는 점.
2.2 자연은 이제 과정이 되었음. 모든 자연적 사물의 의미는 오로지 전체 과정에서 행하는 그들의 기능으로부터 주어짐.
2.3 근대가 생산물 그 자체에 대한 모든 관심을 버리고 오로지 그 과정만을(402) 강조한 것은 매우 새로운 것. 이제 호모 파베르의 관점에서 수단인 생산과정 또는 발전은 완성된 생산물인 목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됨. 생산물은 단지 부차적 산물.

3. 근대는 특별히 진리를 수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심하고 주어진 것을 불신하며, 그리하여 인간의식 내에 안다는 것과 생산한다는 것이 일치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희망에 고무되어 새롭게 생산과 자기반성을 확신했음.(403)
3.1 데카르트적 회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결과 중 하나는, 근대는 자연을 이해하거나 인간이 생산하지 않은 것을 알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대신에 오로지 인간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사물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
3.2 근대가 역사와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던 가장 큰 충동 중의 하나는(404) 인간이 만든 대상에만 적합하다고 생각되었던 인간 이성에 대한 절망.

4. 근대의 역사 발견보다는 앞서지만 그 동인에서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새로운 정치철학을 서술하려는 17세기의 시도들. ‘국부Commonwealth’ 또는 국가라고 불리는 인공 동물을 만들기 위한 수단과 도구를 발명하려는 시도들.
4.1 홉스에게도 “최고의 동인은 회의”. 그에게 인간의 ‘기술 작품’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을 만들고 판단하는 기준과 규칙은 인간 바깥에 있지 않으며, 차라리 인간 내부에 숨겨져 있으며 오로지 자기반성에 의해서만 드러남.
4.2 자연의 사물을 존재하게 했던 ‘제작’ 과정을 인공적 조건 아래 모방하려는 시도인 실험을 통해 자연과학을 지배했던 과정(405)은 인간사 영역의 행동원리로도 기능하며, 더 잘 기능함.
4.3 홉스는 제작과 계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치철학에 도입하고자 함. 아니, 새롭게 발견한 생산의 소질을 인간사의 영역에 적용하고자 함.(406)
4.4 홉스의 철학은 근대 합리주의는 비현실적이며 근대 실재론은 비합리적이라는 곤란 때문에 침몰. 즉 현실과 인간이성이 분리되었기 때문.
4.4.1 정신과 현실을 화해시키려는 헤겔의 거대한 기획은 근대의 이성이 현실이라는 암초에 좌초되었다는 통찰에서 출발.

5. 가장 세계적인 인간활동인 작업과 사물화, 사물의 생산과 세계의 건설에까지 근대의 세계소외가 확장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는 사실은 관조와 행위, 사고와 행동의 전도가 시사하는 것 이상으로, 근대의 태도와 가치평가를 전통의 그것과 예리하게 갈라놓음.
5.1 관조와의 단절은 과정의 개념을 제작에 도입함으로써 완성.
5.2 그리스 정치철학: 폴리스에 저항하는 입장으로 변했을 때조차 여전히 폴리스가 설정한 질서를 따름.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작업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작업과 행위의 관계를 전도시키고자 함.(407)
5.3 관조와 제작은 내적 친화성을 가지며, 관조와 행위와의 관계와는 달리 서로 명확한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음. 장인의 작업이 ‘형상’에 의해 인도되는 한에서 관조는 제작에 내재하는 요소로 여겨짐.
5.3.1 소크라테스학파가 최초로 묘사한 이러한 관조의 이중적 원천.
① 타우마차인Thaumazein, 즉 존재의 기적에 대한 놀라움으로부터 모든 철학이 시작.(408)
②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내적인 눈으로 모델의 형상을 보고 이것에 따라 대상물을 제작하는 장인의 경험에 기초함. 인간이 자신의 작업능력을 단념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이데아를 볼 수 있고 그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음. 이때 관조는 모든 작업과 행위와 분리되었을 때조차도 작업과정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그것으로 남음.
-> 전통철학에서는 두 번째 관조가 지배적인 것이 됨.(409) 관조의 상태는 제작활동을 의식적으로 중단함으로써 도달됨.
5.4 따라서 관조와 관조적 삶의 개념과 실천을 형상한 것은 철학자와 무언의 철학적 경이가 아니라 위장한 호모 파베르. 그가 해야 하는 것은 팔을 내리고 형상을(410) 바라보는 행위를 무한히 지속하는 것이 전부.

