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예술로서의 삶』 서평 / 찬초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2:07
조회
2512
『예술로서의 삶』 서평


찬초(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예술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헤겔의 말처럼, 예술은 이상적인 삶과 세계를 위한 수단으로는 너무 미약하고,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방구석에 앉아 풀리지 않는 시 한 편에 몰두하기보다는 당장 거리에 나가서 시위대의 일원이 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고 강력한 저항방법이 아닌가? 이처럼 예술이 지나치게 사적이고 미약한 실행에 불과하다는 점은 언제나 그 사회적 소용을 논하는 자리에서 예술의 최대약점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런데 재커리 심슨의 <예술로서의 삶> (갈무리, 2016)은 예술이 다분히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저항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삶에 대한 의문을 해명하려고 했던 19-20세기 철학자들의 논의를 예술을 키워드로 정리한다. 일단 저자는 삶과 예술의 동일성이라는 기나긴 논의를 시작한 댄디즘과 신의 죽음 이후 예술을 인간이 의지할 만한 가능성으로 지적한 니체를 경유하며, 예술의 부정성이라는 계기를 강조한 아도르노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와 예술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마르쿠제의 철학을 통해 예술 자체가 저항적 삶의 실천과 맞닿아 있음을 밝힌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의 시적 사유와 메를로-퐁티, 그리고 신학자 마리옹의 존재 사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예술적 사유 안에서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성찰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저자는 이렇게 삶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고민해온 학자들의 주제를 연결하여 자기 창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 가는 미학적 주체의 인간유형을 발견한다. 푸코의 언어를 빌려 설명하면, 이는 자기배려의 기술을 구사하여 새로운 미학적 주체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인간유형을 일컫는다. 저자는 이러한 인간유형에 합당한 사례를 카뮈의 소설에서 발견하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염병이라는 한계 속에서 투쟁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고유한 행복을 일구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전염병과 상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율적인 삶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반다나 시바, 르네 마그리트 등과 같은 실존인물들의 사례를 들어 이러한 논의를 보충하고 있다. 환경운동가로 활동한 반다나 시바는 노동을 소재로 삶을 창조해 나감으로써 사회적인 참여까지 추구하였으며, 르네 마그리트는 얼핏 현실도피적이고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작업을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부조리함을 즉각적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예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다소 추상적인 논의로 흐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지만, 저자는 이렇게 소설속의 등장인물과 실존 인물의 사례를 예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더욱 풍부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의로 미루어볼 때, 예술의 개인적 실행이라는 특성은 지극히 사적인 생활을 고민하고 탐구해 나가는 과정인 삶의 면모와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저자가 삶과 예술의 완전한 동일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술작품이 의미의 일시성과 상황성, 즉각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삶 역시 안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딘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발견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 행위를 하듯 스스로 삶을 창안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예술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삶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여기에 입각하여 새로운 미학적 주체성을 창조해 나가는 삶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이 권하는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꾸려 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게 충분한 이론적 지침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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