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호] 4월 2일 7시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집단서평회 발표문 모음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2:17
조회
1808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출간 기념 집단서평회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일시 : 2017년 4월 2일 일요일 저녁 7시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강의실
사회자 : 조미애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서평자
김아리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권혜린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 수료)
유채림 (손님들이 좌파식당으로 부르는 「두리반」 주인의 남편, 소설가)
우연식 (만화 작가)
표광소 (시인)

*

기린은 왜 목이 길까?


김아리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잉에 로마르크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매력 지점이 없는, 작가의 말을 빌자면 ‘거부감을 일으키는’ 캐릭터다. 로마르크의 일상을 따라가는 것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이 주는 느낌과 유사하다. 일상 곳곳에서 적나라하게 속물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군상은 공감과 유머보다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

로마르크는 교사라는, 관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직군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중년 여성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멈춰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학교만큼 최적화된 곳도 없다. 직업으로서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학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상이 되는 학생이란 비교적 저항이 적고 순종적인 속성을 보인다. 게다가 전문성이라는 아우라에 가려져,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지식의 컨텐츠들을 아무나 함부로 평하지도 않는다. 교사 스스로가 깨기 전에는, 박제된 유물로 존재해도 별 문제가 없는 직업이다. 심지어 로마르크처럼 학생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고 있다 해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로마르크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생물교사이며, 스스로 진화론자이다. 누구나 연구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설득되다 보면, 신앙처럼 그 연구 대상을 신봉하게 된다. 로마르크 역시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교사로서의 교육관 등등 삶의 전반에서 일관되게 진화론적 가치관을 드러낸다. 자신의 학생과 동료교사, 이웃들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매도와 이해를 오가며 자기의 판단기준들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간다. 이 과정에서 로마르크가 나르시즘마저 느끼는 것 같아 그녀가 위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들키지 않게 모두를 내려다보기, 자기 해석만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독선을 마음에 품지만 적당한 말과 표정, 침묵으로 감추기,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모호함으로 가족의 인생에마저 개입하지 않는 영원한 타자로서의 태도, 로마르크가 계속 나를 불편하게 한 지점들이다.

게다가 시점은 다르지만, 자신의 학생과 딸이 학교에서 장시간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 왔고, 심지어 자신이 목격을 했는데도, 관찰자의 시선으로 외면해버린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이길 자격이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부당함이나 불평등도 없는 자연의 이치를 따른 것일 뿐’이라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진화론적 가치관을 들이민다. 게다가 집단이 ‘우리’라는 친밀감을 위해, 한 사람의 약자를 골라 공동의 먹잇감을 만들고 대상이 된 약자는 스스로를 도와 상황을 벗어나도록 저항하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는 상황해석까지 한다.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적응에 실패한 존재에 대해서는 자신의 혈육일지라도 자비의 손을 거둬버리는 냉정함을 보인다. 교사로서 최소한의 의무와 직업윤리도, 보편적 인간성도 상실한 이 사람에게 도대체 언제쯤 나는 작가가 느꼈다는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통일 이후의 동독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치·경제적인 상황이 급변하고 마을과 직장이 공동화되어가는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로마르크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들어 온 자신의 자리에 박혀있기로 한 듯하다. 변하는 세상에 맞춰 적응하지 못하는, 진화의 패배자가 된 자기모순 안에서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닐지...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으로 DNA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만큼, 혹은 그보다 더 힘들다.’는 진실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 한 시대의 화석으로 남아버리기로 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처럼, 습관처럼 유지해온 자신의 가치관은 버리지 못한다. 진화론적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설명하고 밀려오는 감정들까지도 통제하며 살아 온 생애와는 달리,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역사 속에서 소멸의 운명만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진화는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현상 혹은 법칙 중의 하나를 생존과 존속의 목적을 위해 실천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생태적 역사를 설명하는 방법의 하나일 수도 있다.