6. 따라서 모든 종류의 활동에 대한 관조의 우선성에 대항하여, 이미 확립되어 있는 관조와 제작의 서열을 단지 뒤엎기만 했다면, 근대는 여전히 전통의 틀 안에 머물고 있을 것.
6.1 이 틀은 제작 그 자체를 이해해서 강조점이 완전히 달라지자 강제로 열림. 강조점은 이제 생산을 이끄는 영속적 모델과 생산물로부터, 제작과정으로 이동.
6.2 관조는 진리를 산출한다고 믿어지지도 않고, 활동적 삶 자체에서 가졌던 지위도 상실한 까닭에, 일상적 인간경험의 영역 안에 위치하게 됨.

43. 호모 파베르의 패배와 행복의 원리
1. 호모 파베르의 전형적인 태도: 세계의 도구화 / 인공물을 만드는 제작자의 도구와 생산성에 대한 확신(411) / 모든 영역에서 수단-목적 범주의 신뢰 / 모든 문제는 해결 가능하고 인간의 동기들은 유용성의 원리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확신 / 주어진 모든 것을 원료로 취급하고 자연 전체를 깁기를 원하면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는 광활한 옷감으로 간주하는 주권 / 지능과 창조성의 균등화, 즉 인공물의 제작 특히 도구의 제작을 위한 첫 단계로 간주할 수 없는 모든 사상에 대한 경멸 / 제작과 행위의 동일시를 당연시 여기는 것.(412)
1.2 자연과학, 고전경제학, 현대철학에서의 사례(412~413)

2.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가 호모 파베르를 존경한다는 점이 아니라, 이 존경으로 인해 활동적 삶의 위계질서 내에서 노동이 너무나 빨리 최고 지위로 상승했다는 점.
2.1 호모 파베르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과정의 개념이 근대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 그 강조점이 ‘본질’에서 ‘방법’으로 이동하면서, 제작자이자 세계 건설자로서 인간은 고정되고 영속적인 기준과 척도를 박탈당함.(413)

3. 현대성의 혁명으로부터 탄생한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고안해냄으로써 경이로운 천재성을 확보했지만, 제작과정에 선행하는 불변의 척도들을 박탈당함.
3.1 의미 있는 인간능력의 영역에서 관조를 제거함으로써 활동적 삶의 활동들에서 제작이 가장 많은 것을 상실.

4. 호모 파베르의 세계관의 정수인 유용성의 원리는 불충분하다고 판명되어 재빨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로 대체. -> 호모 파베르의 자기 권리 주장이 실패했음을 보여줌.(414)
4.1 호모 파베르의 제한된 준거틀 내에서 생산물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상실된 것은, 호모 파베르가 자신을 사물을 만드는 자나 우연히(415) 도구를 발명하는 세계 건설자로 정의하지 않고, 일차적으로 도구 제작자, 우연히 사물을 생산하는 ‘특별한 도구를 위해 도구를 만드는 자’로 생각되자마자 자동적으로 발생.
4.2 이제는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유용한 것. 즉 궁극적 척도는 유용성이나 대상의 사용이 아니라 ‘행복’. 여기서 행복은 생산이나 사물의 소비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쾌락의 총계.

5. 제러미 벤담의 ‘고통과 쾌락의 계산법’: 수학적 방법을 도덕과학에 도입할 수 있다는 이점과, 전적으로 자기반성에 존재하는 원리를 발견했다는 놀라운 매력을 결합시킴.
5.1 행복: 쾌락에서 고통을 뺀 총계. 이는 감각을 지각하지만 세계대상과는 무관한 내적 감각과 같으며 자신의 활동만을 의식하는 데카르트적 의식과도 같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들 본성의 동일함.
5.2 모든 헤도니즘의 원리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회피.(416) 쾌락은 자기 이외의 무언가를 즐기는 것. 반면에 고통은 자기반성이 반성할 수 있는 유일한 내적 감각. 이 내적 감각은 경험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가장 자명한 확실성을 갖는 논리적 추론과 수학적 추론에 견줄 수 있음.

