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호] ‘언니’로서의 사명ㅣ김현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10-24 21:46
조회
609
 

‘언니’로서의 사명


김현진 (작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라영의 팬이라기보다는 ‘편’이다. 그동안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권리>,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타락한 저항>, <정치적인 식탁> 등 긴 호흡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짧은 호흡으로 가야 하는 다양한 매체에서도 그의 글의 명료함은 언제나 빛난다. 예술사회학 ‘연구자’ 답게 학문적으로 어떠한 상황을 정의하고 풀어내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상아탑 안의 고귀한 학자처럼 그 분야의 전공자를 빼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현학적인 글을 쓰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그의 ‘편’이 되었다. 아직까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많은 지면과 발언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욕설과 성희롱이 가득 찬 메일을 받으면서도 기가 죽지 않는 그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 연구자이지만 대중의 마음에 바로 가 닿는 글을 쓰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 이 사람은 지성과 이성과 감성이라는 세 박자를 모두 갖춘 작가로구나, 하고 늘 탄복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폭력의 진부함>은 그간 나왔던 그의 저서 중 단연 온도가 뜨거운 편이다. 박원순 시장이나 안희정, n번방 등 한국 여성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사건들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갖춘 지성, 이성, 감성 중 그간 좀처럼 내보이지 않았던 감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폭력의 진부함>은 특별하다.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이라영은 무려 1980년대 중후반부터 2018년까지 자신이 겪어 온 여성으로서의 고통과 불쾌함, 공포감, 분노와 그 감정을 불러 왔던 사건들을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를 내보이듯이 솔직하게 열어 보인다. 그것은 나 이렇게 아파, 내 마음을 좀 알아줘, 하는 어리광이나 하소연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여성들에게 너도 아팠다는 것을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 얼마든지 화내도 돼, 하고 고통을 나누자는 몸짓으로 읽힌다.


일대 일 수업을 하면서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녀가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뒤에서 아이를 꼭 껴안고 그 애가 문제를 푸는 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수학 선생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요즘 인터넷에서 남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로리’가 좋다고 떠드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걸까. ‘로리’가 좋다는 남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로리’와 거의 접할 기회가 없지만 이 수학 선생은 아주 손쉽게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어린 이라영을 끌어안고 있다가 욕망이 동하면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의 뒤에서 허리띠를 풀고 거친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위를 했다. 당시에는 그게 뭔지도 몰라서 특별한 불쾌감도 없고 그냥 참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이라영은 그게 자위행위였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한다.


이것은 비단 이라영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라영은 1부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말한다. 과연 그렇다. 한국에서 자라나고 어른이 된 여성 중 성추행 한 번 안 당해 본 여성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교하는 여학생들 앞에서 옷섶을 한껏 펼치고 남성기를 드러내며 한 번 빨아 보라고 지껄이는 바바리맨들, 선생님 배고파요, 하고 조잘조잘 떠드는 여학생들에게 내가 한번 열 달 동안 배부르게 해 줄까? 하고는 세상에서 제일 재치 있는 농담을 했다는 듯이 껄껄 웃는 남자 선생, 무심코 택시 조수석에 탄 여고생의 젖가슴을 웃으면서 아주 귀엽다는 듯이 주무르는 바람에 다시는 조수석에 타지 않게 된 여고생, 소위 ‘슴만튀’ ‘엉만튀’라 불리는 가슴과 엉덩이를 꽉 주무르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성기를 움켜쥐고는 아주 재미있는 장난을 했다는 표정으로 낄낄대며 달아나는 남자들. 이러한 경험을 하고서도 네가 좀더 조신했어야지, 남자는 다 짐승이라니까,


왜 그런 곳에 있었어, 하고 오히려 비판을 받은 우리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라영이고, 이라영은 우리 모두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라영은 이런 종류의 폭력에 노출된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여성들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하면, 꼭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너는 왜 그렇게 이상한 사람 많이 만나니? ” 내가 무슨 찌질이 탐지기처럼 이상한 사람한테 걸린다는 것이다. 고로, 내가 이상한 사람만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는 심지어 어떤 음습한 우월감까지 숨어 있다. 네 주위엔 왜 이상한 사람만 있니? 내 주변엔 그렇지 않은데. 이것은 이라영이 쓴 대로 ‘여성에게서 성폭력의 원인을 찾는 강간 문화의 산물’이다.


20대에 미술 전시 관련 일을 하던 이라영은 술자리가 길어져 두 명의 후배와 함께 어느 작가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런데 이 작가는 한 방에서 세 명을 성추행할 수 있는 에너지와 정욕의 소유자였다. 간신히 후배들과 도망친 이라영은 1년 후 그의 전화를 받고 그의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만, 그는 자신이 큰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받아 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이라영은 내가 왜 친절하게 받았을까, 내 친절을 회수하고 싶다 할 만큼 괴로워한다. 이것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쁘게 말하기’를 평생 강요당하고 살아온 여성들은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에게 맞설 때에도 평생 입에 붙은 습관대로 ‘지금 저 성희롱하시는 거예요? ’ 하고 말했다가 내가 왜 그렇게 친절하게 말했을까, 그 개만도 못한 새끼에게, 하고 여러 번 후회한다. 성폭력을 ‘하시다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우리는 이런 세계를 소녀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화장실에 갔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결에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 성폭력 피해자인데도 관등성명을 밝혀야 하는 세계를 그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라영은 소녀들에게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물려주는 것을 ‘언니’들의 숙원 사업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들에게 야망을 가지라고 외치는 그는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치적 역할을 한다, 상식을 불편하게 만드는 언어를 통해 억압당하는 존재를 힘을 얻으니 상식에 저항하라, 해방된 언어는 행동에 추동력을 준다, 그러니 소녀들이여, 두려움 없이 말하라! 라고 소녀들을 격려한다. 이제 어엿한 기성 세대가 된 나로서도 그렇게 소녀들이 갖는 두려움을 아주 조금이라도 지워 주는 것이 ‘언니’로서의 사명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뛰었다. 수많은 ‘언니’들이 그렇게 뭉쳐서 소녀들에게 몸가짐을 조심하라느니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느니 여자는 그저 예쁜 것이 최고이니 다이어트를 하라느니 그런 소리를 지워 버리고 두려움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길을 닦아 준다면, 이라영과 우리의 응원을 받은 소녀들은 해방된 언어라는 무기를 가지고 두려움 없는 ‘다시 만난 세계’를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0년 10월 12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7E0E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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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 마찰, 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1986년에 초판이 출간된 후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오늘날 이 책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실감 나게 다가온다. 가부장제를 이용한 자본주의적 착취는 한 세대 동안 더욱더 노골적이 되었으며,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본질을 찾으며, 현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뿌리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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