진화라는 어휘가 갖고 있는 보편적 이미지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발전, 발달, 진보의 의미와 혼용되기도 한다. 로마르크의 설명대로 진화는 단순함을 향해가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종만의 고유성을 또렷하게 만들어간다. 그러나 진화란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주워진 것에 적응시키는, 가장 역동성이 적은 생명체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진화론적 가치관은 상생보다는 과도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법칙을 강조하고, 이것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유사하게 사회 구조 안에 먹이사슬과 생태피라미드 그려 넣게 했다. 마찬가지로 계급의 피라미드를 균형과 안정을 위해 계급 내에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룰을 적용하고, 급간 이동 제한, 생존을 위한 적응, 실패는 도태한 것으로 간주해 폐기한다.
어쩌면 로마르크의 일관된 냉소적 시선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과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할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과 관습적 태도에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판단기준으로서 작용하는 다윈주의를 반성해 보게 한다.


과정 중의 진화, 미완결의 성장


권혜린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박사수료)


유디트 샬란스키의 『기린은 왜 목이 길까?』 는 교양소설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일반적인 교양소설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생물 선생인 로마르크는 교양수업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으로서 수업을 통해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거나 세계와 화해하지 않는다. 세계 ‘밖’으로 나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일반적인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의 루트를 따르지 않고, 세계 ‘안’에서 ‘성장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너져 가는 세계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독일의 통일 이후 이농 등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찰스-다윈 김나지움도 4년 뒤에 문을 닫게 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종말이 예고된 상황에서 로마르크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살던 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식물처럼 침묵한 채 제자리에 못 박혀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와 달리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갖기 어려운 생물이라는 학문은 로마르크에게 적합하다. 해파리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로마르크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는 것만 시도한다. 로마르크에게 변화란 사물이 자연스럽게 변하는 계절에만 해당되는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와 판서로만 수업하는 자신과 달리 토론 수업을 중시하고, 학생들과 친밀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도 동정을 구하면서 다가오는 슈바네케를 부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르크가 무기력하지는 않다. 로마르크도 엄격한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갈등을 일으켜 딸과 사이가 멀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르크가 물리적으로 중년의 나이이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장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까? 생존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물들어 있는 것 같은 로마르크에게도 균열의 지점은 있다. 수업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사생활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오로지 기온에만 관심 있는 이웃집 한스에게 동정심을 갖고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또한 학생들을 “흡혈귀”(15쪽)와 같은 천적이라고 생각해서 엄격한 교사로서 거리를 두지만 에리카와의 관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좁히는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에게 말을 걸고, 에리카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 하고, 버스가 고장 났을 때 에리카를 자신의 차에 태우는 것은 에리카를 예외로 보면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엘렌이 괴롭힘을 당할 때 그녀를 ‘낙오자’라고 생각하면서 방관했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 로마르크가 교사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한다. 로마르크는 학생들의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서열, 짝짓기, 경쟁, 스스로 돕는 것 등에 대해 분석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생태계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감독과 지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르크는 학교 폭력의 과정에서 식물처럼 침묵하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되기를 바란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권력 지향적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카트너 교장이 끊임없이 교육할 것을 요구하지만, 로마르크는 새로운 시대에 자신을 맞추어 개발하려고 하지 않고 그 세계와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두 각자 성장”(334쪽)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장은 고통의 과정이기도 한데 로마르크는 그러한 고통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결과 천적인 학생들 앞에서는 강한 교사이고자 했지만 정작 교사들 사이의 생존 투쟁에서 밀려나 도태된다.