6. 고대의 세계소외: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인해 고무. 세계에 연루되어 겪는 고통으로부터 자아가 자신 이외에 어떤 존재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곳인 내적 영역 안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에 의해 촉진.
근대의 청교도주의, 감각주의, 벤담의 쾌락주의: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인해 고무. 인간감각이 실재를 지각하는 데 부적합하며 인간이성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도 부적하다는 의심과 인간은 본질상 결핍의 존재이자 심지어 박탈을 당한 존재라는 확신에 의해 촉진.(417)
6.1 고대인: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상상하거나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전의 행복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다고 확신.
근대인: 행복이나 구원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수학적 확실성에 이르기 위해, 근대인은 쾌락의 계산법을, 청교도는 공덕과 죄에 대한 도덕적 장부를 필요로 함.(418)

7. 고통-쾌락 계산법이 제공하던 어떤 것보다 훨씬 강력한 새로운 원리를 형성하는 또 다른 준거점을 발견하게 됨: 삶의 원리.
7.1 18~19세기의 모든 체계에서 고통과 쾌락, 공포와 희망이 성취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행복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증진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생존 보장이었음. 최후의 수단으로 항상 삶 자체가 그 밖의 모든 것의 준거점 역할을 하는 최고 기준이 됨.(419)

44. 최고선으로서의 삶
1. 호모 파베르의 패배는 왜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로 끝났는가.

2. 근대에서 삶이 궁극적인 준거점이자 근대사회의 최고선이 된 이유(421)는 이러한 근대의 전도가 기독교 사회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
2.1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기독교 사회의 기초적 믿음은 세속화와 기독교 신앙의 일반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들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도 않았음. 개별적 인간생명의 불멸성에 대한 기독교의 ‘기쁜 소식’은 인간과 세계의 고대적 관계를 전도시켰고 가장 가멸적인 인간생명을 당시 우주가 차지하고 있던 불멸성의 지위로 끌어올렸음.
2.1.1 고대세계에서 기독교의 승리가 대체로 이 전도에 기인한다는 것은 근거 있는 주장.
2.2 세계의 불멸성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가장 큰 영감을 얻었던 정치적 활동은 이제 필연성에 예속된 저급한 수준의 활동으로 추락. 이전에 정치적 조직체의 ‘생명’이 가지던 지위는 이제 개별적 인간 생명이 차지.(423)

3.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활동적 삶 내부의 고대적 구별과 명료한 표현을 균등화시킴. 노동‧작업‧행위가 현세의 필연성에 똑같이 예속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노동활동 즉 생물학적 과정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경멸하지 않았음.(424)

4. 그러나 <신약>이나 근대 이전의 다른 기독교 저자들이 노동을 예찬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음.(425)
4.1 생명의 신성함과 어떤 경우에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긍정적인 노동철학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426) 모든 인간활동에 앞서 관조적 삶을 최우선시 했기 때문.
4.1.1 이러한 확신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고, 그리스 철학에 그 원인이 있음. 예수가 권면하는 유일한 활동은 행위. 그가 강조하는 유일한 인간능력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

5. 근대는 최고선이 세계가 아니라 삶이라는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해옴.
5.1 노동의 사회가 직업인의 사회로 대체된 현재의 우리 세계에도 이것은 여전히 진리로 남아 있음.(427)

6.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행위와 관조의 전도가 이전의 삶과(428) 세계의 전도와 일치한다는 것이 근대가 발전한 것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
6.1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 내에서 자신의 준거점을 상실할 때에만 완전한 의미에서의 행위의 삶이 됨. 그리고 행위의 삶이 자신의 유일한 준거점인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노동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 보일 수 있음.