그런데 그 이후 로마르크는 진화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연의 균형이 죽음․끝이고 불균형이 순환을 이루게 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도 언제나 미성숙하며 과정 중에 있을 것이다. 진화와 성장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기린이 살기 위해 “괴물”(330쪽)처럼 긴 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영향력과 책임”(330쪽)을 다하는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고, 훈련이 습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진화하려는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재가 늘 과정 중의 진화로서 움직이고 있으며, 완결되지 않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로마르크에게 게으름은 가장 피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진화에 대한 로마르크의 생각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진화는 우연성을 갖고 있으며 퇴행도 진화일 수 있고, 심지어 진화가 사고의 오류이며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화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는 것도 일종의 내적 성장일지 모른다.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서평


우연식 (만화 작가)


‘나아질 가망이 전혀 없음.’ 이 소설의 주인공 잉에 로마르크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생물 선생인 로마르크의 해박한 생물학 지식은 촘촘히 연결되어 그녀의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학교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대담론이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생존경쟁의 이론을 통해 바라본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녀의 학생들은 젖은 부댓자루와 다름 없는 낙오자들이다. 그녀가 기대를 걸만한 순수한 혈통의 종마같은 아이는 흔치 않았고, 그 외의 멍청한 아이들에게는 빨리 현실을 빨리 깨우쳐 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차피 모든 생물은 환경을 파괴하게 마련이다.’
슈바네케가 육류를 먹지 않겠다고 밀어놓았을때 로마르크는 생각한다.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자연에 개조와 개혁을 가한 미추린이라는 학자에 대한 로마르크의 생각이었다.
‘자연은 극복되지 않는다.’ 로마르크에게는 그것만이 진리였다.

그녀 자신은 성실하게 원칙에 기대어 사는 30년 경력의 교사로 스스로를 여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학생들과 동료 선생들, 그리고 딸 클라우디아는 그녀에게 스민 오만함과 황폐함의 낌새를 조용히 알아챘던 것 같다. 그나마 남편 볼프강만이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만, 이마저도 아무 대화 없는 비정상적인 공생을 하는 것 뿐이었다. 로마르크의 의식의 흐름을 관조하는 독자들은 실소를 넘어 폭소하며 그녀의 가망 없음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게 된다.

언뜻 보기에 로마르크는 작은 소도시의 어느 평범하고 성실한 시민이 아니었을까. ‘판서 위주로 수업하고 사교 능력이 부족한 고루한 사람’ 이라 평가되긴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30년 반이란 시간을 무사히 교사로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경쟁만이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때때로 위험한 선을 넘을 것만 같지만, 그것이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이와 유사한 사회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만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낙오자를 만든다.

로마르크 또한 도태되는 학생들을 만들었다. 나아질 가망이 없는 타베아, 잡초처럼 눈에 띄지 않는 라우라, 성장이 매우 느린 페르디난트, 짜증나는 케빈과 같은. 로마르크는 비행기 조종사나 해양생물학자가 될 수 없을 듯한 이 아이들을 열등하게 취급하며 개인의 삶에 대한 성과위주의 평가를 간단히 내려버리고 만다.

엘렌이 동급생들에게 학대를 당한 사건은 그녀에게는 ‘대참사도 아니고 소규모 운석 충돌도 아니고, 그저 한 아이가 도태되었을 뿐’인 것이었다.

로마르크와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듯한 슈바네케가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그녀의 행동을 통해 감정의 교류와 개인의 내적 성장, 그리고 소통을 강조했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각 학생의 개인의 역사 속에서 그 학생 자신은 누구라도 주인공일 것이며, 그에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 것이다. 자기 자식과 깊은 심정적 교류를 할 아이가 있을 것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로마르크가 가지지 못했던 것 말이다.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기린들은 모두 짧은 목을 가진 채 비참히 사라지게 되죠,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뭐든 이루어낼 수 있어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수업에서, 로마르크는 토해내듯이 말을 쏟아낸다. 이 말은 멍청하고 가망없다고 여겼던 아이들을 향한 충고인 동시에, 결국 자신을 향한 공허한 질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로마르크가 이 말을 할 때엔, 그녀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그 자신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한 생물학적으로나 도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로마르크는 자신의 열정에 지나치게 순수하게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로마르크의 생물 교과서에는 지질 시대의 생물 발생 계통도가 나선형으로 그려져있다. 그 그림에는 무려 37억년 동안의 시간이 담겨있다. 인간의 역사는 그 아주 끝에 겨우 걸쳐져 있을 뿐이다. 생물 선생인 로마르크가 소용돌이치는 그 나선 속에서 인간종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 지구에 존재했던 모든 세포 덩어리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로마르크가 묘사하는 환경의 생명력은 내 주변 자연을 다시 돌아보게 할 정도로 경이롭다. 사람들이 떠나고 빈 터에 번성한 식물의 세계를 로마르크는 아름답게 묘사하며 한없이 관대하게 바라본다. 동물들이 가진 감정 없이도 생존해가는 식물을 보며 인간들도 그렇게 살면 어떨까 생각해 보고, 때가되면 떠나는 두루미들처럼 판단 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 가득찬 것에 비해 로마르크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황량하다. 이 불일치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로마르크는 인간에게 식물이나 동물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로마르크는 인간을 ‘동물 세계와는 달리 인간 세계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나약함을 보이면 강자는 약자를 더 심하게 물어뜯는 법’이라고 말한다.‘인간은 늘 다음에 뭘 할지, 어떻게 하면 처신을 잘할지 늘 생각하고 있는 반면 동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도 한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종의 행동에 대해 깊은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인간의 역사 또한 자연처럼 진화해가는 것일진대, 로마르크는 두루미가 떠나는 다른 곳은 아름다울거라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빠르고 덧없다고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학생들을 단순한 사고회로 속에 무력하게 밀어넣는다. 모든 것을 설명할수 있다고 생각한 이론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수 없었다.인간은 모든 생물과 같지만, 그 어떤 생물과도 달랐다. 모든 것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로마르크에게 이것은 메워지지 않는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는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르크는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직업을 잃을 수도 있고, 이혼조차 하지 못할 것이고, 딸은 떠나버렸고, 3대째의 손주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관심을 갖는 학생인 에리카를 태워 학교에 갈 때에도 고작 빙하구혈에 대해서밖에 할 말을 찾지 못할 때는 연민마저 든다. 도마뱀이었다면 위험할 때 불필요한 것은 떼내고 도망갈 것이다. 이것은 동물의 본능이었다.로마르크가 떼어내버려야 할 도마뱀의 꼬리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문에서 여전히 그녀가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로마르크의 의식은 친구들에게 학대당하던 클라우디아가 엄마를 애처롭게 찾았을때 내버려두었던 기억으로 그녀를 인도한다. 로마르크는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서 딸을 도울수 없다는 자신의 원칙이 앞섰기에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는 딸의 눈물을 외면했다. 오후만 되면 늘 어둠 속에 홀로 앉아있었던 , 결국 엄마를 영영 떠나버린 딸 클라우디아. 자신도 함께 낙오자가 된 그제서야 딸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로마르크는 그녀의 완고한 원칙들이 불러일으킨 일들에 대해 다시 돌아본다. 그것이 원칙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면 로마르크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르크가 클라우디아에게 바라는 것 또한 원칙을 벗어난 애정이니까.

우월한 생명만이 생존경쟁에서 이겨 진화한다는 로마르크의 이론 또한 카트너가 은연중에 로마르크에게 해고를 고하는 때 쯤에는 완전히 불확실해진다. 그녀는 진화라는 것은 없으며, 진화는 사고의 오류일 뿐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로마르크가 타조를 한없이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타조는 비정상적으로 긴 다리로 뒤뚱거리고, 날지도 못할 짧은 날개를 푸드덕대며 철망에 작은 머리를 쑤셔넣는, 진화의 산물로는 어딘가 모자란 듯한 동물이다.그녀는 검은 사과같은 눈에 긴 속눈썹을 가진 타조를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진화의 원칙을 깨고 살아남은 것 중에는 오리너구리도 있고, 아마 인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종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르크의 말대로 퇴행은 때로는 진화에서 언젠가 다시 장점으로 드러날 수도 있게 될 수도 있다. 살아남은 것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그저 살아남은 것이다. 이 불확실성을 인지한 그 순간, 로마르크에게 자신의 거대담론을 해체하고 새로운 이론을 써야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인간은 얼만큼 자연의 본능에 따라야 하고, 얼만큼 통제해야 할까? 지금 도태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정말 도태된 것일까?해양생물학자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성공이 아닐까?혹시 다른 종류의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클라우디아에게는 무엇을 해주었어야 하는걸까? 로마르크는 영영 끝나고 만 것일까? 클라우디아는 커피를 좋아할까? 로마르크에겐 새로운 질문거리가 너무나 많아보인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가 죽으면 어떤 다른 하나가 태어나는 것을 알고 있지요.’
로마르크의 도태도 어쩌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로마르크는 이제 시작일 수도 있다.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고