44.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
1.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 데카르트적 회의의 필연적 결과로서 근대의 신앙 상실. -> 불멸성에 대한 확신 상실. 세계 역시 더 안정적이거나 더 영속적이거나 더 의지할 수 없는 것이 됨. -> 근대인은 이 불확실한 세계가 아닌 자신에게 내던져짐. -> 세계의 실재를 의심.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의 입장에서 세계가 실재한다고 가정하는 한, 근대인은 자신을 지구로부터 훨씬 더 먼 곳에 떼어놓음. ->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계산하는 텅 빈 과정, 자기 자신과(429) 행하는 정신의 작용. 이 정신에 남겨진 유일한 내용은 탐욕과 욕망, 즉 신체의 무감각적인 충동. -> 근대인은 이 충동을 열정으로 오해했으며 ‘추론’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 -> 이제 잠재적으로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삶 그 자체, 즉 인간 종의 잠재적으로 영속하는 삶의 과정.

2. 근대 초기: 개인의 ‘이기적’ 삶 주장. / 근대 후기: ‘사회적’ 삶과 ‘사회화된 인간’을 강조(마르크스의 사례).
2.1 이제 남겨진 것은 ‘자연적 힘’, 즉 모든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똑같이 예속되어 있는 삶의 과정 자체의 힘. 이 과정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인간이라는 동물 종의 생존.
2.2 개인의 삶은 삶 과정의 한 부분이 됨. 노동한다는 것, 즉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보장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게 됨. 삶과 자연의 신진대사에 필요 없는 것은 잉여이거나 아니면 단지 인간을 다른 동물 종과 구별시키는(430) 특성이라는 점에서만 정당화.

3. 이 발전으로 인해 많은 인간경험이 상실.
3.1 관조만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인간경험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사고 자체도 ‘결과를 계산하는 것’이 됨으로써 두뇌의 한 기능으로 변함.
3.2 행위는 곧장 생산과 제작의 관점에서 이해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 관점에서만 이해됨.
3.2 제작은 이제 노동의 다른 형식, 더 복잡하지만 그렇게 신비스럽지는 않은 삶 과정의 한 기능으로 간주.

4. 반면에 인간활동의 영역에서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이상 유토피아로 간주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노고와 고통을 완화시키는 길을 발견함.
4.1 노동하는 사회 또는 직업인 사회의 마지막 단계는 구성원에게 단순한 자동적 기능만을 요구. 마치 개인의 삶이 실제로 종의 총체적 삶의 과정에 포섭되어 있으며, 또 개인에게 필요한 유일한 능동적 결정은 여전히 개별적으로 지각되는 삶의 고통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멍하고 ‘평온한’ 기능적 형태의 행동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음.
4.2 전례 없고 전도양양한 인간활동의 분출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장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수동성의 상태에서 끝날 수도 있음.(431)

5. 인간이 동물 종으로 퇴보하려 한다는 심각한 위험을 나타내는 신호들.
5.1 충분히 멀리 떨어진 우주의 유리한 지점에서 바라볼 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 나타남. 근대의 자동화는 생물학적 돌연변이의 과정으로 나타남.(432)

6. 근대인이 자신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건 아님.
6.1 인간은 만들고 제작하고 건축하는 일을 고집함. 물론 이들의 능력은 점점 더 예술가의 능력으로 제한, 이 능력에서 얻어지는 세계성의 경험은 점점 더 일상적인 인간경험의 영역에서 빠져나가버림.
6.2 과정들을 야기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능력은 설령 과학자들의 배타적 특권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음.
6.2.1 과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세계 사이에 예전부터 존재하던 보호의 경계선을 없앨 정도로 인간사의 영역을 확장시켰음. 이들 과학자의 행동은 이른바 정치가들의 외교나 행정활동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크며 그 가치 면에서도 더 새롭다는 것이 결국 분명해질 것.
6.2.2 과학자들의 행위는 우주의 관점에서 자연에 작용을 가하지 인간관계의 망에는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가(433) 본래 가지는 계시적 성격과 이야기를 산출하고 역사적 사건이 되는 능력을 갖지 못함.
6.3 사유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가능하며 또 실제로 이뤄짐.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취약하지는 않음. 실제 전재정치에서는 사유하는 것보다 행위하는 것이 훨씬 쉬움.(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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