표광소 (시인)


1. 재미있는 교양 소설 : 근사한 일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공생’, ‘생태계 피라미드’ 같은 생물학의 교양을 재미있게 배운다. 평소에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한 동물・식물들의 삶을 배우고, 잘 알지 못하던 동물・식물의 이름들과 마주치는 경험도 재미있다.

먹이사슬 :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 : 이끼류, 지의류, 버섯류, 지렁이, 하늘가재, 고슴도치, 뒤쥐, 박새, 노루, 매, 늑대, 사람 등.

이미 멸종된 종 : 공룡, 들소, 야생말, 머리와 깃이 흰 수리, 주머니늑대, 도도, 바다소 등.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종 : 판다, 코알라, 고래, 얼룩 독수리(선천적 형제 살해 : 알을 두 개 낳는데, 먼저 알아서 나온 새끼가 나중 나온 새끼를 죽이고, 부모 독수리는 죽은 새끼를 먹는다.)

식물들 : 삼색제비꽃, 담쟁이, 새포아풀, 마디풀, 민들레, 쑥, 별꽃, 명아주, 밀집 국화, 서양톱풀, 보리풀, 카밀러, 너도양지꽃, 개보리, 냉이, 왕질경이, 토끼고사리, 물속새, 쇠뜨기, 석송 (100쪽~105쪽), 쐐기풀, 으름덩굴 (107쪽) 등.

— 동물과는 반대로 식물들은 적은 에너지로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 냈다. 그러니까 우리 동물들은 식물과는 달리 자가 영양 생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식물에서는 작은 잎사귀 안의 미세한 엽록체 하나하나에서 우리 모두를 매일 살아 있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녹색 식물처럼 인간들이 상피, 표피, 유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장 보러 가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된다. 즉, 인간들은 아무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그저 햇빛 아래 잠시 누워 물을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피부 안에 있는 엽록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테니까.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106쪽)

2. 인생 이모작 : 환상

잉에 로마르크는 고등학교에서 30년째 생물을 가르치고 있다. 4년 뒤 학교가 폐교되어 생물 교사의 길을 접어야 한다. 학교 건물(1970년대에 지은 2층 건물)은 조만간 지역 시민 학교가 인수(61쪽)할 예정이다.

— 4년만 있으면 이곳도, 그리고 그녀도 끝이었다. 잉에 로마르크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어디서 새로 시작하지? 그녀는 다시 새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고목은 옮겨 심지 않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그녀는 남자도 아닌 여자이고, 나무도 아니었으니까.(56쪽)

— 죽기 전까지 남아 있는 소원도 많다. 그녀는 그 긴 시간 뭘 더 해야 할까? (57쪽)

— 벌써 가을이군. 맙소사. 그래, 나뭇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가을이 왔군. 이제 어디서 두 번째 봄이 찾아올까?(83쪽)

잉에 로마르크는, 그 많은 세월이 휙 지나가 버렸다(57쪽), 고 느낀다.

교육청 직원은 보고서에 잉에 로마르크가 '판서 위주로 수업하고 사교 능력이 부족한 고루한 사람'(71쪽, 328쪽)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에 로마르크는 30년 동안 해온 수업 방식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관찰과 연구,법칙과 설명이 중요'(75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생물은 실재이고, 따라서 생물 수업은 실재에 대한 보고이다. 생물 수업 시간에는 확인된 지식,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지식이 전달되었다. 그러한 생물의 세상은 저절로 그려지고 밝혀졌으며, 그러한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들은 제한 없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독재였던 것이다. (75쪽)

— 생물이란 과목은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생물의 현상과 형태에 관한, 그리고 시공간 별로 생물의 번식을 다루는 학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생물의 온갖 의미를 다루는 관찰 학문이었다. (71쪽)

3. 감정 이입 : 학창 시절의 경험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2016년에 처음 읽을 때 이 소설의 주인공 잉에 로마르크와 나는 동년배(55살)였다.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는 학창시절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 기억의 두루마리 끝자락에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교무실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수학 교사였다. 예비고사와 본고사에 합격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예비고사 점수가 발표되고,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은 대학 입학원서를 쓰고, 나는 선생님 앞에 있다. (앉아 있었는지 서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생물학과에 지원하라고 일방적으로 권유하였다. 예비고사 성적에 맞춰서 합격 가능한 대학과 전공학과를 선택하여 입학원서를 쓰면서 담임선생님한테 그 같은 권유를 받고 나는 당황했다. 생물학과에 진학한 나의 모습을 나는 도무지 시뮬레이션 할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국문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담임선생님은 입학원서에 나의 뜻을 반영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한테 나는 반론을 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공부한 학생이 대학에서 이공계가 아닌 인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할 때는 “왜?”라고 한번쯤 물어봄직 한데, 담임선생님은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나의 희망과 무관하게) 선생님이 써 준 생물학과 입학원서를 받아들고 교무실을 나섰다.

그 입학원서를 대학에 제출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본고사에 응시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으면서, 어쩌면 내가 생물학도의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기억을 나는 35년 만에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었다면 담임선생님이 생물학과에 입학원서를 내라고 할 때 그토록 많이 당황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기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한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으면서 줄곧 궁금했다. 교직 과목을 이수하고, 생물 교사가 되었을까? 잉에 로마르크와 같이 ‘교사의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선생님’(6쪽)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질문을 하며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를 읽는 동안 잉에 로마르크의 언술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잉에 로마르크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간 '또 한 사람의 나'였다.

4. 감정 이탈 : 제자의 도태

소설 읽는 재미에 몰입하여 잉에 로마르크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이 있다. 109쪽~113쪽을 다시 한 번 읽게 된다. 학교 폭력의 현장을 목격한 교사(담임)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고, 화가 난다. 그리고 잉에 로마르크의 그늘에서 나는 한 발 벗어난다. 소설에서 ‘엘렌’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시 읽어본다.

엘렌 : 41쪽, 109쪽, 112쪽, 147쪽, 183쪽, 190쪽, 324쪽 등.

— 아이들은 엘렌을 둘러싸고 있었다. 패거리 우두머리인 뚱뚱보 케빈은 히죽거리고 있는데, 그 장난에 끼는 게 즐거운 듯 보였다. 엘렌을 이리저리 살짝 밀치던 아이들이 그녀의 머리띠를 낚아챘다. 사실 그들은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하기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다. 순전히 심심풀이로 그러는 것 같은데 어리석게도 엘렌은 그들의 장난에 말려들어 그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엘렌이 더럽게 된 머리띠를 주우려고 등을 구부리자 케빈이 그녀를 확 밀쳐버렸다. (112쪽)

— 동물 세계와 달리 인간 세계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나약함을 보이면 강자는 약자를 더 심하게 물어뜯는 법이었다. (112쪽)

— 에리카는 고개를 돌려 로마르크를 화난 듯 쳐다보았다. 이 아이가 왜 이럴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줄곧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에리카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왜 이리 뻔뻔스럽게 한참을 쏘아보지? (113쪽)

— 또다시 엘렌이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이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엘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도와야 했다. 그러면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147쪽)

— 거기 책상 앞 의자에 엘렌이 앉아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자여워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고 각진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고, 눈도 부어 있었다. 로마르크는 엘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근데 그 가엾은 아이가 거기 맥없이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325쪽)

— 이 일은 대참사도 아니고 소규모 운석 충돌도 아니었다. 그저 한 아이가 도태되었을 뿐인 일이다. 그런 일, 이른바 ‘집단 역동’은 늘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327쪽)

5. 낯설게 하기 : 딸의 도태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에는 딸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현장에서 잉에 로마르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준다.

— 클라우디아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늘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성적은 상위군에 들었다. 1학년 땐가 2학년 때, 생활기록부에 ‘클라우디아는 반 친구들에게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을 잘 관철하지 못합니다.’라고 평가가 쓰여 있었다. 쉽게 말해 클라우디아는 반 아이들한테 인기가 없다는 말이었다. (344쪽)

— 로마르크는 아이들을 등지고 서서 칠판에 판서하고 있었다. 찢어질 듯한 새된 소리에 그녀는 돌아섰다. 그러자 통로 쪽으로 밀려나 있는 클라우디아의 책상이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생물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돌연 클라우디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교탁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달려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그 아이가 ‘엄마’하고 흐느껴 부르면서 팔을 뻗어왔다. 근데 로마르크는 어쨌지? 단지 ‘무슨 일이지?’하고 한 말이 그녀가 대꾸한 전부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딸 아이를 멀리 밀어내 버렸다. 그 아이는 대체 뭘 바랐던 것일까? (345쪽)

— 바닥에 누운 채 서글프게 울고 있는 클라우디아에게 다가가 위로해 주는 아이도 하나 없었다. 그녀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반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학교이고, 지금은 수업시간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엄마가 아닌 선생 로마르크였으니까. (346쪽)

— 클라우디아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충분히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었고, 외국에서 경험도 쌓았으니까. 벌써 12년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이제 클라우디아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서서히 진짜 삶을 시작할 때였다.(60쪽)

6. 동병상린의 아픔 : 주인공의 도태

앞으로 4년 뒤 학교가 폐쇄되면 잉에 로마르크는 ‘바닷가로 펼쳐진 목초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꽤 넓은 곳’(60쪽)에 집을 짓고, ‘매일 같이 들러 클라우디아와 함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목초지를 바라볼 것’(60쪽)을 기대한다. 그러나 딸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인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독은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한다.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에는 카트너・슈바네케 같이 통일 후 변화에 적응하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교사가 등장하고, 잉에 로마르크・틸레 같이 통일 후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할 마음이 전혀 없는 교사들이 등장한다.

— 카트너가 옛 여제자에게서 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다.(56쪽)

— 카트너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여자들 비위를 잘 맞춰 줬지 뭐. 근데 대체 어떻게 이 아이를 구슬렀을까? 에리카는 정말이지 그녀의 손녀뻘이었다. (111쪽)

잉에는 카트너(교장)가 여학생을 유린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그 증거를 찾으려고도 시도를 하지만, 오히려 가트너의 공격을 받아 학교에서 떠나야 하는 위기에 몰린다.

— 카트너는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 모든 건 나름대로 옳았다. 이곳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늘 똑같을 것이다. 그래, 모든 건 나름대로 질서가 있으니까,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327쪽)

— 근데 학칙은 어쩌고? 이제 여기가 종점이었다. 그건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학칙이라는 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각자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328쪽)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에서 잉에 로마르크와 엘렌과 클라우디아는 ‘선천적으로 온순하며 항상 물가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이 쉽게 쓰다듬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던 바다소처럼 사회(환경)에서 도태되는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소의 최후를 배우는 수업을 듣고 엘렌이 ‘동병상린의 아픔을 느낀 게 분명’(41쪽)하다고 짐작하는 잉에 로마르크(프롤레타리아 생물학을 학교 교육의 실제에 적용해온 교사)야말로 곧 다가오는 자신의 도태를 인지하고 바다소한테 동병상린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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